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890649006
진 헌공(헌곤 아니다)
전국 7웅 중 가장 변방에 찌그러져 있던 진(秦)나라
하지만 24대 국군 진 헌공 시기부터 리빌딩 하기 시작하더만
진 효공
그 아들인 진 효공이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으로 개혁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효공 밑에서 유독 중용받은 사람이 있으니
상앙
바로 옆 위나라 사람이었지만
중용받지 못했던 범부, 상앙이었다.
암튼 나영석 - 이서진 급으로
진 효공의 페르소나가 된 상앙
그는 대대적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1. 백성을 십오로 편성해 서로 경계하며 연좌시키는 연좌제 실시
2. 한 집에 남자 둘이 사는데 분가를 안하면 세금 두배
3. 군공을 쌓으면 신분 상승의 기회
but 귀족이어도 공적 못세우면 서민으로 강등
4. 농업 진흥을 위해 곡식과 비단을 많이 생산할 경우 요역 면제
but 작은 이익만 보거나 나태한 백수새끼들은 관노비행
대충 이런식이었는데, 이것을 세세하게 보면
1,2번 - 씨족제를 타파해 소가족제를 마련, 이들을 연좌함
3번 - 군공을 장려하는 동시에 독립된 소농 양성
4번 - 농업을 진흥해 부국강병
즉 씨족제에서 해방된 독립 소농을 기반으로 부국강병을 실시해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이 목적인 것인데...
실제로 이런식으로 진나라는 부국강병에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대외 확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파촉 정벌)
첫 번째 변법이 엄청난 성과를 보이니까 효공은 상앙을 재상으로 삼았고
상앙은 이에 힘입어 국가의 도읍을 역양에서 함양으로 옮기는데..
(옹에서 역양으로 옮긴건 상술한 진 헌공때)
변방에서 중원 근처로 와보니 본인들의 전통과
중원의 예법에 어느정도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 상앙은 중원의 예법을 하나 둘 흡수하기 위해
두 번째 변법을 실시한다.
1. 현제 실시 -> 훗날 군현제의 기본베이스가 됨
2. 성인 남성 2인 이상이 함께 사는 것을 금지 -> 핵가족화 장려
(생산을 증량시키려는 목적보다, 당시 중원의 예법이 이랬다 함)
3.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위해 수전제 실시
4. 납세의 공평성을 위한 도량형 통일
이렇게 중앙집권화를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중원의 예법을 법으로 적용시킨 것이다.
특히 1번과 4번 같은 경우엔
약 100년 뒤 시황제가 그대로 시행한거 보면
상앙이 뒤지고 나서도 변법의 내용은
진나라 통일정책에 기본 베이스로 깔려 있었다고 보면 된다.
요약)
1. 변방에 찌그러져 있던 진나라
2. 상앙 등용 뒤 1차 변법으로 부국강병
3. 한번 효과 보고나서 아예 재상까지 하게 된 상앙
4. 중앙집권화를 공고히 하면서 중원 예법을 준용하기 위해 2차 변법
5. 이 2차 변법은 훗날 시황제의 통일정책에 모티브가 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