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정말 싫다. 어릴때도, 지금도 너무 싫다.
가난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그까짓 돈 때문에 나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10대때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아빠한테
생리대 하나만 사달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생리를) 자주 하냐고 핀잔을 들었다.
그래, 생리대 비용이 부담되겠지. 나도 생리해서 싫었어. 아빠. 아빠의 그 한마디는 30대인 지금도 큰 상처인건 알까?
그리고 성인이었던 20대초반 대학생땐 4년 내내 생리대 하나로 약 5일간 버텼다. 휴지로 하면 되더라고.
난 가난대신 그마저 타고난게 있다면 나쁘지 않은 공부머리였다. 당시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능을 쳤고 불수능이었던 2010년도에 난 나쁘지 않은 점수로 수능을 그럭저럭 쳤다. 수시무제한이면 뭐해. 대학교 원서비가 없어서 수시원서도 못 썼는데. 친구들이 원서 10개 이상 쓰는거 사실 나 정말 부러웠어. 나는 그 반토막인 5개라도 쓰고 싶었거든
원서비도 낼 돈이 없는데 대학교 등록금 낼 돈이 있을리가. 인서울을 포기하고 등록금이 싼,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지거국으로 갔다. 당당히 면접까지 합격하고 예비합격없이 한 번에 붙었을때 정말 너무 기뻐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인서울 못 간거 아쉬웠지만 그래도 장학금까지 나와 나쁘지 않았다. 지금이야 국가장학금이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그 당시엔 그런게 없었거든. 만약 내가 대학교 입학 전에 있었다면 그나마 더 좋은학벌로 남지 않았을까 아쉽긴하다
2011년, 스무살.
본격적인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생활비가 없어 입학하자마자 야간아르바이트와 학교생활을 병행해야만 했다. 2011년 기준 최저시급이 4320원이었는데, 야간으로 일하면 6480원으로 쳐 줬다. 그렇게 돈을 벌지 않으면 내 생활이 안되는걸. 스무살의 난 대체 어떻게 버틴걸까.
옷 살돈이 없어서 검은색바지 하나로 1년을 버텼고
화장품 살 돈이 없어서 그냥 화장을 하지 않고 다녔다.
가난이라는 것 때문에 난 30대인 지금도 나 자신을
꾸미는 법을 모른다. 아니, 관심이 안 생기는거 같다
그리고 알았지. 여자인 친구들사이에서 비밀리에
내 옷과 화장에 대해 말이 오갔다는걸.
가난하다는 말을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땐
조금이라도 자존심이라는게 있었나봐
2012년,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12학번 신입생들이 들어오니 과행사를 빠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학교 근로를 신청하고 아르바이트 대신 전액근로 학생으로 다녔다. 덕분에 등록금 0원이라 한시름 놓았던 기억이 난다.
매일 알바를 하는 나에게, 다른 선배들이 나한테 지금은 부모님한테 도와달라고 하고 너는 학교생활하면 안되냐고
그렇게 묻던거 아직도 난 기억난다. 그 당시엔 별 생각없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거 보면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흐느낀거겠지. 그때가 2012년도 였는데.
벌써, 10년이나 지났네
그리고 2014년 4학년이 될 때, 졸업작품을 만들면서 친구들이랑 트러블이 생겼다. 아마 그 동안 나와 있으면서 속상했던 것들이 터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사람과의 인연을 정리한 시간을 가졌고 내 감정이 이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너무 속상해서 참으로 많이 울었더랬다.
내가 생각이 느려서, 눈치도 없어서 알게모르게 상처를 너에게 줬구나. 미안해 이 말 한마디가 지금도 입안에서 뱉지못한 채 맴돈다.
지금 8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 애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빠르게 취업을 하고 싶었던 난, 그냥 주거지와 가까운 곳으로 일하러 갔다. 월급은 정말 딱 최저시급(2015년 당시 5580원)인 116만원보다 조금 위로 받았다. 그리고 다닌지 두 달도 안돼서 대표이사님이 사기꾼으로 잡혀가고 난 다시 취준생이 되었고 .. 당장 돈이 급했던 난 2조 2교대인 생산직으로 취업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와 다르게 안정적으로 돈을 버니 내 생활은 조금씩 나아졌다. 학자금 대출도 조금씩 갚고 있는 중이었고 이제 생리대도 맘껏 살 수 있었다. 가끔은 기숙사에서 같이 사는 룸메이트에게 내가 술도 사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한지 7개월만에 난 모든 학자금대출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 날은 정말 대학교합격 이후로 가장 기분 좋았던 날이기도 했다. 족쇄가 하나 풀어진 기분이었거든.
그러다가, 공장을 옮겨서 이직을 했는데 그 공장이 남초였다. 한창 잘 다니던 중 난 재단가위에 살점이 떨어져나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 남초였던 그 회사는 나에게 산재가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인사팀이었던 최대리는 병원에 입원한 나에게 자진퇴사를 요구했다. 내가 쉬는 동안 인건비는 인건비대로 나가고 사람은 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정규직이 안되고 나보다 일을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잘 못하는 남자후임이 되었다. 그때가 2018년도 3월의 어느 날, 내가 27살의 봄을 맞이할때 벌어진 일이었다.
나중에 그 회사는 팀장급인 사람(남자/정규직)가 다른 여직원(비정규직) 성희롱을 했었으며 미투가 한창이었던 그 시기에 터졌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정규직이 됐던 남자후임은 도망가고 인사팀인 최대리와 차장님이 혹시 정규직으로 전환해줄테 다시 재입사 할 생각 없냐고 조심스레 물어보기도 했다.
퇴사를 한 후, 그 동안 모은 돈을 보니 2천만원정도 있었다.그리고 난 모아놓았던 그 돈으로 다시 전공공부를 시작했다. 생산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고 싶었던게 더 컸다. 공장에서 일하지만 사람사는 건 다 똑같다고, 직업의 귀천은 중요하지 않고 월급의 액수만이 귀천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난 무시받지 않은 삶을 살고싶었고 사람답게 일하는 대우를 받고 싶었기에 처음으로 돈의액수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무직으로 갈 생각한건 좋은데 그동안 몇년 간 공장에서 일했던 27살인 내가 어떠한 스펙을 가지고 있을리가. 가지고 있는거라고는 지거국 대학교 졸업장이 다였는데. 하지만 포기하는건 이르다고, 지금 그 시간에 공부만 하자 이 생각에 오로지 묵묵히 공부만했다. 오랜만에 펜을 잡고 종이를 보니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할만했다. 그렇게 난 10개월간 기사2개, 운전면허증, 기사필기 하나, 한국사1급을 땄다.
2019년 초반까지 이 모든걸 다 하고나니 사실 이제 놀고싶었나보다.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그만 나도 쉬고싶었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 2019년도 부터는 나중에 천천히 이어서 쓰자
와... 내 인생사를 돌아보며 쓰다보니 할말이 많네
나중에 이어서 써야겠다
이거 되돌아가면서 앞으로 잘 되면 내가 이랬던적이 있었지
하려고 미래를 위한 추억용임.
30대인 지금 난 40대 안에 꼭 행복해질거야!!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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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누워있을때가 제일 행복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5.20 국가장학금 12학번부터 생김!! 정확하게는 2011년도에 수능친 수험생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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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누워있을때가 제일 행복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5.20 christmas 아하 여시 말이 맞구나
처음 생긴건 2008년도가 맞아 근데 명칭이 달랐대 아마 명칭 다르면서부터 개편된게 아닐까 싶은...? -
답댓글 작성자차칸강쥐 작성시간 24.05.20 있긴있었는데 제한이 많았던걸로 기억해! 나도 11학번인데 국장 제대로 받은건 12부터였나? 그랫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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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누워있을때가 제일 행복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5.20 예전 쩌리에 있던거 끌올 한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