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흥미돋]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작성자Tigers|작성시간24.05.09|조회수1,021 목록 댓글 3

출처: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역사넷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 1920년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


왈우 강우규 의사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다.

요하 주변의 농토를 개간하여 한인촌인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고, 이 마을은 후에 노령과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지린성 동화 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으며,

1919년 65세의 나이에 서울역에서 조선 총독으로 신임된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졌으나 빗나갔고, 신임 총독 사이토를 환영 나온 일제 관헌 및 그 추종자들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후 도피 중 독립운동 탄압, 검거를 전문으로 하던 총독부 고등계 형사인 친일파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그해 9월 17일 수감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최종 판결에서, 총독 암살미수혐의와 민간인 사상 혐의로 사형 구형,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강우규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으로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국내외의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의 의거는 물론 재판과정과 수형생활, 처형과정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판과정 자체가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한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복권1등당첨됐음 | 작성시간 24.05.09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다..
    근데 ㅆㅂ 난 2찍한적 없다고요.. 그쪽에 눈도 안돌렸는데 ㅆㅂ…
    그래도 죄송합니다…
  • 작성자김밥싸줘 | 작성시간 24.05.09 진짜 한탄스럽다 이런 분들이 지켜주신 나라를...
  • 작성자병원가기싫어 | 작성시간 24.05.09 어렵게 지켜낸 나라인데..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