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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우리는 단군신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4.03.25|조회수1,883 목록 댓글 5

출처: https://www.fmkorea.com/6849236645

 

 

* 글이 너무 길면 맨 아래의 5줄 요약을 보십시오!

 

 

1. 단군신화를 바라보는 관점 

 

단군신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곰에서 사람으로 변신한 웅녀와 결혼을 하여 낳은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으로서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고조선 건국신화입니다.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에서부터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까지

오늘날 과학 지식에 비추어 보면 '거짓'인 것들이 있기 때문에

현대인의 많은 사람들은 단군신화를 단순한 전설로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단군신화 안에서도 무엇인가 '역사적인 사실'이 있을 것으로 보고

단군신화로부터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하려고 대단히 애를 씁니다.

즉,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오늘은 단군신화로부터 뽑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정설'인 부분과 저의 '사견'인 부분을 나누어서 말씀을 드릴테니

저의 '사견'인 부분은 가볍게만 보셔도 좋습니다!

 

 

2. 단군신화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단군신화가 가장 먼저 기록이 된 문헌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단군신화가 실려있습니다. 

그 내용은 워낙에 길어 글 하단에 실어놨으니 참고 바랍니다.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은 단군신화를 '단군전설'로 부르면서 허위로 취급을 했습니다.

환인의 다른 이름이라는 '제석'은 불교 용어이고,

환웅과 함께 내려왔다는 풍백, 운사, 우사는 도교 용어인데,

고조선 시대에는 불교와 도교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으니 

단군신화는 후대에 꾸며진 허위라는 것이지요.

심지어 일연이 창작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국내에서는 여러가지 연구가 이뤄졌구요.

현재는 단군신화가 고조선 당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첫째, 신화의 전승과정상 변형을 놓고 허위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신화는 구전으로 전승이 되다가 어느 순간 문자로 고정이 됩니다.

그런데 구전이 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변형'이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구전되는 과정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삽입이 되기 마련인데요.

불교 용어인 '제석'은 하늘의 왕이란 뜻으로 '환인'을 설명하는 아주 좋은 당대의 용어이고,

풍백, 운사, 우사도 농사와 관련된 신적 인물로 구전 과정에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좋은 용어란 것이지요.

즉, 단군신화에 후대의 용어가 삽입된 것은 전승 과정상의 변형에 불과할 뿐이지

단군신화 전체가 후대에 꾸며진 '거짓'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통설).

 

둘째, 단군신화의 내용 자체가 고조선 당대인들의 관념에 부합합니다.

단군신화는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혹은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만일 오늘날의 누군가가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라거나

"내가 곰에서 사람으로 변했는데"라고 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말이 먹혔으니 구전이 되었겠죠?

그런데 고려 시대에도 이런 말이 먹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사람들의 관념의 흐름을 추적을 해봅시다.

고조선의 앞뒤 시대를 살펴보면 명확해 지는데요.

먼저 고조선이 존재하기 이전 시대를 살펴보죠.

여러분들께서는 동아시아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토테미즘'이라고 하여 

'동물'을 숭배하는 사상이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고조선 이전에는 동물 그 자체를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단군신화에서는 건국세력에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고

이 건국을 돕는 세력이 '곰'에서 사람이 된 웅녀라고 합니다.

건국의 주도적인 세력이 '하늘'이지 '동물'이 아닌 걸 보면,

단군신화에서는 동물적 요소가 상당히 약화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물적 요소가 약화되는 경향은 후대로 갈 수록 명확해지는데요.

주몽신화, 혁거세 신화, 탈해신화, 수로왕 신화는 

모두 시조가 '알'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동물과의 관련성을 표시하고는 있지만,

그것보다는 건국시조가 겪은 고난의 극복, 하늘의 도움 같은 것으로

시조의 위대함을 드러내려 합니다.

즉, 동물적 요소가 단군신화보다 훨씬 더 약해진 것이지요.

 

심지어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면 

고구려 왕실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라고 할 뿐이지 딱히 동물과의 연관성은 안보이구요.

백제 왕실은 자신들이 '부여 왕실의 후손'이라고 할 뿐이지 딱히 동물과의 연관성은 안보이구요.

신라 왕실은 자신들이 '석가의 가계' 그 자체라고 할 뿐이지 딱히 동물과의 연관성은 안보입니다.

동물적 요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지요. 

좀 더 후대인 고려 왕실도 자신들이 '당나라 황제의 후손'이라고 할 뿐이지 딱히 동물과의 연관성을 안보입니다.

심지어 고려 시대에는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습니다.

김부식이 삼국시대의 문헌을 보고 '신이한 내용이 많다'고 비판한 것을 생각해 보시면 알 겁니다.

고려 시대에는 신이한 요소까지 상당히 사라진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이나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은

고려시대에도 등장하기 힘든 내용이고,

오히려 고조선 당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내용이니까

'단군신화'는 고조선 당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 통설입니다.

 

 

(참고로 학자분들은 '단군신화는 고조선 당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관념이므로 고조선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다'고만

말씀을 하실 뿐이지 구체적인 근거를 자세히 들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학자분들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제 나름대로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가 바로

단군신화와 그 이전, 이후의 관념들을 비교한 것이었습니다.

즉, 토테미즘, 삼국시대의 건국신화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왕실의 입장들을

단군신화와 비교하여 분석한 부분은 저의 '사견'임을 밝합니다.

학자분들이나 저나 근거와 결과가 같지만 저는 그 '근거'를 구체화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3. 단군신화는 누가 만들었을까?

 

단군신화가 고조선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단군신화는 누가 만든 것일까요?

분명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과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꾸며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분들이 크게 말을 안하고 계시더라구요. 

이하의 내용은 저의 '사건'임을 밝힙니다. 

 

단군신화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고조선의 백성들이 꾸며냈을까요?

우리를 다스리는 왕실의 시조가 이렇게 신비롭다는 걸 밝히려고 꾸며냈을까요?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단군 영정, 출처는 사진 속에 있어요)

 

 

고조선 왕실이 직접 만들어서 퍼뜨린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사견).

단군신화는 그 본질이 '고조선의 건국설화'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신비롭게 만들어진 것이란 걸 백성들에게 널리 퍼뜨려

백성들로부터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단군신화라는 말보다 '고조선 건국설화'라는 말을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우리 왕실이 이렇게 신성하니까 우리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것은 단군신화 뿐만이 아닙니다.

주몽설화, 온조설화, 혁거세설화, 탈해설화, 수로설화 모두 '왕실'이 직접 만들어 퍼뜨린 것이지

민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심지어 주몽신화는 고구려 왕실이 직접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국가가 직접 만들어서 퍼뜨렸다는 반증이죠.

즉, 대부분의 건국설화는 왕실이 직접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단군신화도 고조선 왕실이 직접 만들어 퍼뜨렸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사견).

 

최근에 제가 펨코에 쓴 [고조선사] 연재글을 안 읽으신 분들은

'고조선에 왕실이 있었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고조선은 당시 대단히 조숙한 나라로서 왕실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다른 건국설화와 마찬가지로 단군신화도 

고조선 왕실이 직접 만들어 퍼뜨린 '고조선의 건국설화'라고 생각합니다(사견).

아마 이러한 결론은 학자분들도 대체로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분들도 다른 건국설화를 논하실 때 '왕실'에서 만든 것이라 말씀들을 하시니까요!

 

 

4. 단군이라는 단어가 세습군주의 호칭일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단군'이라는 호칭은 세습군주의 호칭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현대에 나타난 주장이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권근'이라는 유명한 관료가 쓴 '응제시(1396년 저술)'라는 책을 보면,

단군이 직접 신단수로 하강했고

많은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고조선의 왕이 되었는데,

단군 혼자 천년 넘게 나라를 다스린 게 아니라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권근의 주장이 바로 단군의 세습군주 호칭설의 시초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후대로 갈 수록 더욱 상세해져서 

20세기에 등장하는 <환단고기>, <규원사화>와 같은 책에서는

아예 47대 단군의 계보까지 등장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게 학계의 다수설 같습니다.

왜냐하면 '단군신화' 자체만 보더라도 '단군'은 하나의 '자연인'으로 고조선의 '시조'일 뿐이지

세습군주의 호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군은 '황제', '차차웅', '이사금', '어라하'와 같은 군주의 칭호가 아닙니다.

단지 단군 혼자서 천년 이상 나라를 다스린 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므로,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과정에서 '단군이 세습군주의 호칭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을 뿐이죠.

 

결국 우리는 단군신화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에 기재된 대로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여겨지는 '자연인'으로 보는 것이 맞지

'황제', '왕', '차차웅', '이사금'과 같은 '군주의 칭호'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후대의 전승과정에서 단군의 수명이 늘어났을 뿐이지 

단군의 수명을 근거로 문헌의 기록을 비틀어서

'단군'이라는 한 자연인을 '군주의 칭호'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5. 고조선 왕실은 단군신화를 언제 만들었을까?

 

이 부분도 순수히 저의 사견임을 밝힙니다.

심지어 학자분들이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의 [고조선사]를 읽으신 분들은 

고조선이 최초에 '요동'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가

진개의 침입을 받아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겼으나,

위만왕이 고조선의 임금이 되면서 고조선의 왕실이 바뀌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 일련의 과정속 '어느 시점'에 단군신화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단군신화에서는 '단군왕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공교롭게도 '왕검'이라는 표현은 중국사서에도 등장합니다.

 

 

<사기> 조선열전

 

(위만은)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연, 제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중략)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적군을 공격했으나 패해 흩어지고, 다는 돌아왔으나 군법을 어겨 참형되었다.

누선장군은 제나라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에 도착했다.

 

(중략)

 

그런데 좌장군이 급히 왕검성을 치려고 하자 조선의 대신들이

이에 암암리에 사람을 시켜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을 약속하는 말을 전하려고 했으나 아직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옛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관리들을 공격했다.

 

위만왕이 도읍을 정한 곳이 바로 '왕검성'이라는 것인데요.

이 왕검성은 위만왕은 물론이고 그 손자인 우거왕 시절에도 고조선의 수도여서

한나라와의 멸망전쟁을 할 당시에도 여러번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사서에는 위만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대체로 학자분들은 위만왕이 기존 준왕의 도읍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여깁니다(다수설).

왜냐하면 위만왕은 이제 막 찬탈을 하였기 때문에

어느 곳이 좋은 지역인지도 모르거니와 

갑자기 새로운 수도를 만들겠다고 하면 

백성들이 동원이 되어야 하니 당연히 반발이 심했을테니까요.

위만왕 자체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전혀 바꾸지 않는 등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성향을 보였으니, 

수도도 과거의 장소를 그대로 사용했다고들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취한다면,

왕검성은 위만 이전에도 존재하는 성이라는 건데,

이는 단군신화가 '위만 왕실'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왕실'에서 만들어졌다는 징표라고 생각합니다(사견).

 

결정적으로 위만 왕실의 시조는 위만이지 단군이 아닙니다.

위만왕은 고조선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단군신화는 위만의 '이전 왕실'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사견).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고조선이 요동에 머물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인지,

평양으로 이동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지 따져봐야 하는데요.

제 개인적으로는 평양으로 이동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사견).

 

왜냐하면 단군신화와 관련된 전승이 주로 서북한 지역에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묘향산 일대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백호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의 환웅의 '웅'을 곰웅(熊) 자를 썼다는 것이고,

단군의 어머니가 '백호'라는 것이지요.

또한 황해도 지역에는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는데 성기가 너무 커서 짝이 되려는 사람이 없자

곰이 자원하여 혼인을 해서 단군을 낳고, 다음에는 여우가 혼인하여 기자를 낳았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위 전승들의 출처는 서영대, 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단(2007), 108-110입니다).

 

이러한 전승들은 모두 고조선 왕실이 퍼뜨린 단군신화가

전승의 과정에서 각 지역에 맞게 변형이 된 것인데요.

단군신화가 주로 서북한 지역에서 퍼진 것을 보면

저는 단군신화가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긴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사견).

 

무엇보다도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최초 수도를 '평양'이라고 해놨는데요.

고조선 왕실의 입장에서는 연나라 진개에게 밀려 중심지를 옮겼다고 하면 체면이 살지 않기에

아예 처음부터 평양에 도읍한 것처럼 꾸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사견).

고조선의 건국설화는 어디까지나 통치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체제선전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단군신화는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긴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제 입장에서는 조금 더 타당해 보입니다(사견).

 

[다만, '평양'은 고조선 당대의 이름이 아니죠.

고조선 당대에는 '왕검성'이 도읍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삼국유사>에 나온 '평양'은 설화의 전승과정에서 후대의 지명이 삽입된 결과물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아마도 단군신화의 원형에서는 평양의 옛 이름인 '왕검성'이 등장했을 것이고,

다만 전승과정에서 '평양'으로 바뀌어 전승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사견).]

 

 

6. 단군신화의 내용을 어떻게 봐야 할까?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긴 고조선의 왕실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단군의 어머니가 웅녀인 것을 감안해서

고조선 왕실이 평양으로 온 다음 곰을 모시는 세력과 결합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제 개인적으로는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진실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추론의 영역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가능성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1) 실제로 고조선 왕실이 평양 지역으로 온 다음 곰을 모시는 세력과 결합한 것이 설화에 남았을 가능성

2) 웅녀의 이야기는 그저 꾸며진 가짜에 불과할 가능성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만, 단군신화에 나오는 도읍 이전 이야기(아사달, 장당경 등)는 

후대에 삽입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단군신화는 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치면서 변형에 변형에 변형을 거친 이야기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기자조선의 이야기도 삽입이 되었구요.

앞서 보셨듯이 불교 용어, 도교 용어도 삽입이 되었습니다.

애초에 단군신화에 나오는 '평양'이라는 지명도 후대에 삽입된 것은데,

아사달, 장당경과 같은 이야기가 후대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채

그저 문자 그대로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은 평양에서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가

기자가 왕이 되자 장당경에 숨어 살다 나중에 다시 아사달로 왔다고 하는데요.

애초에 기자가 고조선의 왕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구요.

 

또한 위 내용에 따르더라도 단군조선의 마지막 수도는 아사달이라는데

정작 고조선이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작성이 된 <사기>에는

고조선의 수도가 오늘날의 '왕검성'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왕검성은 위만의 전후한 시기의 고조선의 수도로 여겨집니다.

즉, 단군신화를 만든 고조선 왕실의 마지막 수도는 '왕검성'이지 아사달이 아닙니다.

아마 고조선 당대의 단군신화의 원형에서는 아사달이나 장당경과 같은 이야기가 없었을 것입니다(사견).

후대에 기자조선설이 삽입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삽입이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사견).

 

 

7. 나오며..

 

짧게 쓰려고 했는데 길어졌네요.

학자들의 견해와 사견을 구별해서 쓰려고 했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견 부분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5줄 요약

1. 단군신화는 고조선 당대에 만들어졌다.

2. 단군신화는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긴 고조선 왕실이 통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만든 것이다.

3. '단군'은 세습군주의 호칭이 아니라 고조선을 건국한 '자연인'의 명칭이다.

4. 웅녀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완전한 허구인지 명확히 알기 어렵다.

5. 단군신화에 나오는 도읍 이동 이야기는 후대에 삽입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한울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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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실린 단군신화입니다.

 

 

<삼국유사>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옛날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종종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그래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즉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이 분을 바로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ㆍ생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하였다.

이때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은 삼칠일(21일) 동안 참아서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고,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 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한다.

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기원전 2333)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궁홀산(弓忽山)[방홀산(方忽山)으로 된 것도 있다.]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제왕운기>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시작했나?

제석(帝釋)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

 

《본기(本紀)》에는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어 웅(雄)이라 하였다.

운운. 이르길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습니다.'라 하므로,

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귀(鬼)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白山頂)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를 단웅천왕(檀雄天王)라고 부른다.

운운. 손녀에게 약을 마시게 하여 사람의 몸으로 만들고,

단수신(檀樹神)과 더불어 혼인시켜서 남자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朝鮮)의 영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고로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 모두가 단군의 후손이다.

다스린 것이 1,038년이고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니,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고(高: 요임금)와 함께 나란히 무진(戊辰)에 흥하여,

우(虞: 순임금)를 지나 하(夏)를 거쳐 대궐에 살다가

은(殷) 호정 8년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네.

나라를 향유함이 1,028년인데

어쩔 수 없이 변화하여 환인(桓因)에 전했으나

도리어 164년이 지난 뒤에

어지신 분(주 : 기자)이 군신(君臣)을 다시 열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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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5층입니다 | 작성시간 24.03.25 오 단군신화가 그 당대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거네 신기하다
  • 작성자오드리 햅번 | 작성시간 24.03.25 오 설화를 이렇게 접근하는구나ㅋㅋㅋㅋ 재미있다
  • 작성자린트초콜렛 | 작성시간 24.03.25 와 흥미돋이라 정독했어
    단군신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있지만 그 너머의 의미까지는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고조선에서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이야기의 진위와 의미를 어떻게 학자들끼리 합의했을까는 생각해보지 못한거같아
    원글쓴이 통찰력에서 나라와 단군신화에 대한 애정도 너무 잘 느껴져서 너무 좋다 고마워 여샤!!
  • 작성자파랗게 파랗게 | 작성시간 24.03.25 재밌다 딴거 하면서 중간중간 짬내서 읽느라 한시간 걸렸지만 유익해 ㅋㅋㅋ 그시대에 한번 가보고싶어졌어
  • 작성자한상궁 바비 | 작성시간 24.03.25 그럼 단군이 천년이나 다스렸다는건 그냥 말로 전해지면서 부풀려진걸까? 단군이 왕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면.. 암튼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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