결혼 1년차 맞벌이 부부입니다. 저는 원래부터 재택근무이고 출퇴근하던 신랑도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가을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요. 밥은 제가 하고 설거지 및 뒷정리와 쓰레기 분리해서 버리기는 신랑이 하고 나머지 청소, 빨래 등의 가사는 그때그때 아무나 합니다.(신랑이 출퇴근할 때도 집안일을 잘 했지만 재택 근무 이후에 더 적극적으로 꼼꼼하게 해서 가사분담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저와 신랑은 식성이 많이 달라요. 저는 고기 없이 쌈장에 채소는 맛있게 먹을 수 있어도 채소 없이 고기는 안먹을 정도로 쌈채소와 나물류를 좋아하고, 신랑은 나물이나 채소는 쳐다도 안보고 고기는 있으면 먹긴 하는데 소시지와 햄을 굉장히 좋아해요. 연애 때는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는데 햄·소시지가 없으면 밥을 안먹어요.
출퇴근하는 신랑의 저녁식사만 준비할 때는 쌈채소나 나물을 빠뜨린 적은 있어도 햄과 소시지를 빼고 차린 적이 없는데, 재택근무 이후부터 하루의 세끼를 다 소시지와 햄을 구워주다보니 신랑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한번은 양파와 대파와 당근을 충분히 넣은 닭볶음을 만들고 햄·소시지 없이 차려봤는데 햄은 없냐고 묻고 없다고 했더니 밥알을 세다가 라면을 끓여서 먹더군요. 또 한번은 김치에 두부, 캔참치, 소시지, 햄을 넣고 부대찌개 비슷하게 끓여도 봤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와 달리 찌개 속의 다른 음식은 손을 안대고 햄·소시지만 건져서 밥을 다 먹고 기름에 굽는 게 더 맛있다고 다음부터 구워 달라길래 그러려니 포기했습니다. (밥은 제가 미혼일 때부터 현미밥만 먹어와서 발아현미밥을 먹습니다)
인터넷으로 미리미리 주문해서 쟁여놓는데 시즌이 시즌인지라 나름 빠듯하지 않게 주문한 각종 햄·소시지가 출고가 늦어져서 늦어도 토요일에는 받을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갔어요. 감기 기운이 있는 저와 늦게까지 웹툰을 보다 잠든 신랑 둘다 어제 일요일에 늦잠을 자서 낮 1시가 넘어서 (일요일) 첫식사를 하고 보니까 소시지가 약간 남고 340g짜리 캔햄이 하나가 남았습니다. 저녁 차리는 데는 충분하길래 다음날 아침에 가까운 24시간 하는 소형마트에 갈 생각이었어요.
오후에 신랑이 라면을 끓여 먹는다면서 먹을 거냐고 물을 때도 난 안먹다고 하고 햄에 대해선 무념무상이었어요. 감기가 올려고 할 때는 목을 따뜻하게 해야한대서 스카프를 두르고 집중해서 일 하다가 밥 먹자는 소리에 시간을 보니 밤 10시가 가까워오는 시간, 조금 남은 소시지에 계란물을 입혀 구우면서 햄을 꺼낼려고 보니까 없네요??? 분명히 있었는데 왜 없지 찬장을 뒤지다가 신랑에게 물었더니 라면에 340g의 (캔)햄을 다 넣고 끓였답니다. 평소에는 햄을 넣고 끓여먹는 적이 없는데 왜 하필 오늘...
조금뿐인 구운 소시지를 담고 두부 물 꼭 짜서 으깨고 채소 갈아서 고기와 섞어 치대서 만든 동그랑땡을 굽고 만두를 쪄서 차린 후에 오늘 저녁만 이렇게 먹자니까,,, 대답을 안하고 가만이 있더니 라면을 끓여서 몇점 되는 구운 소시지를 냄비 뚜껑에 얹어서 후루룩 먹고 방에 들어가더군요.
입맛이 없어서 먹는둥 마는둥 하고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맨날맨날 삼시세끼 먹는 햄 한끼 정도 건너뛰지 속으로 푸념하다가 햄·소시지를 구워달라는 게 까탈스러운 요구는 아니지 싶어서 내일 아침 또 허둥대느니 미리 근처 편의점이라도 갔다 와야겠다 하고 패딩을 가지러 가는데 침실에서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햄이 다 떨어질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햄 없으면 밥 안 먹는 거 뻔히 알면서 햄 없이 밥 차리고 라면을 끓여서 먹는데도 쳐다도 안보고 자기 혼자 밥 먹더라' 요런 내용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더군요. 저놈이 저렇게 내 뒷담화를 하고 있는데 이 밤중에 콧물을 훌쩍이면서 햄을 사러갈려고 했다니.. 내일부터 각자 밥 각자가 해먹자고 해야지하며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끊는다는 말도 없이 한참동안을 조용히 있어서 들어갈까말까 망설이다가 알겠어요하고 끊는 소리가 나서 들어갔습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네요.
할말을 할려고 벌써 자냐고 이불을 걷었는데 소리없이 울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어머님께 엄하게 혼났답니다. 어쩐지 반말로 뭐라고뭐라고 하다가 쥐죽은듯 조용히 있다가 존댓말로 끊더라니. 제 전화기로 어머님께 전화가 왔어요. 진작에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편식을 고쳤어야 했는데. 네가 아들이니까 햄 소시지 구워다 바쳤지 남편이었으면 어림도 없다. 네가 나이가 몇인데 나한테 전화로 일러바쳐!!! ㅇㅇ이도 너와 똑같이 일하는데 날마다 밥 해서 차려주면 고맙습니다하고 먹어야지 어디서 반찬투정이야!! 네 입맛대로 네가 해서 먹든가 그게 싫으면 주는 대로 쳐먹어!!! 라고 하셨다면서 자기 아빠의 못된 걸 빼다 박아서 그렇다고 고생 많았다고 미안하다고 앞으로 반찬투정하면 굶기래요. 배고프면 먹게 되어 있대요. 호강에 겨운 줄 몰라서 그런 거래요.
(시아버지가 반찬을 가리시는 걸 목격한 적이 없거든요. 나물도 잘 드시던데 흠... 어머님이 아버님의 편식 습관을 고치셨나 생각이 들어요)
눈물이 잦아들길래 어머님과의 통화에 대한 말은 안하고 나한테 맡기면 또 이런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햄·소시지는 자기가 안떨어지게 사라고 하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뭐가 그렇게 서러운가 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신랑, 새벽까지 우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의 아들인데 정말 굶기라는 말씀은 아니실테지요. 저도 굶길 생각 없고요. 신랑은 먹지도 않는 수제 동그랑땡과 양파 대파 듬뿍 넣은 불고기 따위는 그만 만들고 채소를 잘게 다져서 처음에는 극소량 점점 양을 늘려서 푼 계란물에 소시지와 햄을 구워봐야겠어요.
제가 있으면 편하게 못 울까봐 실컷 울고 진정하라고 거실에 나와있거든요. 아까까지 몸살 기운에 콧물까지 훌쩍였는데 내내 목에 어머님이 사주신 스카프를 두르고 있어서인지 한결 좋아졌어요. 자고 일어나면 말끔해질 것 같아요. 어머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