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3276806008
벌써 40년이 지난 12.12 사태는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너무 잘만들어져서 더 가슴이 아리는 영화가 바로 ‘서울의 봄’이다.
그동안 수많은 드라마와 매체를 통해 12.12 당시 상황을 모니터 했지만 그 결과를 알면서도 이렇게 흥미롭게 보았던 영화는 없었던 듯 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전세가 움직일 때 마다 육본지휘부나 12.12 주동을 하던 무리들에 속한 사람들의 당황하고 긴장하는 모습이 특히 흥미로웠다.
전세가 요동칠 때 마다 부초 처럼 움직이는 인간군상을 잘 표현해 준 수작 '서울의 봄'
드라마는 12.12 사태 주동자들이 시종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반면 영화 '서울의 봄'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장실 조차도 못가게 막으면서 서로 간 나름 견제를 하던 12.12 사태 주동자들의 모습은 딴에는 진짜 혁명을 하는 모습처럼 보이게 하여 블랙 코메디 라는 생각을 갖게한다.
통화를 도청하는 보안사 문일평(허화평)
영화의 편집이나 구성도 매우 신선했다. 예를 들어 이태신(장태완) 수경사령관이 30사단장과 통화 장면에서 두 사람이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장면 중 통화를 도청하는 보안사 문일평(허화평)의 장면이 끼어드는 장면은 너무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포병을 동원해 경복궁을 폭파시키겠다는 이태신과 '포를 쏘려면 쏴라 나는 민간인의 통제를 풀어 그들을 인간방패 삼겠다'는 전두광의 모습을 뭐라 설명을 할 수 있을지...
특히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던 상황을 자막과 CG를 활용했고 마지막 포병을 동원해 경복궁을 폭파시키겠다는 이태신과
'포를 쏘려면 쏴라 나는 민간인의 통제를 풀어 그들을 인간방패 삼겠다'는 전두광의 모습을 뭐라 설명을 할 수 있을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에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연출들이 들어가서 매우 긴장감이 있었다.
벌써 40년이 지난 이야기 하니...
아무래도 12.12 사태가 이미 44년(일제 강점기 보다 더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이나 지났다는 사실과
당시 그 난리를 만들었던 인물들이 이 세상 사림들이 아니라는 사실도 뭐랄까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장태완 즉 이태신은 왜 그리 하나회를 미워했을까?
이미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악연으로 엮여진 하나회와 이태신 즉 장태완 사이의 악연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에대한 비하인드 이다.
1. 갑종 출신 장태완(영화 상 이태신)과 하나회의 악연의 시작
종 출신으로는 대령에 까지 진급한 이 후에 무려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차장을 거쳐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하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었다던 장태완(이태신)
1931년 경상북도 칠곡군(현 구미시)에 태어난 이태신 아니 이하 장태완은 대구상고 졸업 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하여 11기로 임관했다.
즉 그는 한국전쟁에서 총알받이 소위 중 한명으로 군인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그는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았고 또 쟁쟁한 육사출신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 중령 시절에는 맹호부대 1진으로 베트남에 파견이된다.
총알받이 갑종 츨신에서 수경사 사령관이 되는 장태완(이태신)
그리고 갑종 출신으로는 대령에 까지 진급한 이 후에 무려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차장을 거쳐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하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의 상당한 견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수경사 참모장으로 하나회 김상구 중령을 만나다.
수경사 참모장 시절 하나회 김상구 중령의 하극상을 경험하는 징태완
장태완이 제5군단 참모장(육군준장)으로 역임하던 중 1973년 윤필용 사건(윤필용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 후임을 논의했다는 사건)이 일어나서 황당하게 그 잘나가던 하나회가 추락을 하는 일이 발생을 한다.
(하지만 전두광 아니 전두환은 이 일을 계기로 하나회를 장악하고 자신이 조직의 수장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전두환(전두광)과 장태완(이태신)
장태완(영화 상 이태신)은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회 및 육사출신들에 대한 견제를 했을 당시 기회를 잡아서 '비육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핵심보직인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이 된다.
그렇게 수경사 참모장 시절이었던 1973년 6월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 진지 공사 현장을 둘러본다.
당시 방공포 대대장은 김상구 중령이었는데 김 중령은 정규 육사 15기였고 그는 특히 하나회 핵심이었다.
거기다가 하나회의 보스 전두환(전두광) 1공수여단장과 동서 사이로 구내 실세 중 실세였다.
3. 하나회 핵심 김상구가 장태완을 모독하다.
하나회 김상구 전역사건으로 전두광(전두환)과 이태신(전두광)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안그래도 갑종 출신으로 별을 달고 거기다가 수경사 참모장이 된 장태완을 아니꼽게 생각한 김상구 중령은 갑작스레 순시를 나온 장태완을 홀대했다.
그리고 장태완 역시 김상구 중령의 진지공사가 적당히 얼버무린 태만한 공사로 보였고 그 즉시 장 준장은 김 중령의 면전에 대고 인격모독성 훈시를 했다.
장태완 준장은 김상구 중령에게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라고 질책을 했는데 이에 하나회의 핵심인 김상구 중령도 장태완에게 대들어 버린다.
김상구 사건은 장태완과 하나회의 악연의 시작을 만든다.
당시 장태왼은 일개 중령이 감히 장군에게 대드는 것은 하나회라는 뒷배경 때문이라 생각을 했기에 더욱 분노을 했는데 그때 김중령이 해서는 안될말을 해 버린다.
‘내(김상구 중령)가 당신(장태완 당시 준장)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정규 육사를) 임관했소’ 라며 갑종 출신 장태완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 것 이었다.
이에 분노한 장태완은 수경 사령관 진종채에게 김상구의 하극상을 보고했지만 진종채는 영남 군맥이자 하나회 핵심인 김상구를 보호하자 장태완은 더욱 분노를 한다.
4. 하나회의 미움을 받은 장태완을 수경사령관에 임명하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하나회와 장태완의 갈등을 잘 알았던 정승화는 장태환을 수경사령관에 임명을 한다.
결국 장태완의 강력한 항의에 진종채 역시 김상구의 하극상이 너무 지나쳤기에 그를 영창에 넣었고 이후 김상구는 전역을 하게된다.
나름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당시 김상구를 구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가 되었고 이 후 하나회는 장태완을 증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 당하고 전두환(전두광)이 합수부장을 전횡을 일삼자 당시 게엄사령관 이었던 정승화는
하나회와 전두환(전두광)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오직 장태완 즉 이태신(정우성) 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장태완은 수경사를 장악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회와 척을 지었슴에도 불구하고 장태완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이 후 영화에서처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의해 1979년 11월 16일 군의 최고 핵심보직인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이 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5. 12.12 사태는 결국 일어나고, 그렇게 군을 떠나게 되는 장태완(이태신)
사실상 부대를 장악할 시간이 없었던 장태완
12.12 사건은 결과만 보면 '수경사령관인 장태완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의 핵심 수하 였던 장세동과 김진영은 이미 그를 배신하였고 하나회 보스였던 '보안사 전두환(전두광)'의 편이었다.
거기다가 수경사 내부 통화는 보안사에 의해 감청되고 있었고 사실상 수경사 내에서 전두환(전두광) 무리에게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비전투 부대인 포병단과 방공포병단 뿐이었다.
누구보다 가장 당황하고 이성을 잃었던 국방장관
그래서 장태완이 수경사령관으로서 가장 먼저 찾았던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장태완의 출동요청을 받았지만 이미 보안사에 체포된(?) 국방장관 노재현의 출동 명령이 덜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다.
육본은 그저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고
특히 12,12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부천IC까지 다다랐던 제9공수특전여단 조차도 전두환 측의 (말도안되는) 신사 협정 제안에 속은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의 회군 명령에 의해 주둔지로 원대복귀 한다.
그리고 이 후 윤성민 참모차장은 이 공(?) 때문인지 5공 정권에서 국방장관이 되었다고 한다.
장태환(이태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번번히 욱본에 의해 무력화 되고...
즉 수경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24일만에 12.12 사태를 맞이란 장태완에게 수경사를 완전히 장악할 여유는 당시 그에게는 없었고
특히 그가 정규 육사가 아니었기에 하나회 혹은 정규육사 츨신 장교들을 통솔할 능력(?)도 없었다.(사실 정승화의 무리한 인사의 희생자 였을수도...)
결국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고 장태완 본인은 이 후 보안사에서 엄청난 고초를 치우었지만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더욱 슬프다.
장태완의 부친은 아들이 불명예스럽게 군에서 축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술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이자 서울대 학생이던 장성호(당시 21세)가 행방불명됐다.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던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대문을 나선지 한달만에 칠곡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정말로 의문이 많은 죽음이었다.
아들의 묘비명은 장태완이 직접 썼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며 12.12 사태를 일으킨 신군부를 위협했던 장태완의 슬픈 이야기 이다.
당시 12.12 사태는 현재 대한민국에게 어떤 의미일끼?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