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허리아파흑
한 번 날리고 다시 씁니다....ㅠ
때는 청나라....가 되기 전! 명나라 말기
만주족의 한 부족 추장이었던 누르하치.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만주족이었지만 명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군대와 연합해 타 부족을 점령하던 도중 명나라 군사한테 오인 사살 당해벌임....
물론 명나라 장수는 사과의 의미로 토지를 하사했지만 누르하치는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음. 24살의 젊은 추장 누르하치는 만주 땅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다 후금을 세움.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나라의 시선이 조선에 쏠렸기 때문에 누르하치는 명 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빠르게 세력을 키울 수 있었음. 하지만 아무리 명나라가 쇠퇴했다고 해도 이제 막 세워진 후금이 몇백년 이어진 명 왕조를 한 방에 꺾긴 무리였고, 누르하치는 중원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함
로맨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만주족의 결혼 관습을 잠깐 짚고 가자면 만주족은 전통적으로 일부다처제임. 조선이나 명나라와 다름. 조선 왕들도 후궁 들였잖아? 라고 할 수 있음.
조선 왕의 정실은 중전은 무조건 한 명이었잖아? 중전이 죽거나 폐위 당해야만 새로운 중전이 생겼고. 만주족은 정실 아내가 여러명인 것임.
정처(아내들 중 가장 서열 높은 아내) / 평처(정실 아내들 중 정처를 제외한 나머지 아내들) / 첩 (말 그대로 첩ㅇㅇ 정실이 아닌 첩ㅇㅇ) 이렇게 구성됨. 나중에 청나라 제국이 되고 북경을 빼앗으면서부터는 한족식 일부일처제를 도입하지만 오랜 기간 만주족 사회에 뿌리내린 관습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임.
대게 황족이나 고위 귀족의 평처라 하면 그 역시 귀족의 딸이었음. 나는 정실 부인으로 혼인했는데 황제가 갑자기 법을 바꿔서 일부일처제가 되는 바람에 내가 첩이고, 내 자식들도 서자래. 세상 누가 순순히 인정함ㅋㅋ
후궁 제도가 정식으로 자리 잡는 건 4대 황제인 강희제 때고, 홍타이지 치세 때는 정처를 대복진, 평처를 측복진, 첩은 소복진이고 불러 구별함.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만주 땅을 통일하며 세력을 넓혀가던 누르하치는 몽골 부족의 지지를 얻을 필요성을 느꼈고, 동맹의 일환으로 코르친 부족의 추장인 채상 노얀의 여동생 철철과 자기 아들 홍타이지를 혼인시켰음. 철철은 홍타이지의 대복진이 되지만 홍타이지는 철철을 사랑하지 않았음.
11년이 지나도 철철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채상은 여동생 철철과 의논 끝에 자기 딸인 붐부타이를 홍타이지의 측복진으로 보냄. 하지만 이때 홍타이지는 33살이었고 붐부타이는 고작 13살이었음;;; 홍타이지는 너무 어린 붐부타이에게 어떤 애정도 느끼지 못했고, 다른 측복진인 울아나라 씨한테서 장남 호우거를 봄.
이렇게 철철과 붐부타이 둘 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던 중 1626년,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홍타이지가 빠르게 여러 부족의 추장들의 지지를 받아 차기 칸이 됨. 채상 노얀이 사망한 후 코르친 부족은 채상의 아들이자 붐부타이의 오빠인 오극선이 이끌게 됨.
누르하치를 가장 많이 도와준 건 우리 코르친 부족인데 이러다 다른 부족 여자가 낳은 아들이 홍타이지의 후계가 되게 생김. 불안해진 철철과 오극선은 붐부타이를 포기하기로 하고, 붐부타이의 언니인 해란주를 또 새로운 측복진으로 들임. 해란주는 이미 한 번 혼인한 상태였음.
홍타이지는 해란주에게 반함. 아름다움을 총애하는 수준이 아니라 평범한 남녀 간의 연정처럼 애틋한 사랑으로 발전했다나 뭐라나. 해란주가 아직 아이가 없는데도 측복진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계복진으로 높여주고 몹시 사랑함.
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고치고 황제가 됨. 명나라 후비제도를 차용해 대복진인 철철을 황후로 삼고, 해란주는 관저궁의 신비로 삼음. 宸 < 이 한자는 원래 황제만 쓸 수 있는 한자인데 해란주의 봉호에 쓸 정도였으니 그냥 해란주한테 푹 빠져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는 거였음.
10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해란주에 대한 홍타이지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고, 해란주가 머무는 관저궁의 현판을 직접 쓸 정도였음. 또한 해란주가 머무는 관저궁은 동궁이었는데, 붐부타이가 머무는 영복궁이 있는 서궁보다 서열이 높았음. 먼저 측복진이 된 게 붐부타이인데도 엄청나게 총애한 거임.
해란주와 붐부타이의 고모인 철철의 원래 목적은 코르친 부족의 핏줄을 타고 난 후계를 만드는 거였지, 이렇게 세기의 사랑을 하길 바란 건 아니었음. 해란주에 대한 홍타이지의 사랑이 너무 개쩔어버리자 철철은 저새끼 이러다 나 내쫓고 해란주를 황후 삼는 거 아닐까 두려워짐.
마침 해란주가 임신했고, 철철는 조카 붐부타이와 연합해 "해란주가 회임하여 황상의 시중을 들 수 없으니 붐부타이가 시중을 들게 하라"고 청함. 이리 하여 붐부타이는 홍타이지의 아이를 가질 수 있었지만 홍타이지의 마음은 여전히 해란주를 향해 있었음
1637년, 해란주는 홍타이지의 아들을 낳음. 코르친 부족 출신 복진들 중 처음으로 홍타이지의 아들을 낳은 거기도 함.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말해뭐함 존나 기쁨. 홍타이지에게는 해란주를 만나기 이전에 낳은 아들이 여럿 있었음. 그 중 장남인 호오거는 어머니 울아나라 씨가 누르하치에게 쫓겨나 서자 처지이긴 했지만 여러 전쟁에 종군하는 등 자기 능력을 꽤 잘 보이고 있었음.
조선이나 명나라는 보통 적장자에게 상속하잖아? 적장자가 없으면 서장자에게 상속하고. 하지만 만주족은 그런 거 없고 가장 능력이 뛰어난 아들에게 상속함. 앞서 말했듯 황후 외에도 여러 측복진을 두다 보니 비빈 소생의 여러 황자들을 전부 교육하며 지켜보다 가장 자질이 훌륭한 황자를 후계로 지명하곤 했음.
하지만 홍타이지는 그런 거 없음.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처음으로 태어난 아들이니 진정한 황제의 장자다." 라며 아직 옹알이도 못하는 아이를 곧장 황태자로 책봉하고, 전국에 대사면을 선포함.
심지어 이 아이의 이름은 다른 아들들처럼 가볍게 지을 수 없다며(.....) 저명한 유학자들을 모아놓고 황태자를 위한 이름을 지으라고 명함. 다른 아들들 이름은 대충 지은 거냐고ㅠ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이 아이는 1년도 되기 전에 요절하며 청나라 최초의 황태자이자 이름 없는 황태자로 남음. 6개월 경에 죽었는데 여태 이름이 없었음. 얼마나 정성을 들였으면....
아이가 죽고 이틀 후 붐부타이가 홍타이지의 아들을 낳지만 슬픔에 빠진 홍타이지는 이름을 대충 푸린이라고 지어주곤 평생 관심을 안 가짐. 참고로 푸린은 영복궁에서 태어난 애 정도의 뜻임(....)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해란주는 1641년, 갑작스럽게 병사함. 이 때 홍타이지는 송산 전투라고 해서 명나라와 아주 중요한 전쟁 중이었는데 해란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를 버리고(....) 5일 동안 밤을 새워 말을 달려 궁으로 귀환하지만 이미 해란주는 죽은 후였음.
해란주의 시신을 품에 안은 홍타이지는 목 놓아 대성통곡하다 기절해서 5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함. 당시 대신들 피셜 황제가 울다가 죽은 줄 알았다고(......)
이후 홍타이지는 거의 병적으로 슬픔에 빠져 해란주의 장례를 국상으로 지내고, 국상 시간에 애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족들도 처벌함. 해란주가 죽은 후 홍타이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돼서 계속 침울해하며 "짐은 평생 백성들과 세상을 돌보며 살아왔는데, 한 여인은 돌보지 못하였다." 고 탄식만 함.
1643년, 해란주가 죽고 2년 만에 홍타이지는 아버지 누르하치 때부터 염원했덤 중원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급사함. 송산 전투 때부터 건강이 계속 안 좋다가 뇌출혈로 죽었다고 함.
홍타이지는 해란주가 낳은 아들이 죽은 후 후계를 지목하지 않은 상태였고, 당연히 청 황실은 혼란에 빠짐. 이 때 가장 유력한 후보가 누르하치의 14째 아들이자 홍타이지의 이복 동생인 도르곤이었음.
이름이 어딘가 익숙할 거임. 병자호란 때 별동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공격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조선 왕족들을 사로잡은 사람임. 이 외에도 명나라와 전투에 여러번 종군하며 공을 세워 홍타이지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 중 하나였음.
여담으로 아바하이는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칸이 되기 위해 실권을 잡는 과정에서 순장 시켜버림(........)
청나라에는 팔기군 이라는 제도가 있음. 누르하치가 휘하 군사들을 깃발 색에 따라 8개로 분류한데서 시작한 건데, 나중에는 청나라의 핵심 군사/정치 조직으로 발전함. 청나라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정치적 제도임.
이 중 황제 직속인 정황기, 양황기, 정람기를 상삼기라고 부르고 제후 관할인 정백기, 양백기, 정홍기, 양홍기, 양람기를 하오기라고 부름. 기에 소속된 사람은 기인, 기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기주라고 부름.
도르곤은 정백기의 기주였고, 동복 동생 도도가 기주로 있는 양람기의 지지도 받음. 위에서 언급했던 홍타이지의 장남 호오거는 황제의 장남으로 정람기를 이끌고 있었고, 홍타이지의 직속이었던 정황기와 양황기의 지지도 받아 도르곤과 대립함.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이자 홍타이지의 형인 다이샨은 정홍기의 기주이자 당시 청 황실 최고 어른이었는데, 홍타이지가 급사하자 의정왕대신회의를 열어 후계를 의논함.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하치의 아들, 즉 홍타이지의 사촌인 정친왕 지르갈랑이 양람기의 기주로서 다이샨과 함께 중립을 자처하며 도르곤과 호오거를 중재하는 역할을 함.
근데 이 때 다이샨의 아들인 쇼토가 몰래 도르곤을 추대하려다가 발각 당하는 사건이 벌어짐. 엥 왜 자기 아버지인 다이샨도 아니고 도르곤을? 이라고 묻는다면....
누르하치가 살아있던 시절 쇼토가 명나라로 튈려다 걸려서 다이샨한테 뒤질 뻔한 적이 있음. 이때 쇼토가 할아버지 누르하치를 찾아가 저와 형 요토는 조강지처의 아들인데 아버지 다이샨은 새엄마에게 정신이 팔려 우리를 홀대한다며 서럽게 울었고, 빡친 누르하치가 다이샨을 불러 집안 꼴 잘 돌아간다고 꾸짖고 쇼토를 풀어줌.
이후 요토와 쇼토 형제는 할아버지 누르하치에게 거둬졌음. 도르곤과 도도는 누르하치의 마지막 대복진인 아바하이 소생의 늦둥이들로 항렬은 삼촌이지만 토토 형제보다 어렸음. 토토 형제와 도도 형제는 함께 어울리며 자라게 됨. 요토는 양홍기의 기주였는데, 홍타이지 사후 제위 분쟁 당시 사망한 상태였음. 형을 대신해 양홍기의 임시 기주 노릇을 하던 쇼토가 오랜 친분 있는 도르곤을 지지한 거임.
잘못하다간 도르곤도 죽을 처지였음. 도르곤은 곧장 쇼토를 처형해 꼬리를 자르고 자기는 황위에 욕심이 없다고 공표함. 하지만 정적인 호오거를 순순히 황제로 모실 수도 없었음.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아들들 중 후계를 고르되 모친의 혈통이 고귀한 황자들 중에서 고르고 자기랑 정친왕 지르길링이 섭정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주장함. 위에 말했듯 호오거의 어머니는 누르하치에게 쫓겨났고, 홍타이지의 정실 부인들은 전부 몽골 코르친 부족 출신이었음.
이렇게 해서 홍타이지와 붐부타이의 아들인 푸린이 황제가 됨. 해란주의 아들이 죽고 태어나 이름도 대충 받고 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던 푸린이 황제가 된 걸 보면 정말 사람 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임.
황제가 될 때, 푸린은 고작 6살이었음. 당연히 도르곤이 섭정함. 도르곤이 병권을, 정친왕이 정권을 잡고 함께 섭정하는 거지만 정친왕은 허수아비였고, 얼마 안 가 조정 의결권을 도르곤에게 넘기며 도르곤은 이름만 섭정왕인 황제가 됨.
도르곤은 정적인 호오거를 옥에 가두고 호오거의 세력인 정람기를 하오기로 격하시키고 자기 세력인 정백기를 상삼기로 격상함. 거기에 황제 직속인 정황기와 양황기에 자기 부하를 대거 포함시켜 사실상 상삼기를 전부 이끌게 됨. 황제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옥새를 도르곤이 보관했다고 하니 사실상 도르곤의 시대였음.
중원은 아직 명나라의 차지였음.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자금성을 공격하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자금성 후원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함. 도르곤은 군대를 이끌고 자금성을 공격해 마침내 3대에 걸친 중원 통일의 숙원을 이루게 됨.
이후 도르곤은 섭정왕에서 황숙부섭정왕이 되고, 정친왕 지르갈랑을 내쫓고 그 자리에 자기 친동생 도도를 앉힘. 이어 자기 어머니인 아바하이를 황후로 추존해 자기 정통성을 강화함. (아바하이는 누르하치의 정실 부인이긴 했지만 누르하치가 후금의 칸으로 죽었기 때문에 황후가 아니었음ㅇㅇ)
이쯤 되면 도르곤이 조선의 세조처럼 어린 푸린을 내쫓고 스스로 황제가 돼도 이상하지 않음. 황제가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러 썰이 있는데 일단 도르곤이 강력한 섭장왕이긴 하나 8기군을 한 명이 전부 장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푸린의 어머니인 붐부타이의 친정인 몽골 세력의 눈치도 보임. 만주8기군의 지위가 가장 높긴 했지만 청나라 내 몽골 8기군의 지위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음.
게다가 도르곤은 아들이 없었음. 그렇게 손에 피 묻히며 황제가 돼봤자 자기 지위를 물려줄 후계가 없는데 굳이 황제가 될 이유는 없긴 함ㅇㅇ.....
여담으로 병자호란은 홍타이지 치세 때 일어난 일인데, 도르곤은 의외로 조선에 우호적이었음.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적대하는 거랑 별개로 조선에는 큰 악감정이 없고 생전에 조선을 침공하지도 않았음. 물론 도르곤이 별동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긴 했지만 그건 황제인 형 홍타이지의 명령에 따른 행동이었음.
그 예로 홍타이지가 죽고 효종이 강력한 반청 행보를 보일 때, 도르곤은 조선 왕가 종실인 의순공주와 결혼해 그녀를 자기 아내들 중 가장 높은 서열인 대복진으로 삼음. 물론 만주족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명나라에 충성했던 조선인들은 치욕스럽게 생각했지만 만주족은 유목 민족 특성상 결혼 동맹이 흔했음. 홍타이지만 봐도 몽골 여자와 혼인해 동맹했으니 ㅇㅇ....도르곤이 의순공주를 자기 대복진으로 삼고 볼모 시절의 소현세자에게도 정중하게 잘해줬단 걸 감안하면 자기 딴에 저 결혼이 온건한 방식의 외교 해결이었을 거임. 홍타이지 성질머리였으면 효종이 반청 노선 밟자마자 호란 한 번 더 갔음ㅋㅋㅋ..........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도르곤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바로 죽음이었음.
1650년 12월, 39살의 도르곤은 열하로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부상을 당한 후 급사함. 이때 허수아비 황제 푸린의 나이 13세였음. 비록 도르곤이 죽었지만 푸린은 여전히 실권 없는 어린 황제였고, 도르곤을 지지하던 신료들의 극성에 못 이겨 도르곤를 황제로 추존하고 국상으로 장사 지냄.
하지만 1651년 도르곤의 장례가 끝난지 한달이 좀 지날 무렵 도르곤이 장악했던 정백기와 양백기의 장군들이 도르곤의 형 아지거를 새로운 섭정왕으로 세우고 조정 권력을 장악하려다 들통남. 도르곤에게 축축 당했던 정친왕 지르길링을 필두로 한 반 도르곤 세력이 곧장 뭉치기 시작하고, 양백기와 정백기의 장군들은 모조리 처형당한 후 14살의 푸린이 친정하게 됨.
푸린이 얼마나 도르곤을 싫어했냐면 권력을 잡자마자 황제 추존과 도르곤의 모친 아바하이의 황후 추존을 취소하고 도르곤을 황실 호적에서 파버림(....)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덤을 파내 시신을 몽둥이로 수십번 때리고 머리를 잘라 각지에 돌려 효수하는 등 부관참시를 해버림.
만주족은 조선과 달리 여성의 재혼이 자유롭고, 형사취수제 같은 풍습도 빈번하게 일어났음. 푸린의 모친인 붐부타이가 홍타이지 사후 도르곤과 결혼했으며(....) 도르곤이 황제가 되지 않은 이유도 붐부타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녀의 아들인 푸린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고, 푸린이 도르곤을 극도로 증오한 이유도 이 재혼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긴 함...
참고로 붐부타이는 아들 푸린이 황제가 됨에 따라 황태후가 됐고, 손자인 강희제 치세까지 오래 살아 청나라 황실의 태황태후로 존경 받았기 때문에 홍타이지와 합장될 수 있었음. 근데 붐부타이가 죽을 때 홍타이지와 함께 묻히고 싶지 않다고 유언을 남겨 따로 묻힘. 거기에 도르곤이 황궁 내원을 드나들었다는 기록 때문에 저게 정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함.
다만 붐부타이의 유언은 평생 언니 해란주만 사랑하고 자기를 외면한 홍타이지의 곁에 묻히기 싫어서라던가, 합장을 위해 홍타이지의 무덤을 건드리는 걸 피하고 싶어서라고 해석하면 그만이라......학자들은 그냥 야사로 생각함. 물론 드라마 소재로는 아주 재밌기 때문에 도르곤과 붐부타이의 로맨스를 다룬 중드가 여러 편 나오긴 함. 사랑하던 두 사람이 홍타이지 때문에 갈라졌다가 홍타이지가 죽고 도르곤이 권력을 잡으며 도로 불타오르는 식으로.
만약 중드에 정백기의 상징인 흰색 갑옷을 입고 간지폭풍 로맨티스트로 묘사되는 남캐가 있다면 99퍼 확률로 도르곤임......
여담으로 의순공주는 결혼 1년도 안 돼서 도르곤이 죽으면서 과부가 됐는데, 여자의 재혼이 자유로웠던 청나라 관습에 따라 다른 황족과 결혼하나 그가 1년 만에 죽고 또 과부가 됨. 이후 의순공주의 친부인 금림군이 딸을 그리워하다 순치제에게 딸을 조선 땅에 데려가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해 청 황실은 의순공주를 조선으로 돌려보냄.
당시 조선 왕실에서는 금림군의 독단적인 행동을 두고 처벌하니 마니 시끄러웠지만 청 황실에게 의순공주는 듣보잡이었음. 도르곤의 존재를 지우고 있긴 했지만 의순공주는 고작 7개월간 도르곤의 대복진이었고, 자식도 없었음. 청나라 문서에 "부모형제와 떨어져 과부로 혼자 사는 게 안쓰러우니 돌려보냄ㅇㅇ...." 적혀있으니 정말 관심이 없었나봄.
반대로 조선은 과부의 재혼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과부가 남편 따라 자결하면 열녀문 세워주던 시대라 두 번이나 결혼한 의순공주를 화냥년 취급했고 금림군이 의순공주를 조선 땅으로 데려올 때 사람들이 길에 나가 침을 뱉고 욕했다고 함ㅠㅠ.......얼마나 힘들었으면 조선으로 돌아온 후 용한 무당을 찾아가 구왕의 귀신이라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야사가 있음. 자기를 질타하는 고향 사람들보단 오랑캐에 한참 나이 많은 남자지만 적어도 자기를 대복진으로 대우해준 도르곤이 나았나 봄. 힘 없는 와중에 보수적이기까지 한 나라에서 여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주는 대목.
그래도 효종이 의순공주를 동정해서 쌀을 챙겨주며 돌봤줬고, 조선으로 돌아온지 1년만에 28살의 젊은 나이로 죽자 장례 물품도 손수 챙겨줌. 사실 효종의 딸을 도르곤의 아내로 보냈어야 하는데 혼인 적령기인 딸이 없다고 거짓말 치고 종친의 딸인 의순공주를 양녀 삼아 청나라에 보낸 거였음(....) 실제로는 혼인 적령기인 딸이 있었음. 자기 딸 인생 지키려고 남의 딸 인생 망치고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살게 한 죄책감 때문에 챙겨준 거에 가까울 듯.
여튼 도르곤은 죽었고, 푸린은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됨. 황제한테 젤 중요한 게 뭐임? 후계자죠ㅇㅇ 붐부타이의 오빠이자 몽골 코르친 부족의 수장인 오극선 기억함? 그 오극선의 딸이 푸린의 첫 황후였음. 시어머니인 붐부타이의 조카이니 푸린과 사촌 관계지만 저 시대에 근친 따져 뭐하겠음 우리만 머리 아프지...
여튼 푸린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코르친 씨족의 여자를 황후로 맞이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치와 질투를 이유로 내쫓아버림. 하지만 붐부타이는 포기하지 않고 조카 작이제의 딸, 즉 자기 조카 손녀를 푸린의 새로운 황후로 들임. 작이제는 오극선의 아들이자 폐위 당한 첫번째 황후의 오빠이기 때문에 두번째 황후도 마찬가지로 코르친 가문의 적통인 것ㅇㅇ
푸린은 어머니 붐부타이와 사이가 아주 나빴음. 6살에 황제가 되어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며 도르곤의 그림자 속에서 숨 죽여 살았는데 기억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정이 있는 게 더 이상하긴 함ㅇㅇ...푸린은 어머니가 들인 몽골 출신 황후를 극도로 싫어했고, 의무적인 합방조차 거부함.
그럼 푸린은 누구를 사랑했느냐
현비 동악씨였음.
1656년, 푸린과 현비는 처음 만남. 둘은 곧장 사랑에 빠짐. 푸린이 19살, 현비가 18살이었음. 당시 청나라에 머물던 독일 선교사 아담 샬의 증언에 따르면 푸린이 현비에게 아주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었다고 함.
여담으로 청나라 때 황족의 복진이 되려면 무조건 수녀 선발을 거쳐야 했는데, 선발 나이는 13세에서 17세였음. 근데 현비가 처음 푸린을 만난 건 18살이잖아? 그래서 사실 푸린의 이복동생인 양소친왕의 복진이 됐는데 푸린과 사랑에 빠져 푸린의 비가 된 게 아니냐는 썰이 있음. 현비가 아주 예의 바르고 착한 며느리인데도 시어머니 붐부타이가 현비를 극도로 싫어한 것도 이런 비정상적인 루트로 후궁이 됐기 때문이 아니냔거.
물론 이것도 야사라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름. 붐부타이가 현비를 싫어한 건 현비가 혼자 푸린의 사랑을 독차지하니 후궁의 세력 균형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해서 싫어한 걸 수도 있고.....도르곤과 붐부타이의 로맨스와 마찬가지로 현대에선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 근데 현비가 18살에 입궁한 건 부정 못할 팩트라 현비가 재혼이었다는 건 사실상 정설임ㅋㅋ
어쨌든 푸린은 현비를 아주 사랑했고, 1656년 8월에 현비로 책봉한 후 그 해 12월 바로 황귀비 지위를 내림. 황귀비는 후궁들 중 가장 높은 자리로 딱 한 명만 둘 수 있었음. 대개 후궁에서 수십 년 살며 후궁을 잘 관리한 식의 공로가 있거나 후계자의 어머니에게 주는 지위인데 고작 18살에 자식도 없는 현비를 황귀비 삼았으니 푸린의 사랑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임.
사실 푸린은 현비를 황후 삼기 위해 있는 황후를 폐위하려고 했지만 친정인 코르친 부족 출신의 여자를 황후로 두고 싶었던 어머니 붐부타이가 기를 쓰고 반대해서 실패했고, 그 탓인지 더욱더 어머니와 사이가 나빠짐.
이듬해인 1657년, 현비는 푸린의 아들 영친왕을 낳음. 푸린은 크게 기뻐하며 영친왕을 곧장 황태자로 책봉하려고 함. 하는 짓이 아주 그냥 지 애비 판박이임.
하지만 해란주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비의 아들은 3개월만에 요절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현비는 시름시름 앓다 1660년 자금성에 천연두에 돌자 22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함. 뭔가 존나 데자뷰임.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푸린은 슬픔에 빠져 정치에서 손을 떼고,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비를 황후로 추존함. 당연히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대신들이 기겁하고 말렸는데 배째라는 식으로 밀어 붙였고 현비의 뒤를 따르고 싶다고 우울해했다고 함. 이렇게 현비의 신주를 태묘에 올린 푸린은 가장 신임하는 태감을 오대산의 청량사라는 절에 보내 현비의 명복을 빌게 하고, 수천 자에 이르는 동비행장을 직접 써서 현비를 추모함.
중원 통일의 업적이 도르곤의 공로라 순치제가 평가절하 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푸린도 꽤 수완 좋은 군주였음. 도르곤이 변발을 강요하며 한족과 마찰이 심했는데, 이런 반발을 잠재우고 팔기제도 정비한데다 명나라 잔존 세력인 남명을 공격해 중원 지배를 견고하게 하는 등 어지간한 명군이랑 비빌 만한 업적을 10대에 이룬 황제임. 거기에 푸린이 아담 샬을 가까이 두며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황금기의 기반을 닦았다고 볼 수 있음.
하지만 현비를 잃고 정치에 뜻을 놓아버린 푸린은 그대로 삶의 의지까지 놓아버림. 현비가 죽고 두 달 만인 1661년 1월, 푸린은 빠르게 병에 굴복하여 24살의 나이로 현비의 뒤를 따라감.
푸린이 후계는 다른 후궁의 아들이자 죽은 영친왕의 이복 형인 현엽이었음. 아주 총명한 아이였고, 현비가 천연두로 죽던 시기 마찬가지로 천연두를 앓았는데 얘는 회복했기 때문에 (한 번 걸리면 다시 천연두에 걸리지 않으니) 오래오래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나 뭐라나.
근데 영친왕보다 형이라고 해봤자 1654년 생이라 푸린이 죽은 1661년 당시 현엽은 고작 8살이었음. 치세 초기에는 보정대신들이 섭정하다 현엽이 16살이 되고부터 친정함. 현엽은 무려 61년간 청나라를 다스리며 중국 역사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업적을 남기니 이 사람이 강희제 되겠음.
여담으로 순치제가 천연두로 죽은 게 아니라 현비를 잃은 슬픔 때문에 죽었다고 위장하고 속세를 떠나 절에 은거했다는 야사도 있음. 청량사의 주지를 본딴 불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죽었다는 순치제와 아주 닮았고, 강희제가 즉위 후 청량사에 여러번 방문했는데 왜인지 주지는 한 번도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고, 1670년에 주지가 35세로 죽자 황제가 실물 크기의 금상을 청량사에 하사하고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을 금은보화를 보냈기 때문,,,,,
홍타이지&해란주 / 도르곤&붐부타이 / 순치제&현비 로맨스가 청 초기를 다룬 중드 중에 꽤 인기 있는 로맨스 소재라 몇 작품에서는 진짜 현비 죽고 실의에 빠져 세상 등지고 출가한 거로 나옴.
하 존나 힘들다
- 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