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데 굵은글씨만 읽어도 괜춘
시간없으면 쭉 아래로 내리삼~ 요약있어
아,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것들은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성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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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들으러 나오시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시오!”
철모에 총까지 든 군인들이 수십 명 퍼져 다니면서 득달같이 재촉하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는 총검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면서 병든 노인까지 내몰았다. 좀 불안한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 전해 5․10선거 무렵에도 그렇게 득달같이 사람들을 불러모은 적이 있어서 그때처럼 무슨 중요한 연설이 있는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잠시 후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조회대 위로 권총 찬 장교가 올라섰다. 그 장교의 지시에 따라 지금부터 군인가족을 골라내겠다고 큰소리로 언명하지 않는가.
“군인가족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사돈에 팔촌까장 덮어놓고 나오디 말구 직계가족만 나오라요. 만일 군인 직계가족도 아닌데 나온 사람은 당장 엄벌에 터하가시오.”
별안간에 무슨 일일까? 군인가족들에게 보리쌀 배급이라도 주려나? 막상 군인가족 당사자들도 나가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자, 장교는 빨리 나오라고 빽 고함을 질렀다. 군인가족들은 주뼛주뼛 눈치보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단 앞으로 가 이장과 순경과 대동청년단 사람들의 심사를 받고 나서 단 뒤로 인솔되어 따로 앉혀졌다.
그 다음에 순경가족이 나가고 이어서 공무원가족이 나갈 즈음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군중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무원가족에 이어 마지막으로 대동청년단과 국민회 간부 차례가 왔을 때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나아가 이장과 청년단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이런 북새통에 별안간 군중 속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가 났다.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교 돌담 울타리에 기어올랐다.
“불이여, 불.” “불났져, 불났져.”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렀다.
울타리까지 갈 것 없이 마을 동편 하늘에 까맣게 불티가 날고 있는 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차츰 바람에 밀려왔다. 그때 서편 울타리 돌담이 여기저기서 매달린 사람들의 체중에 못 이겨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 울타리 터진 데로 몰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지체없이 총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다시 운동장 복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너진 돌담 위에 흰 무명적삼에 갈중의를 입은 노인이 한 사람 엎어져 죽은 모양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군인 여남은 명이 빠른 동작으로 돌담 위로 뛰어오르더니 아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조회대 뒤에 늘어서 있던 이십여 명의 군인들도 앞에총 자세로 잽싸게 뛰어나오더니 정면에서 사람들을 포위했다. 단상의 그 장교는 권총을 어깨 위로 빼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강하게 턱을 올려젖히자 철모가 햇빛에 번쩍 빛났다
“잘 들으라요. 우리레 지금 작전수행둥에 있소. 여러분의 집은 작전명령에 따라 소각되는 거이오. 우리의 다음 임무는 여러분을 모두 제주읍으로 소개하는 거니끼니 소개둥 만약 질서를 안 지키는 자가 있으문 아까와 같이 가차없이 총살할 거이니 명심하라우요.”
장교의 귀설은 이북 사투리가 겁 집어먹는 부락민들의 머리 위에 카랑카랑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제주읍으로 소개시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군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당장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만 완전히 넋잃고 절망해야 할 사람들이 다른 무엇을 예감하고 두려워하는가? 마을 쪽에서 해풍을 타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더욱 심하게 밀려오고 불티가 까맣게 뜬 하늘에 불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게다가 이따금 총소리가 탕탕 울렸다.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교문을 향해 늘어서기 시작했을 때, 별안간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레 데려감져” 하는 말이 전류처럼 군중 속을 꿰뚫었다. 그러자 교문 가까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단상의 장교가 권총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가는 자는 가차없이 총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 말에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번갈아 악쓰며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었지만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도무지 헤어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둘 다 고무신이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서로 이름 부르며 가족을 찾는 소리와 군인들의 악에 바친 욕소리로 운동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머리 위에서 한 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죽은 사람을 보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 앞이 트였지만 길수형과 나는 장교가 권총을 빼들고 서 있는 조회대 뒤로 달려갈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다간 저 사람이 틀림없이 총을 쏠 테지.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사람들이 서편 울타리에 붙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군인들은 긴 장대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건 교무실 앞 추녀 끝에 매달아두었던 것으로 학교 운동회 때마다 비둘기들을 넣은 대바구니 두 개를 맞붙여 얇은 종이를 발라 만든 큰 공을 높이 매달아놓은 데 사용되던 거였다. 그것은 얼마나 신나는 경기였던가.
장대 두 개는 이제 한쪽에 몰려 있는 사람을 울타리에서 떼어내서 내모는 구실을 했다. 장대 양끝에 군인 한 사람씩 붙어서 군중 속으로 끌고 들어가 장대로 오십 명쯤을 뚝 떼어내어 교문 밖으로 내몰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을 틈타 길수형과 나는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와 할머니가 있는 조회대 뒤편으로 냅다 뛰어갔다. 청년단원들이 우리 다리를 겨냥해서 대창을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나 용케 맞지 않았다. 우리가 쫓기며 조회대 뒤로 가자 거기 모인 우익인사 가족들이 얼른 우리를 안으로 끌어넣어 주었다. 할머니가 달려들어 치마를 벌리고 닭이 병아리 품듯이 우리를 싸서 숨겼다. 우리 뒤를 쫓던 청년단원 두 명이 우리를 포기한 것은 마침 우리 뒤미처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과 아낙네 열 명쯤이 달려들었다가 마구 내지르는 대창에 쫓겨갔다.
장대 두 개가 서로 번갈아가며 사람들을 몰아갔다.
장대가 머리 위로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장대에 걸린 사람들은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렸다.
장대 뒤에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공포를 쏘아대자 사람들은 장대에 떠밀려 주춤주춤 교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교문 밖에 맞바로 잇닿은 일주도로에 내몰린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는 할머니들, 총부리에 등을 찔려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아낙네들, 군인들은 총구로 찌르고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사람들은 휘둘러대는 총개머리판이 무서워 엉금엉금 기어갔다.
가면 죽는 줄 번연히 알면서 어떻게 제 발로 서서 걸어가겠는가. 뒤처지는 사람들에게는 뒤꿈치에다 대고 총을 쏘아댔다.
군인들이 이렇게 돼지 몰듯 사람들을 몰고 우리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얼마없어 일제사격 총소리가 콩볶듯이 일어나곤 했다.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길수형도 나도 울었다.
우익인사 가족들도 넋놓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
열한번째로 끌려가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운수 대통한 사람들이었다. 때마침 대대장 차가 도착하여 총살중지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에도 예외없이 ‘만약’이란 가정이 따라왔다.
만약 대대장이 읍에서부터 타고 오던 찝차가 도중에 고장만 나지 않았더라면 한 시간 더 일찍 도착했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삼백 명이나 사백 명은 더 살렸을 것이다.
따라서 희생자는 백 명 내외로 줄어들 것이고, 또 적에게 오염됐다고 판단된 부락을 토벌해서 백 명 정도의 이적행위자를 사살했다면 그건 수긍할 만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피살자 육백 명이란 수효는 옥석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사격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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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남정네들은 마을에 그대로 눌러 있었는데, 이들은 폭도에 쫓기고 군경에 쫓겨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할 수 없이 한라산 아래의 목장으로 올라가 마른 냇가의 굴속에 피난했다.
행방을 알 길 없는 남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하던 순이삼촌도 따라 올라갔다. 이 섬은 워낙 화산지대라 곳곳에 동굴이 뚫려 있어서, 우리 부락처럼 폭도에도 쫓기고 군경에도 쫓긴 양민들이 몰래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다.
솥도 져나르고 이불도 가져갔다. 밥을 지을 때 연기가 나면 발각될까봐 연기 안 나는 청미래덩굴로 불을 땠다. 청미래덩굴은 비에도 젖지 않아 땔감으로는 십상이었다. 잠은 밥짓고 난 잉걸불 위에 굵은 나무때기를 얼기설기 얹어 침상처럼 만들고 그 위에서 잤다. 쌀은 아끼고 들판에 널려 까마귀밥이나 되고 있는 썩은 말고기를 주워다 먹었다. 겨울이 되어도 난리 때문에 미처 내리지 못한 소와 말이 목장에는 좀 남아 있었는데 그냥 놔두면 한라산 공비들의 양식이 된다고 토벌군이 총으로 쏘아죽여, 쇠고기만 운반해가고 말고기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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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지나 형이 숨은 곳을 가르쳐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을 판 굴에서 여러 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그들은 또 여맹(女盟)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순이삼촌도 그런 식으로 당했다.
지서에 붙들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 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 갔으면 분명 그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이들은 밭에서 혼자 김매는 젊은 여자만 보면 무조건 냅다 덮친다는 소문이었으니 나이 찬 딸을 둔 집에서는 이래저래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딸이 겁탈당하기를 기다리느니 미리 선수를 써서 서청 출신 군인에게 시집 보낸 우리 할아버지의 처사는 백번 잘 한 일이었다. 아직 스무살 어린 나이에 별 분수를 모르던 고모부는 할아버지가 꾀로 어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결혼하고 만 것이었는데 고모는 고모부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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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게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 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폭동을 진압해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지휘관이나 경찰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부락민들이 마을에 돌아와서 맨 먼저 한 일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일주도로변의 순이삼촌네 밭을 비롯한 네 개의 옴팡밭에 늘비하게 널려진 시체를 제각기 찾아다가
토롱(土壟)을 만들어 가매장했다.
석 달 가까이 방치되었던 시체들이라 까마귀밥이 되고 풍우에 썩어 흐물흐물 문드러져 탈골되었으니, 누구의 시체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옷가지를 보고 구별했는데 동(東)동네 누구는 제 아버지 시신을 찾아놓고 지고 갈 지게를 가지러 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잘못 알고 가져가버린 일도 있었다.
애어머니들은 대개 제 자식의 몸 위에 엎어져 죽어 있었는데
그건 죽는 순간에도 몸으로 총알을 막아 자식을 보호해보려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순이삼촌- 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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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한다음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고
군인, 공무원 직계가족을 빼고 나머지 사람들 밭으로 끌고간다음 모조리 총으로 쏴서 죽임
마을 사람들 500여명이 한꺼번에 떼죽음당함
마을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폭도에 쫓기고 군인에게 쫓기고 하다가 전라도나 일본으로
배타고 도망가고 산이나 동굴에 숨어들어갔는데
산에 숨은 사람들은 군인들이 토끼몰이하듯 사냥함....
해방 후 광복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군정과 그들이 고용한 친일 군경에게 어처구니없이 탄압을 받던 제주도민들이, 우발적인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일으킨 저항, 그런데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와 그들을 따르는 우익 세력들이 제주도민들의 저항 중 일어난 폭력을 빌미 삼아 조직적으로 몇 백 배, 아니 몇 천 배로 보복하며 무차별하게 제주도민들을 살상했던 끔찍한 국가 폭력 이게 4.3 사건이야
처음으로 공식사과한 대통령이 누군지 알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습니다.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법적 기구인 제주 4.3사건 특별위원회의 건의를 수용한 것입니다.
취재기자 전화로연결합니다. 강성웅 기자!
노 대통령이 오늘 제주를 방문했는데 4.3 사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힌 겁니까?
그렇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 제주도를 방문해 도민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같은 입장을 정했다면서,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명복을 빈다고 말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또 오늘 제주도를 방문하기에 앞서 4.3 사건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조사 결과를 보고받았으며 위원회는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의 명예회복 등을 건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 차원의 사과에 이어 희생자들의 신속한 명예회복과 4.3평화공원의 조성 등 4.3 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뤄질 수있도록 정부에서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또 4.3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 지난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해서 이듬해인 48년 4월3일에 제주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무장봉기,그리고 54년까지 계속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시점에서 해방 직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했던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비단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노 대통령은 4.3사건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함으로써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월 정부의 입장을 발표하려 했지만 4.3 위원회의 조사가 마무리 되지않았고 내년 4월에 발표하려고 보니 총선 직전이어서 적절치 않아 이번에 사과를 하게됐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