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001848520
서울북방전투의 배경:1951년 4월 중공군이 54만의 병력으로 5차공세를 가해온다
6/25전쟁이 개시하고 최고로 많은 병력이 내려오늘걸 방어하는 un군은 서로 의견이 갈린다
이러한 어조는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리지웨이 un군 총사령관에게 우리는 충분히 서울을 방어할수있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였다.
밴플리트는 노네임선에서 중공군을 막아낼려고 계획을 세운다.
이는 서울이 혹시나 뺏기더라도 동부전선이 서울보다 위로 훨씬올라가 있어서 언제든지 다시 서울을 뺏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국군 1사단이 수색-구파 미1기병사단이 구파발-쌍문동 미25사단이 쌍문동-덕소으로 방어하고있었다
un군은 중공군이 침입할꺼같은 예상루트에다가 살상지대를 구축했다
중공군의 5차 4월공세는 6.25전쟁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였고 그 클라이막스가 용문산-파로호전투로 끝나면서
그이후 전쟁은 고지전으로 성격이 변해간다
이는 공세했던 중공군 3개군이 녹아 없어진 수준이었다 그것도 단 이틀만에..
이는 지금껏 1,2,3차 공세에서 보여줬던 중공군의 장점인 운동전의 특성이 전혀사라지고 중공군의 무지스러운 돌격만이 남았을뿐이었다.
이때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일부러 중공군을 유인해서 격멸시키고 원산이나 진남포에 상륙을 한다음에 유엔군이 대반격을 나서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된다
이전에 가평전투에서 영국군27여단에게 막힌 부대들을 후퇴시켰다
39군은 화천 26군,40군은 상륙을 방어하기위해 각각 원산과 사리원으로 후퇴시켰다
이전투에서 중공군은 깨달았다
아무리 병력이 많고 병력의 운용의 묘를 잘살러도 화력의힘 앞에서는 이길수가 없다는것
이는 중공군 5차공세 2단계에서의 전략을 바꾸게된다.
밴플리트 탄약량은 1문당 발사가능 포탄수를 30발에서 300빌로 10배를 증가시켰다
이는 미군의 1달 포탄생산량 38만발을 3일만의 소모시킬수있는 포탄 소모량이었다
이렇게 중공군의 5차1단계공세인 4월공세를 실패하면서 중공군은 서울이있는 서부전선이아닌
약한 한국군이 있는 동부전선을 노리게되고 이는 국군최대의 대패인 현리전투로 이어지게된다.
댓펌
이후 부터 이런 쏟아붇기 포격을 "벤플리트 포격" 이라고 부름.
그리고 4월 전투 끝내고 벤플리트는 미국 의회에 불려나감.
훈장을 줄려고 미국 의회에서 벤플리트를 부른 게 아니고
미국 육군에서 규정하고 있는 포탄량의 8배를 소요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청문회에 출석하는 거였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