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흥미돋
남초 쌔빔
장수들끼리의 일대일 대결을 흔히 일기토라고 부른다.
한국사에도 상당히 많은 일기토 사례가 있는데
그중 인상적인 것을 7개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삼영전여포, 관우안량참 두 유형 다 일기토라고 간주했다.)
1. 괴유 vs 대소왕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다,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다.
扶餘王舉國出戰, 欲掩其不備, 䇿馬以前, 䧟濘不能進退.
왕이 이에 괴유(怪由)에게 지시하여,
괴유가 칼을 빼서 울부짖으며 공격하니,
(부여의) 많은 군대가 뿔뿔이 흩어져 버티지 못하였다.
(괴유가) 곧바로 나아가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劒號吼擊之, 萬軍披靡不能攴. 直進執扶餘王斬頭.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2년 2월 -
선정 사유: 국왕을 참수함.
2. 부여창 vs 고려용사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다.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겠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
"少兒等言, '於吾野中, 客人有在.' 何得不迎禮也. 今欲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
부여창[餘昌]이 대답하였다.
“성(姓)은 (고구려 왕실과)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한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
백제 편에서 반대로 물으니, (고구려 측도)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百濟反問, 亦如前法而對答焉.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고는, 목을 베었다.
그 머리를 창끝으로 찔러 들고서,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遂乃立標而合戰. 於是, 百濟以鉾刺墮高麗勇士於馬, 斬首.
仍刺擧頭於鉾末, 還入示衆, 高麗軍將憤怒益甚.
-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14년(553) 10월 -
선정 사유: 왕자가 일기토함.
3. 김유신 vs 고려장군
김유신[庾信]이 이때 중당당주(中幢幢主)였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여 말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전투에 임하여 용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듣건대 ‘옷깃을 흔들면 갖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라고 하였으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庾信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冑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盖聞, ‘振領而裘正, 㮛校綱而網張.’吾其爲綱領乎.”
이에 말에 올라타 칼을 빼어 들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끌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승세를 타 분발하여 공격하니,
5,000여 명의 목을 베고 1,000명을 사로잡았다.
迺跨馬拔劒, 跳坃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乗勝奮撃,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 無敢抗, 皆出降.
-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상 -
선정 사유: 이걸 살아 옴.
4. 박신유 vs 반란승
적들 중에 용력과 사나움[勇悍]이 뛰어난 승려가 하나 있어,
그 무리와 더불어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가 저 미소년(美少年)을 사로잡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겠다.”라고 하고,
먼저 도끼[斤斗]를 들고 휘파람을 불며 달려왔다.
賊有一僧勇悍絶人, 與其衆約曰, “我能擒彼美少年, 肩擔以歸.” 先打斤斗吹脣踴躍而至.
함양(咸陽) 사람 박신유(朴臣蕤)가 뛰어나가 마주하여 싸우는데,
두 사람의 칼날이 서로 맞닿아[相交] 먼저 칠 수가 없었다.
(이에) 박신유[朴]가 (승려를) 발길로 차서 쓰러뜨리고, 이어서 그 목을 베어 버렸다.
적이 경악하자, 관군이 그 틈을 타 수십 리를 추격하여, 마침내 평정하였다.
咸陽人朴臣蕤出與相敵, 兩刃相交莫能先斫. 朴踢而躓之, 因斬其首.
賊驚愕, 官軍乗之, 追奔數十里, 遂平之.
- 『역옹패설』 전집(前集) 2 -
선정 사유: 싸움 묘사가 자세함.
5. 이성계 vs 몽골효장
태조가 단기(單騎)로 용기를 고취하여 돌진하며 적을 시험하니,
적의 효장(驍將) 3인이 나란히 (말을) 달려 앞으로 나왔다.
太祖單騎鼓勇, 突進試賊, 賊驍將三人, 並馳直前.
태조가 거짓으로 패배한 것처럼 도주하면서,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채찍질하여 재갈을 채쳐 달리는 모양을 하자,
세 장수가 앞다투어 추격하면서 가까이 왔다.
太祖陽北走, 引其轡, 策其馬, 爲駷馬狀, 三將爭追逼之.
태조가 갑자기 말을 되돌려 오른쪽으로 나가자,
세 장수가 미처 (말을) 잡아당길 수 없어 앞으로 나갔으므로,
태조가 뒤를 따라가며 활을 쏘니,
모두 활시위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다.
太祖忽跋馬右出, 三將未能控而前, 太祖從後射之, 皆應弦而倒.
- 『고려사』 세가, 공민왕 11년 7월 -
선정 사유: 3대 1로 싸워서 승리함.
6. 최영 vs 왜구궁수
최영[瑩]이 몸소 사졸들 앞에 서서 용맹하게 돌진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는 풀[披靡]과 같았다.
瑩身先士卒, 盡銳突進, 賊披靡.
적 하나가 숲속에 숨어 있다가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추자,
피가 낭자하게 흘렀는데, (최영이) 태연자약하게 적을 쏘니,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적이) 쓰러졌다.
그제야 (맞은) 화살을 뽑고, 싸움에 더욱 힘을 다하니,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켜 거의 다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有一賊隱林中, 射瑩中唇, 血淋漓, 神色自若, 射賊, 應弦而倒.
乃拔矢, 戰益力, 遂大敗之, 俘斬殆盡.
- 『고려사절요』 우왕 2년 7월 -
선정 사유: 활쏘기로 일기토함.
7. 신립 vs 여진추장
적호(賊胡)가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고 충교(衝橋)를 만들어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니,
첨사(僉使) 신상절(申尙節)이 밤낮으로 항전하였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성이 장차 함락될 지경이었다.
賊胡圍訓戎鎭, 作衝橋, 四面攻城, 僉使申尙節晝夜拒戰, 矢盡力竭, 城將陷.
그때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유원첨사(柔遠僉使) 이박(李璞)과 함께 황자파(黃柘坡)에서 사잇길로 달려와,
포위를 뚫고 들어가 한 개의 화살로 적의 추장을 쏘아 죽였다.
穩城府使申砬, 與柔遠僉使李璞, 從黃柘坡, 間道直馳, 突圍以入, 以一箭射殪賊酋.
호인들이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고,
서로 놀라며 말하기를 “온성(穩城)의 영공(令公)이다.”라고 하면서,
활을 휘두르며 물러갔다.
胡人識砬面者, 相驚曰, “穩城令公也.” 揮弓而退.
-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2월 1일 갑신 6번째기사 -
선정 사유: 조선시대 쿼터 적용.
척준경, 이의민, 진자화, 한희유, 정찬 등 다른 사례도 있지만
분량상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사 7대 일기토'에 대해 알아보았다.
(보면 알겠지만 짤은 대충 비슷한 상황이면 골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