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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스노우볼의 근원 원균....
칠천량해전에 참전했던 사도첨사 김완의 증언에 따르면
칠천량해전 당시에도 원균은 술에 취해 있었으며
왜군 함대의 공격을 받고 지원을 요청하는 김완에게
"뭐하러 그리 열심히 싸우냐?" 라고 비웃음을 날리며
김완과 부하들이 총알받이하는 사이 그대로 도망갔다고
홀로 포위공격 당하던 김완은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체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압송 됐다가 탈출해온다
이후 다시 벼슬을 받았지만 원균의 극렬안티가 되어 활동하다
원균을 옹호하던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고 귀양까지 가게된다...
(물론 그런다고 안티짓은 안 멈췄으며 평생깠고 , 해소실기라는 기록물로까지 남김-)
1597년 정유년 7월 15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참패를 당하며 붕괴합니다.
이로서 조선의 서해 해상방어선은 그대로 소멸해 버리게 되었고
원래 히데요시가 계획했던 수륙병진정책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전라도의 방패역할을 하던 조선수군이 전멸하자 조선조정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원래 수군의 해상보급로차단을 전제로 했던
지금까지의 방어전략이 무용지물이 되버렸기 때문이었죠.
수군이 사라지면서 왜군은 육상보급에 목메지 않게 되었고.
경상도 북부에 주둔하던 명군과 김응서와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은
뒤에 남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왜군에게 발목을 잡혀 전라도 구원이 힘들게 됩니다.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던 대부분의 산성들 역시
함락 시켜도 되고 안 시켜도 되는 수준으로 전략적 가치가 크게 떨어져버리게 되었구요.
이제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 앞에는 지방관들이 자체적으로 이끄는 소규모 부대들 밖에 남지 않게 되어 버렸죠.
선조 30년(1597년) 음력 7월 22일
선조 :혹시 남은 전함들은 없는가? 어찌 남해를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어찌 아무도 대답이 없는가? 영의정! 왜 말이 없는가?”
류성룡 :너무 갑작스럽게 수군이 모두 전멸해버려 저도 갑자기 방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선조 :왜 출진하라고 그리 난리를 쳐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냐는 말이다!
명나라 군사들이 우리나라 수군만 믿는다고 했는데 수군이 이 사단이 났으니 그들이 본국으로 후퇴한다고 하면 대체 어찌 할 테인가?
이항복 :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경솔히 본국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 : 하...이 일이 어찌 사람의 잘못이겠는가? 하늘의 뜻이니 어찌 하겠는가?
그리고 전라도를 지키던 수군이 모두 전멸했으니 왜적은 전라도로 맘 놓고 들어올 것이다.
전라도의 명나라군 이래봐야 도독 마귀의 1만 명과 부총병 양원의 3000명 뿐이니 어찌 왜의 대군을 막겠는가?
전라도는 이제 완전히 길에 떨어진 돈다발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 하삼도(전라, 경상, 충청)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이니
일단 남은 수군들은 남해를 포기하고 모두 서해로 이동시켜 서해를 지키는게 어떤가?
류성룡 :남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남은 수군은 남해와 진도를 끝까지 지키다가 정 버티기 힘들면 그때 서해로 후퇴해도 늦지 않습니다!
선조는 자신이 왜군과 싸우지 않고 남해의 요새지들을 지키기만 한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삭탈관직하고 원균을 임명했던 과거는 잊고
왜 싸웠냐고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었고 최악의 경우 하삼도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찬스를 맞게된 왜군이 가만히 있을리 없죠
왜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군대를 두개로 나눈 후 전라도방면으로의 총공격을 지시합니다.
우군 총대장 : 모리 히데모토
지휘관 :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초소카베 모토치카
병력 : 6만 4천
작전계획에 따른 진격로 : 양산->밀양->창녕->합천->안의->진안->전주
좌군 총대장 : 우키타 히데이에
지휘관 :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 고니시 유키나가등
병력 : 5만
작전계획에 따른 진격로 : 고성->사천->하동->구례->남원->전주
수군총대장 : 도도 다카토라
지휘관 :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이케다 히데우시, 구루지마 미치후사
병력 : 7천2백
작전계획에 따른 진격로 : 해안을 통해 항해하다가 하동에서 상륙하여 좌군에 합류
경상도 방어담당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병력 : 2만
이제 임진왜란의 2라운드격인 정유재란의 막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8월 초
전라도를 향해 진격을 시작한 왜군 좌, 우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순조로이 계획대로 이동합니다.
사실 진격로 상에 있던 경상좌도의 각 산성들에는 조선군들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모두 산성별로 흩어져 있어서 산성 하나하나에 주둔하는 숫자는 많지 않았던 관계로
10만에 달하는 왜군에 감히 성에서 나와 덤빌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었고
왜군이 전라도로 향하는 걸 산성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좌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구례에 도착했고 구례현감 이원춘은 수백의 병사로는
10만 대군을 막을 수 없다며 병력을 이끌고 교통의 요지인 석주관으로 후퇴하여
이후 몇몇 의병들과 연합하여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남원성 전투 이후 왜군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압도적인 전력 차에 패하여 6인의 의병장,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한편 손쉽게 구례를 점령한 왜군은 약탈과 방화, 학살과 겁탈을 일삼았습니다.
8월 4일
너나 할것 없이 남에게 뒤질새라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
이것저것 죽은 자의 재물을 먼저 탈취하려고 벌떼처럼 몰려들어 떠들썩한 모습이여
8월 6일
들판도 산도 전부 불태웠으며 죄없는 사람을 마구 죽였다.
나는 부모를 찾는 아이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비참함은 꼭 지옥의 거리와도 같았다
8월 8일
조선인 아이를 왜군이 잡아가자
놓아 달라고 애원하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니 다시는 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귀신이 덥쳐오는 것처럼 공포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다
왜군소속의 의승 케이넨이 쓴 "조선일일기"중에서
현재 남아있는 남원성의 모습, 딱봐도 수비하기 별로라는게 보인다..
한편 왜군이 향하는 전라도의 중심 지역이던 남원성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성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죠.
원래 고려시대 때부터 남원에는 조창이 있었기에
도적 때 수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리 튼튼하지 못한 성이었습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도 평야 한가운데 지어진 성이라 사방에서 공격하기 딱 안성맞춤인 허술한 성이었습니다.
명나라군의 지휘를 맡은 부총병 양원은 서둘러 성에 화포를 장치하기 위한 개조를 행하며
남원부사 임현, 접반사 정기원과 토의에 나섭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게 남원성, 녹색으로 표시된게 교룡산성.
선조 30년(1597) 음력 7월 말
명나라 부총병 양원 : 첩자의 연락에 의하면 빠르면 8월 4일쯤 왜군이 남원성에 도착할 거라고 하기에
마귀 도독에게 내가 병사를 청해 놓았다.
임현 정기원 : 남원성의 백성들은 장군님만 믿고 있습니다.
양원 : 내가 있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임현,정기원: 그런데 이곳 남원성은 방어에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군대는 여기를 지키고 성이 없는 주변고을 백성들은 교룡산성으로 피난 보내는 게 좋을듯합니다.
교룡산성은 천혜의 요충지라 방어에도 좋고 먼저 차지하지 않으면 왜군이 차지할겁니다.
또한 비상시에는 그곳으로 후퇴 할 수도 있습니다.
양원 :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생각이냐?
내가 듣자하니 칠천량에서 너희가 깨질 때 한척의 배만 끝까지 싸웠고 나머지는 도망치기 바빳다고 하더군.
왜군들조차도 조선수군을 자기네가 무찌른 게 아니고 조선수군 스스로 패망했다고 비웃더구나?
너희 조선 사람들은 겁이 많고 흐리멍덩하니 왜군이 보이면 그대로 다 도망 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도주로를 만들어 둔다고?
원래 너희 조선인들 같이 겁이 많은 자들은 살길이 보이지 않아야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내가 교룡산성을 아예 불태워 도망갈 생각을 못하게 하겠다.
임현,정기원 :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부총병만 믿고 있으니 정말 부탁드립니다.
이 토의로 남원성과 남원부 백성들의 운명은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종사관 이광정은
"교룡산성을 지키라 하면 목숨을 걸고 지키겠으나 남원성에서 버티는 건 자살행위가 아닌가!"
라면서 아예 성을 떠나버렸고 그를 따르는 일부 남원부민들은 피난을 떠났습니다.
이중에는 남원부의 서기를 보던 서생 조경남도 섞여 있었죠.
양원이 왜 교룡산성으로 옮기는 걸 반대했을까요?
비록 명나라군 3천중에 기병이 1200명이라 평야가 싸우기 좋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일때 이야기고 남원성으로 향하는 왜군은 5만 7천에 달하는 대군인데 말이죠?
이때 조정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선조 30년(1597) 음력 8월 7일, 8일
사간원 : 이제 적이 전라도에 들어왔을 뿐인데 전하께서는 어찌 벌써 피난준비를 하십니까?
지금 백성들이 불안감에 휩쌓여 민심이 흔들리고 있는 판에 왕실이 피난준비라니요!!
왕실의 피난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백성들이 폭발 직전입니다!!
선조: 지금 신하들 가족도 모두 피난가고 있는 판에 왜 나는 가면 안 돼는 것인가??
이게 충성인가?
비변사: 일부 관리들의 가족이 피난 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전하마저 그러시면 백성들의 화난 민심은 누가 잠재우겠습니까?
선조 : 나한테 피난가지 말라느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가족들 피난 보낸 신하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라.
왕인 나는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그대들은 마음대로 하는구나.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8월 11일
왜 좌군의 정찰대가 남원인근에 나타납니다.
이미 남원성의 명나라 부총병 양원과 남원부사 임현은 각각 명군과 조선조정에 구원요청을 했었습니다만
전주에 주둔하던 명나라 유격 진우충은 구원요청에 말로만 알겠다고 하고 움직일 기미가 안보였고
조선조정은 일단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태에게 구원명령을 내리고
중앙에서도 별도로 구원군을 보내려 합니다만...
구원명령에 응한 것은 이복남 하나였고
오응태는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병력파악조차 안된다며 거절합니다.
게다가 구원이랍시고 보낸 중앙군은 군기시 소속의 파진군 12명에 불과했습니다..
참고로 군기시의 파진군은 화포나 조총을 다루는 스페셜리스트들로서
지금으로 치면 중화기반 정도의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조정은 사실상 남원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은 터덜터덜 남원성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당시 웅치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쳐 전쟁초반 전라도를 지켜낸 장수중 하나였죠.
광양을 수비하고 있다가 왜군의 전라도 진입 소식에 조창들을 불태우며
청야작전에 나서고 있던 이복남 역시 남원성 구원명령이 자살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걸 알았습니다
남원성 구원을 위해
즉 죽으러 간다는 소식이 퍼지자 병사들은 탈영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천에 달하던 이복남군은 50여명으로 쪼그라들어 버립니다.
그러자 이복남은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은 많고 지원은 없으니 남원성의 함락은 기정사실이다.
나는 나라의 무거운 은혜를 입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안 갈 수는 없다.
그 많은 적을 당해내기란 마치 용광로 속에 깃털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아서,
형편상 요행이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남자로서 나라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신명을 바치는 데 있어 죽음을 사양할 수 없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러나 제군들까지 부질없이 함께 죽을 필요는 없다.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라.“
이에 감동한 부하들이 외쳤습니다.
“저희는 오직 장군님과 함께 죽고 싶습니다!”
그렇게 얼마 안되는 부하들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향하던 그는
다행히도 조방장 김경로, 순천부사 오응정, 교룡산성별장 신호 가 이끄는 1천명의 병력을 만나 합류합니다.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남원을 구원하러 가느라 눈앞이 깜깜하던 이복남은 너무나 반가워합니다.
8월 12일
이복남과 김경로, 신호가 이끄는 1000명 남짓의 병력은 남원성 외곽에 도착했습니다만
이미 6만에 가까운 왜군은 남원성을 포위하고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 이었습니다.
겨우 1000명으로는 도저히 포위망을 뚫고 성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죠.
겁먹은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이복남이 소리쳤습니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날이 바로 오늘이거늘 죽는 것을 겁내고 패할 것을 걱정하느냐!”
라면서....1000명을 평소 행진하듯이 대열을 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길잡이가 앞에 나서서
"물렀거라~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나으리 행차시다"
를 외치며 남원성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으로 보였지만 그 모습에 놀란 왜장은 조선인 포로들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저자는 대체 누구냐?”
“저분은 전라병마절도사이신 이복남 나으리십니다..
“한줌도 안 되는 병력으로 죽을 곳를 찾아가는 저 자는 진정한 용사로다."
그렇게 이복남은 좌우에서 왜군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왜군진영을 유유히 통과하여 남원성에 입성했습니다.
이복남군이 입성한 직후 왜군은 공격준비가 끝났고 이제 남원성의 혈전은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남원성전투당시 실제 사용되었던 왜군의 작전지도
1597년 음력 8월 13일 아침,
56000에 달하는 왜군은 남원성에대해 공격을 개시합니다.
북문은 시마즈 요시히로,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맡았습니다.
이때 성을 수비하는 병력은 4300정도였고 명나라군 3000과 조선군 1300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복남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군은 북문수비를 맡았고
명나라 부총병 양원과 중군 이신방은 동문을 모승선이 서문을 천총 장표는 남문을 맡아서 수비했습니다.
공격이 시작되고 6만 가까운 왜군이 성으로 몰려드는 모습을 가까운 산에 피난가있다가 목격한 조경남은 일기에 적기를
"왜병이 성을 100겹으로 둘러싸고 쳐들어가는데 산이 가득차고 들을 뒤덮어 마치 물이 밀려드는 듯 했다"
라고 적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쓰나미가 밀려드는 것 같이 보였던 걸까요?
먼저 왜군은 쳐들어올려는듯 말려는듯 조선군 조총과 활의 사거리 밖에서 달려들었다 물러났다를 반복했습니다.
이에 수비군은 포를 쏘며 대응하면서 화약과 화살을 아끼라고 명령합니다.
오시(오전 11시~오후1시)경 왜군 5명이 성문 가까이 접근해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수비군은 그들이 조총 사거리 안까지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파진군소속 조총수 김익룡, 정금, 양득이 저격하였고 왜군 5명중 3명이 즉사했습니다.
미시(오후1시~오후3시)경 왜군이 조총대를 앞세워 성벽위의 수비군에게 집중사격을 해대면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비격진천뢰를 쏴서 성벽에서 백보거리까지 접근했던 조총대를 한방에 날려버렸고
비격진천뢰 공격에 수많은 사상자가 난 왜군은 일단 물러납니다.
첫날 왜군의 탐색전은 이 정도로 끝났고 첫날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수비군의 사기는 매우 올라있었습니다.
이 날 새벽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슬그머니 성벽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다시 성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직후 그의 뒤를 쫓아온 왜군들이 성벽까지 접근하여 성벽에 불을 지르는등 밤새 시위를 했습니다.
어디갔다 왔느냐는 물음에 양원은
"낮에 공격이 너무 뻔히 보여서 필시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밤에 야습해올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병사 몇을 데리고 나가서 적을 기다렸는데 마침 왜병 몇이 성밑에 뿌려둔 마름쇠를 치우는게 보여서 베고 왔소"
라고 답했습니다..
총대장이 직접 병사 몇명만 데리고 적의 야습을 막으러 나간다?
성 밑까지 와서 몰래 마름쇠를 치우던 왜병 몇 명 베었을 뿐인데 적들이 저렇게 쫓아와 시위를 해댄다?
사실 병사 몇 명만 데리고 야밤에 도망가려 했다는 해석이 맞을 겁니다.
도망치려 나갔다가 왜군에게 들킨 거겠죠.
아마 교룡산성이 수비하기 더 좋은 게 명백한데도 포기한건 도망치기 더 어렵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 펼쳐질 양원이 보여줄 도주시도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1597년 8월 14일 아침
왜군은 전술을 바꿨습니다
동문 앞에 참호를 메우고 주변 인가에서 때온 자재들을 이용하여 흙담을 쌓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렇게 성벽보다 높게 담을 쌀은후 그 위에 올라가 조총사격을 가해대기 시작합니다,
또한 대규모의 조총대를 동원하여 엄청난 규모의 제압사격을 가하며 돌격하여 총공격을 가합니다.
이에 동문을 지키던 명나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왜군이 오기 며칠 전 남원을 빠져나간 조경남은 인근 산속에서 본 이 전투를 일기에 묘사하기를
"왜병이 일시에 고함을 치며 총을 쏴대며 돌격하니 총소리가 우레 소리와 같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라고 적었습니다
서문은 왜군은 인근 사찰의 사천왕상을 수레에 실고와서 서문주변을 돌며 시위했습니다.
이렇게 일방적인 공격을 받던 도중 양원은 또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댑니다..
“지금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니 저놈들이 더 기고만장 한 거요.
내가 기병을 이끌고 나가 쓸어버리리다.“
하지만 명나라 중군 이신방이 만류하죠.
“그런 위험한 전투를 벌이니 차라리 구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게 더 낫습니다.”
하지만 양원은 들은 척도 안하고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출진했고 그걸 본 왜군은 물러나가 시작합니다.
기세등등해진 양원은 쭉 돌격해 나갔지만 사실은 왜군의 함정이었고
무인지경으로 달려 나가던 양원의 기병대는 곧 매복에 걸려 조총부대에게 집중사격을 받게 됩니다.
어쩔수 없이 양원은 기병 수십 기를 잃은 체 아무 성과 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아무 전과 없이 인명피해만 입고 성안의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뜨렸습니다.
8월 15일
아침이 밝자 마자 양원은 뿔피리를 불어댑니다.
이에 왜군 측에서 병사 몇이 달려 나와 무릎을 꿇고 "전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자
양원은 그들에게 뭐라고 한후 명나라 병사 몇을 왜군 측에 보내 뭔가를 협상했으며
곧 그들은 왜군의 사자와 함께 돌아옵니다.
“어서 성을 비워주십시오.”
“내가 말이야 15살 때 전쟁에 처음 나왔는데 말이지 이후로 진 적이 없단 말이야?
게다가 지금 성안에 10만 대군이 있는데 내가 왜 성을 비워 줘야하지?“
양원의 허풍에 왜군 사자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지금 성안에 병사가 천명 남짓 밖에 안남은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인
그런데 그쪽이 10만 대군이면 우린 100만 대군입니까??
조선에 무슨 은혜 입은 것도 아니면서 괜히 후회할 일 하지 말고 그냥 성을 비워 주시죠?“
양원은 눈치를 보다가 조선인들을 모두 천막에서 내보내고 왜군사자와 둘이만 이야기를 했으며 왜군 사자는 곧 돌아갔습니다.
양원이 뭔가 조선 사람들은 모를 그런 협상을 한 직후 왜군은 바로 공세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왜군도 전력을 기울여 총공세를 펼쳤고
아침부터 새벽까지 남원성의 병사들은 먹을 틈도 잠잘 틈도 없이 싸워야만 했습니다.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하늘을 메우고 남원성에는 화광이 충천하여 밤에도 낮과 같이 훤했으며
공포에 질린 백성들은 동분서주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조경남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외로운 성을 바라보니 왜병은 성을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공격했다.
포성은 하늘에 진동했고 성 주변은 불길에 밤에도 대낮같이 밝았다.
내 손에 군대만 있었어도 목숨을 걸고 나가 싸워 그들을 구하려 할 것인데
너무나 무력한 나의 모습에 눈물이 났고 다른 이들도 성을 바라보며 그저 눈물을 흘렸다"
15일 낮에 시작된 전투는 16일 새벽까지 진행 되었습니다
16일 새벽부터 남원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왜군의 공세는 더욱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동이 터올 때 쯤 명나라 천총 장표가 전사하고 그가 지키던 남문이 무너졌습니다.
왜군은 남문으로 봇물 터지듯 몰려들었고
다른 문을 방어하던 명나라군과 북문을 방어하던 조선군이 막기 위해 달려갔지만
이미 왜군이 장악한 남문을 봉쇄하는 건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때 왜군은 양원에게 탈출하라고 전해줬고 양원은 부하 50명과 접반사 정기원을 데리고 동문을 통해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왜군과 양원이 도망칠 길을 열어주기로 조선 측 몰래 협상하는 걸 보고
양원의 비겁함을 부끄러워하던 양원의 부하 중군 이신방은 도망치라는 양원의 명령을 받자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저는 장수로서 제가 지키지 못한 이 성의 조선 백성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습니다. 부총병이나 잘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그 시각 양원이 보낸 명나라 군관이 이복남에게도 찾아왔습니다.
“부총병께서 절도사께서도 동문으로 탈출하라 하셨습니다. 왜군이 그쪽으로 도망치면 놔준다 약조했다 합니다.”
하지만 이복남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이 성과 생사를 같이 할 것이다. 장수된 몸으로 어찌 한낮 삶을 탐내겠는가?”
한편 양원이 명나라군과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을 본 백성들은 울부짓으며
조선군이 지키던 북문을 향해 몰려갔고
새벽이후로 왜군이 자취를 감춘 북문의 조선군들은 백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성문을 열어줬습니다.
잠시후 이복남의 몸종 역시 남원에 있던 이복남의 7살 난 셋째아들 이경보를 데리고 이복남을 찾아 왔습니다
“나으리 이제 이 성은 틀렸습니다. 도련님과 함께 탈출하시지요.”
“나는 오늘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것이다. 너희들이나 탈출하도록 하여라.”
남원성 전투 기록화
떠나가는 아들과 몸종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돌아선 이복남은 남아있는 조선군을 수습하고
식량창고에 불을 질러 왜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한 후
주변에 장작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북문으로 몰려오는 왜군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조선군이 성문을 열고 백성들을 탈출시키는 것을 본 명나라 기병대는
자신들도 탈출하기 위해 일제히 북문으로 달려갔고
역시 탈출하려 몰려드는 조선백성들을 짓밟으며 북문을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북문을 통해 이경보와 함께 탈출하던 몸종은 여기에 휘말려 이경보를 놓쳐버리고 말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인 대혼란의 와중에서 이경보를 다시 찾는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왜군이 북문을 비워둔 것은 사실 함정이었습니다.
앞서 달려 나가던 명나라 기병대는 곧 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왜군 복병에게 포위당했고
전의를 상실한체 말에서 내려 목숨을 구걸하다가 모두 살해 당했습니다.
또한 북문으로 탈출하던 대부분의 백성들도 왜군의 복병들에게 목숨을 잃었고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복남은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별장 신호와 함께 북문으로 향하는 왜군에 맞서 싸웠는데
신호는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뽑아들고 왜군무리에 뛰어들어 싸우다 최후를 맞았으며
주위의 모든 조선군이 사라지고 왜군들뿐인 상황에 이르자
이복남은 쌓아둔 장작 중에서 불붙은 장작을 골라들고 화약고로 걸어 들어갔고
잠시 후 남원성에서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 남원성 전투에서 명나라군 장수 이신방, 장표, 모승선이 전사했고
조선군장수 이복남, 김경로, 신호, 임현, 이덕회 등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접반사 정기원은 양원과 함께 탈출했으나 중간에 실종되었는데
양원의 말로는 말에 익숙하지 못해 자꾸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양에서 파견된 군기시 파진군 12인중
유일하게 남원성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생존자 김효의가 한양으로 살아 돌아와
영의정 류성룡에게 남원성 전투의 전말을 보고하면서 남원성의 이야기가 전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수비군이 전멸하고 저항이 잦아들자 왜군은 "할당량"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남아있는 백성들을 학살하고 코를 베어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남원성에서 수집하여 일본으로 보내진 코는 총 3726개 였습니다.
교토시에 남아있는 코무덤
8월 16일
성안의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 버렸다.
살아있는 동물이란 하나도 없다.
비참할 뿐이다.
인간이란 모두 죽어 엎드려 있을 뿐이다.
왜군소속의 의승 케이넨이 쓴 조선일일기의 남원성 함락 당시 기록
나에게 달려드는 조선병사 두 명을 죽였다
오늘은 8월 15일, 고향신사의 제삿날로 생각되었다.
피묻은 칼을 내던지고 피로 붉게 물든 손을 합장했다.
멀리 일본을 향해 절을 하고 조선인의 코를 잘라 갑옷 주머니에 넣었다
전체 목의 수 3,726개.
판관이나 대장은 머리를 그 외는 모두 코를 잘라서 소금석회 항아리에 채워넣었다
.
왜장 오코치 히데모토 "조선물어" 중에서
그리고 이복남의 아들 이경보는 수풀속에 숨어 있다가
며칠후 왜군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경보가 잡혀온 것을 본 조선인 포로들은 이경보를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렸고
그 모습을 본 왜군은 그 아이가 누군지 물었습니다.
"저 분이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나리의 아드님이 십니다"
그 보고는 곧 왜 우군의 총대장이던 모리 히데모토에게 올라갔습니다.
“그 아이가 그 용감무쌍한 조선 병마절도사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 아이를 본국으로 보내라! 호랑이의 자식이 개 일리는 없는 법, 내가 그 아이를 돌보겠노라.“
그렇게 이경보는 아버지의 원수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남원성이 함락되는 것을 인근 산위에서 지켜본 조경남은
왜군이 곧 주위를 수색할 것이란 생각에 불안에 떨며 가족들을 데리고 더 멀리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
남원성 함락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직후 선조가 명나라군의 명복을 비는 제를 지내는 등 분주한 사이
정작 이복남의 가족은 함경도에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굶주림을 못이긴 가족은 조정에 도움을 요청했고
비변사에서 충신의 가족들을 구호해야한다고 보고하자
선조는 "전례에 따르라"는 말만을 남깁니다.
왜군은 남원을 함락시킨데 이어 전주를 거쳐 북상 하여 직산에 도달하는데
9월 7일
직산에서 해생이 이끄는 4000의 명나라 기병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5000의 왜군이 격돌합니다.
이 전투에서 명군이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왜군측은 일단 항구로 이동해 보급을 받은후 다시 치고 올라가기로 합니다만
9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된지 정확히 1달후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겨우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왜군함대를 격파합니다.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죽은 형 구루지마 미치유키에 이어
이 전투에서 선봉을 맡은 그의 동생인 왜장 구루지마 미치후사도 목이 베여 메 달렸고
이로서 일본에서 해적가문으로 이름을 떨치던 구루지마의 직계가문은 멸문했습니다.
또한 히데요시가 조선수군의 최후를 직접보고 보고하라고 보낸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타고 있던 배가 격침되면서 물에 빠졋다가 겨우 구출되었으며
최후방에 있던 수군 총대장 도도 다카토라마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을 정도의 대패였습니다.
이렇게 서해의 해상보급로가 이순신에 의해 다시 차단되자 왜육군은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해안지역에 왜성을 쌓고 종전때까지 더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한체 방어에 전념 하게 되었습니다
남원성 함락 36일후인 1597년 9월 22일
의병장 조경남 장군의 난중잡록
남원에서 도망쳤던 서생 조경남은 친구 한명과 종 2명을 데리고 의병을 일으켜
정유재란 최초의 의병장이 되었으며 불우치, 활개미고개, 금산, 함양 전투 등에서 왜군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하여
이후 대규모의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후 벼슬을 재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은거생활하며 자신의 일기를 모은 "난중잡록"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남원성 함락 약 3개월 후인 11월 8일
남원성에서 도망친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패전의 죄를 물어 참수당했으며 그 수급은 남대문에 걸려 효수되었습니다.
또한 남원 구원명령에 응하지 않은 유격 진우충은 파면당합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조선군,명군,남원백성 1만여명의 시신을 수습해 합장했으며 이곳을 만인의총 이라고 불렀고
광해군 4년(1612년) 충렬사를 지어 이들을 기렸습니다.
전후 전라병사 이복남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711년(조선 숙종 37년) 6월 16일 그에게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이후 일제는 충렬사와 만인의총의 제단을 파괴하고 제사를 금지하며
사원의 재산을 압류하고 묘소를 폐탄 야적장으로 사용하는 등
탄압하고 흔적을 지워버리려 했으나 광복후 제사를 다시 지내고 정화사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원성 함락에서 385년이 지난 후인 1982년
자신의 성씨가 리노이에(李家)라는 이상한 성씨인데 의문을 가진
전 아사히신문 국장이자 역사학자 겸 문학가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씨는 자신의 가계를 추적한 끝에
자신이 정유재란 당시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로 남원에서 잡혀 일본에 끌려온 이경보의 후손으로
경주(우계) 이씨 30대손, 이복남으로부터 13대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조사결과 이경보는 일본에 끌려가 리노이에(李家)라는 성으로 살았는데
모리 히데모토의 가신으로 사랑받아 모리 히데모토가 자신의 이름의 모토(元) 글자와 500석의 봉록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경보는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 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계를 알게된 마사후미씨는 가족을 대동하고 우계 이씨 사당과 만인총을 참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리노이에(李家)씨는 경주(우계) 이씨의 해외분파인 장주 이씨로 인정 받고 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二載登臨寒上樓 / 두 해에 걸쳐 광한루 위에 올라
故園歸夢大刀頭 / 머리맡에 큰 칼 두고 귀향을 꿈꾼다.
裳聞四海徵兵急 / 전국에 들리는 급한 징병 소식
已道三京指日收 / 이미 3경이 왜병의 수중에 있다고 하네.
末路知心黃石在 / 최후까지 황석의 병법 마음에 두었으매
暮年歸計赤松遊 / 노년에나 돌아가 신선놀음 하리라
白雲天末無消息 / 하늘 끝 흰 구름은 소식조차 없으니
傳世靑氈底處求 / 세상에 전하는 명예는 죽어서나 얻을까.
-이복남의 시(현재 남원 광한루 완월정 현판에 전해짐)
출처 : 조선왕조실록, 국조인물고, 징비록, 난중잡록, 성소부부고, 조선일일기, 조선물어 등등
PS
양원이 남원성 서문을 공략하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밀약을 맺어
성을 비워주는 대신 자신의 죽음만은 면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는데
유성룡이 “왜적들이 양원인 줄 알면서 짐짓 달아나게 했다”는 기록을 ‘징비록’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명나라 조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양원를 참수한 뒤 머리를 조선측에 건내어 조리돌림하게 했습니다..
지원 명령에 응하지 않았던 진우충은 파면되고 "입공자효"
즉 공을 세워 만회하라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사실 조선 조정은 양원보다 진우충을 더 미워하고 양원보다 더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왜냐면 양원은 최소한 싸우기는 했지만 진우충은 아예 지원 명령을 쌩까고 모른 척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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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의 왜군 공식 사상자 기록을 보면 전투의 치열함에 비해 너무 적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이묘들이 축소 보고한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실제로 왜군 부상자들을 돌보던 의승 케이넨의 기록에 따르면
남원성 전투에서 나온 왜군 부상자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고 적혀 있거든요
당시 의학 수준상 부상자중 상당수가 감염으로 죽었다고 봐야하기도 하고
그리고 실록에 적힌 직산 전투 직후 포로로 잡힌 하급 사무라이의 심문기록에서도
구로다 나가마사가 책임추궁을 두려워해
직산 전투에서의 피해를 상부에 축소 보고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는 걸 볼 때
남원성에서도 피해 축소 보고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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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분들이 소설 같다고 볼만한 부분들이 있는데 실제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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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격문을 받고는 곧 떠나면서 군리(軍吏)를 불러 군사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적은 많고 응원은 끊어졌으니, 성의 함락은 기정사실이다.
나는 나라의 중은(重恩)을 입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안 갈 수는 없다.
이제 수천 명의 군사로 그 많은 적을 당해내기란 마치 큰 용광로에 기러기 털[鴻毛]을 사르기와 같아,
형편 상 요행이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장부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명을 바치는 데 있어 죽음을 사양할 수 없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러나 제군(諸君)은 부질 없이 함께 죽을 것은 없다.
가고 싶은 자는 가도 되나, 남고 싶은 자는 머물러 있거라.”
하자, 장사(將士)들이 모두 울면서,
“공을 따라 죽고 싶습니다.”
하였다.
~중략~
양원(楊元)이 부하를 시켜 함께 도망치자고 권유하자, 공이 칼을 만지면서 꾸짖기를,
“나는 맹세코 이 성과 생사를 같이 할 것이다. 어찌 한갓 삶을 탐내겠는가?”
하니, 곁에서 모두 감히 권하지 못했다.
-성소부부고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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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을 지키던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여 자결했고
명나라군 역시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생승선 등이 전사했다.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56권0호 "정유재란시 남원성전투와 만인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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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의 거느린 군사도 또한 거의 다 흩어지고 다만 수하의 편비(褊裨) 50여 명만이 있었다.
남원 서창(西倉)으로 가서 성중으로 향하는데, 김경로가 금성(金城)으로부터 오다가 시전(柹田)에서 이복남을 만났다.
이복남이 기뻐하며 손을 잡고 같이 죽기로 맹세하고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진군하여
비홍령(飛鴻嶺)을 넘어서니 적병이 이미 성 밑에 박두하였다.
이복남이 바라보고 눈을 부릅뜨고 손에 침 뱉고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급난(急難)을 위해 일할 날이 이 날이 아니냐!
국가의 홍은(洪恩)에 보답할 날이 이 날이 아니냐!
병졸은 분발함으로 말미암아 날래지고, 군사는 곧음으로써 씩씩하나니,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어느 겨를에 따지겠느냐?”
하고, 크게 나팔과 호각을 불며 북을 치며 서서히 행군하여 만복사(萬福寺) 앞 대로를 따라 행군하여
남문을 거쳐 조용하게 들어갔다.
외촌(外村)에서 불지르고 노략질하던 적들이 노략질을 멈추고 물러서서 손가락질하면서 구경하고,
성 밑에 있던 적들은 군대를 머물러 움직이지 아니하고 놀라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러 왜적이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힐문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당돌함이 이와 같으냐?” 하므로,
“본도의 병사 이아무개이다.” 하였더니, (왜군 중) 그를 장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난중잡록 제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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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과 이복남은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복남이 죽은 이후 허균이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죠
허균에 따르면 이복남은 평소
악비나 문천상과 같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싸우다 최후를 맞은 인물들의 전기를 볼 때마다
그들의 최후가 적힌 마지막 장의 페이지를 차마 넘기지 못하고 그냥 책을 덮은 체 울었다고 합니다.
허균은 그 기록과 함깨 "그대는 그대가 원하던 방식의 죽음을 맞았구려"라는 글을 남겼죠
(~전략)
힘은 다하고 형세가 기울어져 / 力屈勢傾
마침내 그 성이 무너지니 / 終棄其城
그 누가 그 말을 멈춰 / 孰駐其馬
같이 가자 외칠 것인가 / 呼與俱行
오직 임금과 나라 뿐이니 / 唯君與國
죽음만이 나의 직분이라 / 唯死吾職
성과 함께 죽었으니 / 城與俱亡
나의 맹세 어김 없었네 / 我誓靡忒
불더미를 편안하게 여기니 / 火宅若安
뜨거운 불꽃을 서늘하게 여겼네 / 烈焰其涼
삶은 구차할 뿐이니 / 生則是苟
내 갈 곳은 죽음이라 / 死是吾鄕
아, 죽을 데서 죽었으니 / 嗚呼得死
그대는 뜻을 이루었네 / 公也志成
그 공은 종정에 새겨지고 / 勳在鼎鍾
그 이름은 역사에 빛나리 / 名照簡冊
(후략~)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증 병조판서(贈兵曹判書) 이공(李公)의 뇌사(誄辭)" 중에서
-허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