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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순종의 장인인 윤택영(尹澤榮)이 중국에 망명한 이유!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4.04.23|조회수1,936 목록 댓글 5

출처: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3387369944

 

 

윤택영

 

 

지나친 부채로 중국으로 도망가는 윤택영 , 결국 거기서 객사한다

 

윤택영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구(임금의 장인) 즉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인이며, 마지막 황후이자 강직했던 '순정효황후 윤씨'의 아버지 였다.(딸과 아비가 왜그리 달랐을지...)

작호는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이었다. ​한성에서 태어난 윤택영은 1899년 시강원 시종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법무협판, 지돈령사사, 육군 참장·부장·찬모관을 역임했다.

1904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황태자비 민씨가 사망하자 2년 뒤 당시 13살밖에 안 된 큰 딸을 1906년 갖은 뇌물을 써서 순종과 결혼시켜 황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13살에 황후가 된 순정효황후 그러나 부친의 빚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딸이 황후가 되자, 황제의 장인 자격으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그는 사위였던 순종보다 2살이 어렸다고 한다.

그랬기에 순종과 윤택영의 딸인 '순정효황후'의 나이차이도 20살 이상 차이가 났었다.

하지만 이 나이 차이보다 더 문제는 아버지 윤택영의 욕심으로 '순정효황후' 즉 자신의 어린딸을 생과부로 만들었다고 비난을 받는다.

순종은 안타깝게도 '김흥륙의 아편 커피독살 사건과 모친인 중전 민씨의 참혹한 죽음 당시 일본군에 의해 상투가 잡히는 등'의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불임이 된 상태 였었다.

1. 한일합방 뒤 '조선귀족령' 에 의하여 후작에 봉임되다.

윤택영의 자택 그는 항상 엄청난 채무로 인해 고생을 하다 죽는다.(독립운동이 아니라...)

 

 

윤택영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2달 뒤인 10월 16일에 조선귀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귀족회'의 이사를 맡았게 된다.(회장은 박영효)

이후에도 철저히 일제에 협력하여 조선임업조합 보식원 간사와 한일합병 시정 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을 맡았고

불교옹호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열심히 친일을 행적을 자행한다.

옥새를 치마속에 숨기고 저항한 윤택영의 딸 순정효 황후 윤씨

 

 

특히 한일합병 당시 합병을 반대하는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속에 숨겨 합방을 막으려 하자 아무도 황후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는데

윤택영(순정효황후의 부친)의 친형이자 순정효 황후의 큰아버지가 되는 윤덕영이 강제로 황후의 치마를 들추어 숨긴 옥새를 강탈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엄청난 빚에 시달렸던, 채무왕 윤택영

 

중국으로 도망가는 윤택영 (독립운동도 아니고 빚에 쫓겨서)

 

윤택영은 친일행각도 문제 였지만 거의 평생을 채무에 시달리다 죽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형인 운덕영은 머리가 커서 '대갈장군 혹은 대갈왕'이라 불리었는데, 윤택영 역시 채무왕 혹은 차금대왕 이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자신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 황실과 연을 맺으려 했고 이를위해 황실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이 역시 부채였다고 한다.

그렇게 '국구 즉 황제의 장인'이 되었지만 '부원군' 이란 지위를 이용해 더 막대한 빚을 지었고 그 자금으로 '사치와 유흥'을 즐겼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 해서 13살에 시집을 간 윤택영의 딸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 역시 얼글을 들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3. 매국노 윤택영과 윤덕영의 주먹다짐

윤택영(우)의 채무문제로 주먹다짐을 벌인 매국노 형제(윤덕영과 윤택영)

 

 

그래도 윤택영이 향락에 미친놈이고 매국질을 했지만 순종황제의 장인이 '채무왕' 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대한제국 황실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고 해서

1907년에 고종은 (눈물을 머금고) 내탕금을 사용해서 사돈인 윤택영이 진 채무의 절반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한다.

자신보다 어린 장인(윤택영)으 빚으로 인해 골치가 아팠던 순종

 

 

그럼에도 윤택영은 나머지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었기에 여러 차례나 사위인 순종을 찾아가 '자신의 채무를 대신 갚아달라' 고 했기에 '딸인 순정효황후'는 정말 죽고 싶어 했다고 한다.

 

친일파(윤택영)의 딸로 무척이나 힘들어 햤던 순정효 황후

 

 

한 두번도 아닌 거듭된 장인(순종보다 2살 어린)의 돈부탁을 결국 순종이 거절을 하자, 윤택영은 친형이자 엄청난 부자 였던 매국노 윤덕영에게 돈을 꿔달라고 부탁을 한다.

하지만 이미 윤덕영도 동생에게 빌려준 돈이 상당했었기에 윤택영의 돈 부탁을 거절하자, 요정에서 형제가 주먹다짐을 하였고 이로인해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

당시 두 매국노 형제의 싸움은 ‘개벽’이란 잡지의 1926년 6월호 ‘경성잡담’에 까지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적당히 좀 싸우지...)

당시 기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윤택영은 그의 형 ‘대갈 대감(형인 윤덕영)’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4. 결국 해외로 도망가는 윤택영(독립운동이 아니라 빚에 쫓겨서)

 

일제에 의해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 그 중 윤택영은 순종의 장인이었기에 가장 높은 '후작'을 받는다. 하지만

 

 

이에 윤택영은 아예 일본 총독부에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사실 윤택영은 '한일합병' 당시 받은 어마어마한 금액의 은사금을 받았고 그 자금으로 빚을 다 청산을 했슴에도 이 후 사치스런 소비생활을 하다가 또 채무를 엄청나게 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윤택영이 빚쟁이에 쫓기는 생활을 보다못한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은 '윤택영의 재산'을 저당잡고 채무조정에 들어갔다고 한다.

 

 

 

 

 

결국 명색이 (일본이 봉한) 귀족인데 빚에 쫓겨서 궁핍하게 사는게 조선총독부 체면도 손상을 시킨다며 '특별예산'을 편성해 윤택영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라고 했지만 인간말종인 그는 매국도 모자라 사치로 얼마 안되는 보조금 마저 금방 날린다.

사이토 총독과 조선귀족들의 신년회 사진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윤택영의 후작 작위'를 박탈시켰지만 '순정효황후'(운택영의 딸)의 체면을 고려해서 작위는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고 한다.

 

 

순종의 승하로 입국하는 윤택영에 대한 기사

 

 

그러나 결국 빚의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이제는 손벌릴 곳도 없고 해서 1920년 7월 11일 장남 윤홍섭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채무자들에게는 고종이 중국의 위안스카이에게 빌려준 10만환이 있는데 그 돈을 받아서 빚을 갚겠다고 말하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당연히 이는 운택영의 거짓말 이었고 그렇게 무일푼으로 외국의 낯설고 초라한 생활에 툭하면 딸과 사위(순종과 순종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귀국할 수 있도록 자신의 채무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구걸했다고 한다.

 

당시 무려 100만원의 엄청난 채무를 지고 있었다는 윤택영

 

 

그러다가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윤택영이 순종의 장인인지라 문상을 하기 위해 그가 귀국할 것을 예상하고 창덕궁 주위를 감시하던 채권자들이 몰려들어 빚 독촉을 해댔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잡담’ 중

 

 

 

윤택형의 형인, 윤덕영이 지은 '벽수산장' (아방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를 견디지 못한 윤택영은 상이 끝나자마자, 엄청난 부채와 채권자들의 독촉에 시달리다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에 도피하던 중 1935년 10월 24일 객사하였다고 한다, (60세)

5. 아버지 윤택영과 달랐던 '자녀 윤흥섭과 순정효황후'

 

아버지와는 다른 기상을 보여준 '순정효 황후' 마지막까지 치마폭에 옥쇄를 숨겼다.

 

​윤택영의 딸인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속에 숨겼던 것 처럼 윤택영의 큰 아들이자 순정효황후의 동기지간인 윤홍섭은 부친의 채무를 피해 해외로 도망가긴 했지만 그래도 독립운동에 이 후 투신을 한다.

일단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로부터 10만원을 얻어서 상해임시정부 설립 자금을 보태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다 1935년 귀국 후 '흥업구락부'에 참가했다가 일본에 체포되는 등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윤택영의 가족사진

 

 

하지만 운택영의 차남인 윤의섭은 형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기 때문에 윤택영 사후 그의 후작 작위를 승계받은 후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역시 동참을 한다.

윤의섭은 조선귀족 중 가장 높은 후작으로서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 전몰 장병 추도회'에 참석하는 등 최선을 다해 일본 총독부를 위한 친일행각을 벌였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차남은 친일을 했고 빚으로 망명 중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깄다가 독립운동에 투신을 했고 순정효황후가 전달해 주는 독립자금을 임시정부 재정에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차남은 계속 친일을 했고 장남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아무튼 형제 중 한명이라도 깨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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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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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함께패려합시다 | 작성시간 24.04.23 닮았다
  • 작성자아처리 | 작성시간 24.04.23 지금 서초구땅 다 윤택영 소유였다던데
  • 작성자콩가루팥가루 | 작성시간 24.04.23 딸 팔아 장사하려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한테 시집 보냈네 저 시대 기준으로도 욕먹을 짓이었나본데
  • 작성자车厘子 | 작성시간 24.04.23 근데돈이많은데왜케빚을짐? 희한하눼
  • 작성자바꾼닉네임 | 작성시간 24.04.23 저색기를 죽엿어야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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