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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1년 4월 10일자에 실린 홍옥임, 김용주 동성애 정사 관련기사와 홍옥임의 사진
1929년 열일곱 살 소녀 김용주는 동덕여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경성부 종로에서 덕흥서림이라는 큰 서점을 경영하는 김동진의 장녀로 태어난 김용주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얌전해 동급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김용주는 다른 일에는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공부만 하며 사회를 위해 일하는 신여성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김용주의 아버지 김동진은 그런 딸의 꿈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딸에겐 늘 ‘모름지기 여자란 좋은 집에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남편 받들며 사는 게 제일’이라고 가르쳤다. 일찌감치 또 다른 부호 심정택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하고, 딸이 여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심정택의 큰아들 심종익에게 시집보낼 계획이었다. 김용주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지나가는 말로 듣기는 했지만, 졸업하려면 아직 학교를 1년은 더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심정택은 ‘신랑의 할머니가 하루바삐 손자며느리를 보고 싶어 한다’며 서둘러 혼례를 치를 것을 청했다. 딸이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동진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동진은 허겁지겁 혼인 날짜를 잡고, 동덕여고보를 찾아가 딸을 억지로 자퇴시켰다. 김용주는 시집가기가 싫다고 아버지에게 애원도 해보았고, 시집가더라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학교에 호소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은 ‘안 된다’는 매정한 답변뿐이었다. 김용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심종익에게 시집갔다. 당시 심종익은 휘문고보 1학년에 재학 중인 철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부잣집 맏딸로 태어나 큰 어려움 겪지 않고 자라난 김용주에게 시집살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귀하게 자라며 공부만 하느라 집안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부잣집 큰살림을 떠안고 보니 하루라도 실수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눈치 보는 것으로 모자라 시할머니 눈치까지 보며 살려니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린 신랑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종익은 휘문고보를 자퇴하고 비행학교를 다니겠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호랑이 같은 시집 식구들 사이에 혼자 남겨진 김용주는 더 한층 큰 적막과 고독에 잠겨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이듬해 봄, 김용주는 몇 번이나 주저한 끝에 시부모에게 학교에 다시 다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시부모는 어린 며느리를 바깥으로 내돌리는 게 꺼림칙했지만,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사는 며느리를 마냥 집안에만 붙잡아둘 수도 없어 마지못해 승낙했다. 방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뜀뛰었다. 살림할 때 입던 치마저고리를 벗어던지고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교복을 꺼내 입었다. 설레는 가슴을 애써 쓸어 내리며 하인을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김용주는 다시 살아날 희망에 부풀어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겨우 햇볕을 찾은 듯한 기쁨을 안고 총총이 교문을 두드렸다. 옛날 담임선생님과 동무들은 모두 그녀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인정을 초월한 반석과 같이 차고 엄격한 학칙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혼자는 입학을 불허함’
새로운 희망에 빛나던 교문은 금단의 동산을 지키고 서 있는 시꺼먼 무쇠대문처럼 그녀 앞에서 굳게 닫혀버리고 말았다. 김용주는 이제 달건 쓰건 돌아오는 운명을 아무 반항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깨끗하게 단념하고 다시 규방으로 돌아갔다.
(‘철로의 이슬 된 이륜의 물망초 3’, ‘조선일보’ 1931년 4월13일자)
기혼자라는 이유로 복학을 거부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김용주는 일본에 간 남편이 하루바삐 비행술 공부를 끝내고 은빛 날개 번쩍이는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비행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돌았다. 방탕한 기질은 심씨 집안의 내력이었다.
시아버지 심정택은 돈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향락했다. 심종익은 심정택의 ‘세컨드’ 소생이다. 또 남편 심종익 역시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데다가 경제적 혜택까지 누려 부친 이상으로 방탕한 향락을 추구했다. 김용주는 총명한 여자였다. 여러 번 남편에게 더 이상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 것을 간청했지만, 심종익은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는 더 큰 자극을 찾아 홍등가를 헤맸다.
(‘그녀들은 왜 철도 자살을 하였나?’, ‘별건곤’ 1931년 5월호)
마지막 희망이던 남편마저 자신을 저버리자 김용주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결혼생활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가슴 속에 맺힌 사연을 하소연할 사람이 없어 애태우고 있을 때, 우연히 여학교 시절 동창 홍옥임을 만났다. 홍옥임 역시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모던 가정’에 몰아친 풍파
홍옥임의 아버지 홍석후는 1908년 동급생 6명과 함께 제중원의학과(훗날의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기로 졸업한 조선 최초의 국내파 의사였다. 홍석후는 1921년부터 2년간 미국에 연수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졸업 후 줄곧 모교의 교수로 재직했다. 의사인 자신과 음악가인 동생 홍난파의 영향으로 홍석후의 자녀와 조카는 모두 의사 아니면 음악가였다. 홍석후의 가정은 지극히 명랑하고 쾌활한 미국식 ‘모던 가정’이었다.
홍석후는 아들은 여럿 두었으나 딸은 홍옥임 하나뿐이었다. 홍옥임은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홍석후는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홍옥임의 말 한마디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홍옥임은 피아노까지 갖춘 자신의 서재가 따로 있었고, 언제나 미쓰꼬시 백화점이나 조지아 백화점에서 사온 최고급 옷을 입고 다녔다. 당시 피아노는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호가했다. 일본 잡지를 보다가 사진 속의 할리우드 여배우가 찬 시계가 마음에 들기라도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사고야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은 딸의 정서에 도리어 악영향을 끼쳤다. 홍옥임은 원하는 것을 갖는다고 행복해하지 않았고, 반대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극심한 히스테리를 부렸다. 친구를 사귀면 며칠이 못 돼 싸우고 갈라서기 일쑤였고, 학업 성적은 매번 끄트머리부터 세어 올라가는 것이 빨랐다.
김용주가 동덕여고보를 자퇴하고 시집간 후 홍옥임은 이화여고보로 전학했다. 1930년 이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중앙보육학교에 들어갔으나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뒀다. 여학생 시절 홍옥임은 ‘이상한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1930년대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동성연애가 유행이었다. ‘여성’ 1937년 7월호에 실린 ‘여학생 스케치’.
홍옥임은 어디서고 어여쁜 소녀를 보면 당장 금반지 한 개를 사서 선물하고 연서(戀書)를 써 보냈다. 요즘 여학생들 사이에서 동성끼리의 연애는 대개 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홍옥임에게는 동성 애인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도 나이가 차감에 따라 동성 애인만으로는 관능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녀들은 왜 철도 자살을 하였나?’, ‘별건곤’ 1931년 5월호)
동성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던 홍옥임은 이화여고보를 졸업한 후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세브란스가 제일 좋아. 앞으로 나는 의사하고 결혼할 테야.”
홍옥임은 만나는 친구들에게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한테 시집갈 것이라 장담했다. 아버지가 세브란스의전 교수였고 오빠는 그 학교 학생이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홍옥임이 의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 집안사람이 죄다 달려들어 홍옥임의 신랑감을 물색했다. 얼마 후 홍옥임은 오빠의 소개로 세브란스의전 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다. 홍옥임이 이성 애인과 사랑을 키워갈 때 그의 가정에 뜻밖의 우환이 생겼다.
모(某) 의사는 미국에 유학까지 한 대학교수로서 사회의 명망이 높은 인격자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노(老) 박사에게는 최근에 갑자기 애인이 생겨서 그처럼 행복하고 단란하던 가정에도 점차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더구나 박사의 애인이라는 여성은 ‘원동 재킷’이라는 유명한 ‘모던 걸’로서 박사에게는 마치 딸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눈치를 챈 박사의 막내따님은 처녀의 결벽성에서 환멸을 느끼고 불결한 세상을 하직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김을한, ‘사건과 기자(1960)’ 중에서)
원동에 사는 김화동은 늘 연애를 상징하는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녀 ‘원동 재킷’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언니 김후동은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려 두고두고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홍옥임은 존경하는 아버지가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인 ‘원동 재킷’과 연애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안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홍옥임의 애인마저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애인에게 연이어 배신당한 홍옥임은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해맑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고, ‘삶이 허무하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방안에 틀어박혀 일본 연애소설만 줄기차게 읽어댔다. 김용주는 가정 문제와 연애 문제로 갈등하던 홍옥임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동정에서 비롯된 사랑
남자에게 배신당한 홍옥임과 김용주는 서로 깊이 동정하며 서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과 아픔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홍옥임은 수시로 김용주의 집을 찾았다. 두 여인의 우정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추악한 현실과 허무한 인생에 대한 절망은 커져만 갔다. 홍옥임은 친구들에게 “차마 죽어버리려 해도 아버지의 명예와 나밖에는 동정해줄 사람이 없는 김용주가 가여워서 그러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도원에 들어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개신교를 믿는 집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1년 3월, 홍옥임과 김용주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 마지막 전차를 타고 한강으로 향했다. 전차에서 내린 두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강변으로 내려갔다. 모래 위에 옷을 벗어놓고 물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두 여인은 괴로운 세상에서 벗어날 유일한 도피처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초봄 차가운 물살이 두 여인의 목 밑까지 차올랐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덧없는 이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 강변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두 여인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누군가 급하게 노를 저어온 것이었다. 구조를 받은 두 여인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자살 시도에 실패한 두 여인은 4월 안으로는 죽어버리기로 결심하고 남은 한 달 동안 원 없이 놀아볼 생각으로 밤낮없이 공원으로 극장으로 돌아다녔다. 3월 말 드디어 죽음을 결심하고 애선사진관에서 최후의 촬영을 마치고 동무들에게 사진을 일일이 나눠주었다. 같은 날 홍옥임은 일본에 유학 간 오빠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세상에 대한 저주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이 가득 차 있었지만, 마지막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살할 것으로 생각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 4월1일 홍옥임은 이화여전 음악과에 입학했다. 새 출발하는 날 일기장에는 의외로 ‘세상 사람은 모두 가면을 쓴 천사다. 나는 학교도 세상도 다 싫다’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철로의 이슬 된 이륜의 물망초 5’, ‘조선일보’ 1931년 4월17일자)
1931년 4월 8일, 이화여전 음악과 신입생 홍옥임은 그날 따라 무척 행복해 보였다. 수요일이었음에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침부터 몸단장을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스물한 살 탄력 있고 발그스름한 두 뺨에 미쓰꼬시 백화점에서 사온 ‘코티(Coty) 분’까지 바르고 나니 웬만한 여배우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만큼 미모가 빛났다.
“얘 학교 안 가니?”
“오늘은 수업 없어요.”
홍옥임은 어머니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옷장에서 옷이란 옷은 죄다 꺼내 옷맵시를 맞춰보았다. 걸쳤다 벗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조지아백화점에서 새로 산 실크 양장을 골라 입었다. 얼마 후 김용주가 집으로 찾아왔다. 김용주는 시집간 지 3년이 지난 주부였지만, 그날따라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이었다.
“엄마, 우리 놀러 나가요.”
“아니 점심때 다 됐는데 밥이나 먹고 가야지.”
“나가서 먹을 게요. 우리 바빠요.”
1931년 4월8일 오후 4시, 세련된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20살 전후의 신여성 두 명이 영등포역에서 하차했다. 두 손을 꼭 잡은 두 여인은 마치 소풍 나온 소녀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얘, 인천 방향이 어디니?”
키가 조금 큰 여인이 지나가는 꼬마에게 10전짜리 백동전을 쥐어주며 물었다. 꼬마는 난데없는 횡재에 얼떨떨해서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두 여인은 꼬마가 가리킨 방향으로 철길을 따라 걸었다. 지난밤 때늦은 봄눈이 내려, 철로 양편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나리와 진달래 꽃잎 위에는 눈이 살포시 얹혀 있었다. 두 여인은 이채로운 봄 정취에 취해 두 손을 꼭 잡고 마냥 즐거워하며 걸었다.
40분 남짓 걸었을 때,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열차가 보였다.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며 생끗 웃었다. 열차는 점점 다가왔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그냥 걸었다.
오후 4시45분,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질주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날렸고, 인천발 서울행 제428호 열차는 영등포역을 2km 남겨두고 급제동을 걸었다. 열차가 내뿜는 굉음에 묻혀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두 여인의 몸은 쇳덩이에 부딪혀 갈가리 찢겨 나갔지만,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꼭 잡은 손만은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