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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독립운동가 김명시는 왜 장군에서 여자로 강등되었나

작성자머고1253|작성시간24.01.21|조회수2,705 목록 댓글 7

출처 : <김명시-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을 통해 본 김명시의 생애

 

 

역사가 지운 혁명가 중에 또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김명시 장군이다.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로는 유일하게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로 상당히 거물급 인사였다. 그런 그에 대한 기록은 '백마 탄 여장군'에서 '무직 여자'로 극과 극을 오갔다. 그는 왜 '장군'에서 '여자'로 강등되었을까? 그 까닭은 김명시 장군의 이름이 역사에서 소거된 정황과 맥을 같이 한다.

김명시 가족은 마산의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생선 행상를 하던 어머니 김인석은 3.1운동 때 독립을 외치다 희생되었고, 그의 오빠 김형선과 동생 김형윤도 독립운동을 하다 스러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12세였던 김명시는 9살, 4살 두 동생을 돌보느라 학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지만, 야학으로 공부해 마산공립보통학교 5학년으로 편입했다. 이후 배화고녀를 다니다 중단한 후 1925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떠났다. 주세죽, 허정숙, 김조이 등의 혁명가들이 수학한 그곳이다.

탁월한 조직가

▲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벌인 김명시(1907~1949), 김형윤(1910~?) 남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수학 후 그는 일신의 편안함을 버리고 1927년 상해로 떠난다. 장개석의 쿠데타로 공산주의자들이 시체가 즐비한 그곳에서 그는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하고, 만주 전역을 돌며 중공 한인 특별지부를 결성하는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한다. 23살이었다. 피 끓는 김명시는 1930년 5.31 하얼빈 일본 영사관 습격 사건에 참전해 큰 성과를 올리며 무장투쟁가로 이름을 알린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김명시는 <코뮤니스트> 4호 원문과 격문을 국내 반입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국내에 잠입한다. 임무 완수 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조직하려던 김명시는 그만 몇 개월도 안 되어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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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일제에 체포된 김명시가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는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옥중에서 청춘을 보내고 7년 후인 1939년 서른두 살에 출소한다. 감옥을 나왔어도 일제의 <보호관찰령>이 삼엄해 운신을 할 수 없자 그는 조선을 탈출해 중국 팔로군에 종군한다. 항일투쟁은 무장투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믿고 1942년 팔로군 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의 후신인 조선의용군 창군에 기여한다. 조선의용군은 무정(김병희)을 사령관으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유일한 군대로 김명시의 활약이 대단했다.

 

 

(중략)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겐 일제보다 더 가혹한 탄압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살육을 피해 월북했지만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숙청됐다. 살벌한 사건들 통에 김명시가 잠적했다. 1947년 8월부터 1949년 10월 10일 그의 죽음이 발표되기까지 2년 3개월의 시간이었다.

 


의문의 죽음

1949년 10월 13일 내무부 장관 김효석이 김명시 사망에 관해 기자회견 장에서 밝힌 내용은 이렇다.
 

본적을 경남 마산시 만동 189번지에 두고 현주소 서울시 종로구 유상동 16번지에 사는 무직 김명시(42)라는 여자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지난 9월 29일 서울시 경찰국에서 부평경찰서에 유치 의뢰한 것으로 지난 10일 오전 5시 40분경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에 있는 약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은 것이다.

 
'백마 탄 장군'으로 추앙받던 독립운동가가 '무직의 여자'로 불리며 의문사를 당했지만, 이후 이어진 언론 보도와 수사 발표는 의혹투성이였다. 군 수사기관인 특무대에 체포된 경위, 서울경찰청에 조사받다 왜 부평경찰서로 옮겨졌는지, 불과 어린아이 키에 불과한 삼척 높이 수도관에 목을 매 자살한다는 게 가능한지, 누가 시신을 수습하고 인수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등 무엇도 밝혀지지 않았다. 10대부터 42살까지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직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삶이 이토록 참혹하다니...

 

 

중략

 

 

마산 시민단체 희망연대는 철저히 망각된 독립운동가 김명시를 복원하기 위해 2019년 1월 국가보훈처에 독립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순조롭지 않았다. 사망 경위 등 해방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2번 탈락했다, 

 

▲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독립운동가였던 김명시 장군의 후손을 찾는 광고를 신문에 냈다.

 

한편 아쉬운 점도 있다. 김명시 장군 역사 복원의 주역이었던 <희망연대>의 김영만 상임고문은 김명시를 "명시 누나"로 불렀다. 김명시는 1907년 생이고 김영만은 1945년 생이다. 동향의 웃어른에게 친숙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40여 년의 차이가 무색하게 '누나'라는 가족적 호칭으로 부르는 게 적절할까. 유관순 독립운동가를 아직도 유관순 '누나'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일 텐데, 어떤 남성 독립운동가도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중략)

 

 

김명시 장군님! 고맙고 미안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습니다.

 

 

 

 

전문은 출처로.


아래글도 함께 봐주길 ㅠ 2022년도 사건

 

'김명시 장군' 이라는 장군칭호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있던 거 알아? 어떤 미친놈이 이 장국 벽화 훼손하고 감

https://m.cafe.daum.net/subdued20club/ReHf/4092938?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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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골호나 | 작성시간 24.01.21 유관순 열사님, 김명시 장군님!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김숙현숙팽현숙퀸카 | 작성시간 24.01.21 기억하겠습니다!
  • 작성자이미알아 | 작성시간 24.01.21 감사합니다. 덕분에 온전한 나라에서 살고있습니다.
  • 작성자마싯겟다 | 작성시간 24.01.22 기억하겠습니다!!!
  • 작성자이삼사십일 | 작성시간 24.02.18 유관순 누나.. 진짜 얼마나 격하시켜 부르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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