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donga.com/news/amp/all/20190808/96883524/1
당시 경남 웅동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계광학교 교사인 주기용, 배재황, 허전 등이 중심이 됐고 1919년 4월3일 교사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웅동주민 3000명과 시위대가 대한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계광학교 교사들은 3·1운동에 가담해 다수가 체포됐는데, 1930년 9월28일자 중외일보 기사에는 교사 '조맹규·조원갑·조정호·조명진' 등이 체포돼 "가르칠 선생이 전부 없어 부득이 임시휴교를 하게 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웅동은 '창녕 조씨' 집성촌으로, 조맹규씨는 조 전 수석의 종조부(조부의 형제)다.
또한 조 전 수석의 고모할머니인 조맹임씨는 1928년 '웅동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문맹퇴치운동을 벌인 민족운동가다. 조맹임씨는 투옥 후 고문으로 허리뼈가 부러져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한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한때 폐교되기도 했던 웅동학교는 이후 복교돼 경남 창원 진해에서 민족자강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조 전 수석은 청와대 재임 기간이었던 7월 12일을 기점으로 연일 SNS로 항일 여론전에 앞장서고 있다.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는 극일 메시지나 일본어로 "한국인의 DNA 속에 이순신 정신과 의병·독립군 경험이 녹아 있다"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치·경제적으로 능멸한다면 우린 정당 방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글로 경고하기도 했다. '죽창가' '매국' '친일파' 등 민감하고 강경한 단어나 표현을 앞세운 글도 남겼다.
조 수석의 항일 여론전에 공직자로서 '도를 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조 전수석의 '항일 여론전' SNS는 문 대통령의 참모로 시작했지만 여기에는 공직자이기 이전에 항일운동을 이어온 가풍을 이어받은 후손으로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과 관련해 극일 의지를 북돋우는 한편 일각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참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집안 전체가 여남 안 가리고 독립운동했었다고 함
고문 후유증도 있을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