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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나치 독일의 유대인 제노사이드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4.06.26|조회수2,295 목록 댓글 2

출처:https://www.fmkorea.com/7174053407

 

문명의 한복판에서

 

1933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이 집권한 뒤부터 1945년 히틀러의 자살까지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은 이후에 펼쳐질 제노사이드의 거의 모든 모습을 만화경처럼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3년의 아돌프 히틀러와 돌격대

 

나치 독일은 인종적-민족적 이유에서 유대인과 집시, 폴란드인과 소련인을 학살했고, 종교적인 이유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을 몰살했다.

 

또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사회적 소수인 동성애자들을 살해했고,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정신적-육체적 장애인들을 학살했다.

 

이런 절멸 대상자의 다양함과 함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문명의 중심으로 자처하던 유럽의 한복판에서 엄청난 규모의 제노사이드가 철저하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베토벤과 칸트, 괴테와 실러를 배출한 문화 민족이 문명의 이름으로 저지른 학살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들 속에 있는 무엇이 전대미문의 전쟁을 가능케 했을까?

 

유대인 학살의 배경과 동기

독일인들이 유럽 유대인을 절멸하려고 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첫째로는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집단적 반감을 들 수 있다.

 

독일인, 아니 전유럽인의 반유대 정서는 오랜 역사의 산물이었다.

 

유대인이야말로 '예수를 죽인 살인자들' 이라는 종교적 신념과 생활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거리감은 유대인과 유럽인 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든 중요한 원인이었다.

 

실정법상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유럽인들 생활 속에서 틈새를 찾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교회가 금지하고있던 고리대금업과 경원시되던 상업과 수공업이야말로 유대인이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기회였다.

 

그러나 유대인이 이런 직업에 종사할수록, 그들에 대한 비유대인의 멸시와 증오는 더욱 심해졌다.

 

유대인은 유럽 사회 내에서 점차 필요악 같은 존재로 굳어져갔다

 

이와 같은 반감 차원의 정서가 독일에서 상업과 산업 자본주의가 성장하게 되면서부터는 하나의 부정적 이데올로기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기독교적 선입견이 근대에 와서는 실현적 선입견으로 자리잡게 된것이다.

 

반유대주의 정서는 유럽인의 전통적인 정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반유대주의가 유독 20세기 독일에서 강하게 나타난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배경이 된 것은 전쟁이었다.

 

1차대전의 패배와 더불어 독일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고리대금업이나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을 '국가의 배신자'와 '음모가' 집단으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한 빌미를 제공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토대를 붕괴시켜버린 대공황은 유대인 살해를 용인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반유대정서를 독일 사회에 확산시켰다.

 

1차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가 독일인들을 사로잡은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다.

 

전쟁이 제공하는 음습한 연막, 군 전체에 만연한 패배주의는 '유대인 문제Judenfrage' 해결을 위한 대안의 폭을 크게 좁혀 버렸다.

 

총통 밑에서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던 나치 체제의 각 조직들 간 경쟁도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을 급진화 하는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히틀러와 힘러, 1934년 히틀러의 지위를 위협하던 돌격대 대장 룀을 제거하는 작전을 주도한 이후 힘러는 언제나 히틀러의 신임을 받는 충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회를 포착한 부서는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이끄는 친위대와 경찰이었다.

 

유대인 절멸은 힘러에게 권력에 이르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었다. 

 

자신의 친위대 조직 속에서 순수한 아리안 제국의 씨앗을 키우기를 염원했던 광신자 힘러의 수하에는 '제국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RSHA)라는 특수 기구를 세웠다.

 

막강한 정보력과 기획력을 보유한 제국보안본부 내에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대로 집행하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같은 인물이 수도 없이 많았다.

 

절멸의 과정

 

나치의 유대인 정책이 처음부터 절멸을 겨냥한 것은 아니엇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유럽 유대인 모두를 절멸하겠다는 '최종 해결' 계획이 확정된 시점은 독일이 소련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41년 봄이었다.

 

나치당이 정권 장악에 성공한 1933년 1월부터 폴란드를 침공하기 직전인 1939년 8월까지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차별과 고립으로 특정지어졌다.

 

나치스 집권 직후인 1933년 4월,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이로 인해 독일 내의 유대인들을 경제적-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1935년 9월에는 '뉘른베르크 인종 차별법'이 통과되어 유대인에 대한 모든 차별을 정당화 하는 법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법을 통해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통혼조차 할 수 없는 '이등 시민'으로 전락했다.

 

1938년에 와서는 유대인이 공공 장소에 출입할 수도 없게 되었다.

 

심지어 공원 밴치에 앉는 것조차 제지당했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들은 서러움의 끝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이었다.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직원 한명이 유대인 소년에게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1938년 11월 8일 밤에 일어난 '수정의 밤Reichskristallnacht' 학살 이후 유대인 소유의 모든 상점과 기업이 나치에 의해 몰수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정치적으로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하고 경제적으로 사망선고를 받게 된 것이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한 제4 제국을 '유대인 없는 나라Judenfreies Land'로 만들기 위한 나치의 정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게토ghetto였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곳곳에 세워진 게토는 유대인이 야기하는 모든 재앙에서 독일인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감옥이었다.

 

주요 도시의 빈민 지구에 설치된 게토는 넘쳐나는 인구, 부족한 식량, 의약품 결핍 떄문에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에는 부적절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게토에는 전염병이 창궐했다.

 

나치는 전염병을 이유로 게토를 더욱더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생존하기 어려운 협소한 공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유대인들로서는 양심과 도덕의 명령을 지키기가 어려웠고, 그렇다 보니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내모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 공동체는 내부에서부터 파괴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자치 경찰은 본래 유대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지만, 나치에 대항해서 아무런 자율권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하는데 활용되었다.

 


폴란드 제2도시 '우쥐
Łódź'에 세워진 게토는 외부로부터의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사망률이 바르샤바 게토보다 높았다.

나치의 입장에서 볼 때 게토는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게토는 무엇보다 유지 비용이 생산 효괄르 압도하는 경제적 비효율성 때문에, 나치 체제의 재정 문제 전문가들에게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또한 전장이 확대되면서 새로 떠안게 된 수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을 소화하기에도 게토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에서 나치는 한때 아프리카 동부에 있는 거대한 섬 파라디 섬마다가스카르에 유럽 유대인을 300만 명 이상 이송하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해군이 영국에 크게 패한 뒤 재해권을 잃은 후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체제의 최고위층이 '최종 해결'이라는 방침을 수립한 것은 1941년 봄이었다.

 

이 해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대대적인 소련 침공 계획을 수립하면서 나치는 새로 점령하게 될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과 집시, 그리고 공산당 관료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전담할 민간인학살특무부대를 창설했다.

 

민간인학살전문부대-아인자츠그루펜

 


창설단원들의 사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친위대 및 경찰 산하에 적지 후방의 위험 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아인자츠그루펜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38년 3월이었다.

 

폴란드를 침공할 때 혁혁한 공을 세운 뒤 해체 되었던 이 부대는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5월에 재건되었다.

 

이 부대의 주요 임무는 후방 지역에 남아 있는 적의 잔당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 부대가 특히 겨냥한 타격대상은 파르티잔과 공산당원, 유대인이었다.

 

전체 인원이 3000명 가량이였던 아인자츠그루펜은 4개의 대대급으 부대로 구성되었다. 

 

4개 대대는 국방군의 동부지역군 예하의 4개 집단군과 연계해 A대는 발트 지역을, B대는 벨라루스 지역을, C대는 우크라이나 지역을, D대는 크림반도 지역을 담당했다.

 

각 대대는 다시 아인자츠코만도EInsatzkommando와 존더코만더Sonderkommando로 불리는 중대급 부대로 나누어졌다.

 

이제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은 56만명이 넘는다.

 

무엇보다, 이들은 유대인만 노린것이 아니라, 슬라브인들까지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슬라브인들까지 합하면 희생자 수는 최소 600만 명을 넘는다.

 

하지만 고작 3000명의 인력이 3년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600만명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독일 국방군이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며, 여러 사진 자료도 남아있어 국방군은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소위 '국방군 무오설'을 반박할 수 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유대인을 제거하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 번쨰는 유대인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비유대인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 주민을 체포한 후, 유대인 주민에게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만들고 그곳에서 총살당했다.

 

두 번째의 경우에는 누가 유대인인지 알 수 없을 때인데 이때는 그냥 유대인, 슬라브인 할거 없이 부락을 전소 시킴으로서 완전히 말살했다.

 


소위 '빈니차의 마지막 유대인'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진

우크라이나 빈니차에서 찍힌 사진이며,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는 D대 소속 대원이다.

뒤에서는 히틀러 유겐트 청년들과 국방군이 총살을 구경하고 있다.

바비야르 학살

 

아인자츠그루펜이 저지른 학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근방에 있는 바비야르 골짜기에서 일어난 학살이었다.

 

1941년 9월 19일 독일 정귝군 제6군 예하의 29군단과 함께 키이우에 입서한 C부대 소속의 제4특공대 A팀은 곧바로 시내 곧곧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수막에는, 안전을 위해 이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소련 내지로 이송할 계획이니, 유대인들은 9월 29일 아침 일찍 시내 중심지에 모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체 키이우 유대인 15만명중 3만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우크라이나인들로 구성된 민병대들이 이들을 통제하고 명단을 작성했으며, 독일 경찰과 정규군은 이들을 감시하고 수송하는 일을 담당했다.

 

유대인 주민들은 트럭을 타고 바비야르 골짜기 입구까지 간 뒤에, 그곳에서 모든 소지품과 옷을 벗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듣고 비로소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너무 떄늦은 일이었다.

 

그들은 줄을 맞추어 길이 150미터, 너비 30미터, 깊이 15미터 크기의 엄청난 구덩이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정해진 지점에 도착하면 이미 총에 맞아 죽은 이웃들 위에 엎드려야 햇다.

 

대기하던 아인자츠그루펜 대원이 자동권총으로 엎드린 사람들의 목덜미를 조준 사격했다.

 

이렇게 다음 날 아침까지 살해된 사람이 모두 3만 3771명이었다.

 


주모자 파울 블로벨Paul blobel 대령

 


골짜기의 시신들과 곧 처형될 유대인들


독일군 병사들이 희생자들의 소지품들에서 금품을 찾고 있다.

절멸 수용소

 

독일과 유럽 점령 지역에서 수용소 건설을 주도한 인물은 힘러였다,

 

패전의 기색이 보이기 시작한 1941년 말부터는 절멸 수용소 건설에 힘을 쏟았던 힘러는 1942년 3월에 폴란드의 베우제츠에 최초의 절멸 수용소를 세웠다.

 

뒤이어 소비부르(5월)와 트레블랑카(7월)에도 절멸 수용소가 차례로 만들어졌다.

 

이 엄청난 계획은 '라인하르트 작전Aktion Reinhardt'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1941년 말까지 힘러는 나치의 영향권 내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절멸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유대인의 수가 너무 많아서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와 더불어 헤움노와 루블린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도 대규모의 살인이 이어졌다.

 

학살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진행되었다.

 

교통의 요지 아우슈비츠에 자리 잡은 세 개의 거대한 수용소군 가운데 하나였던 비르케나우에서는 네 개 이상의 대규모 화장 시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쉴 새 없이 가동 되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살인에 사용된 도구는 치클론 B가스였고, 그 외의 지역은 일산화탄소가 선호되었다.

 

두 도구는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치클론 B 가스는 소량으로 간편하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외부의 민간 기업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단가때문에 생산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고, 또 생산된지 3개월이 넘으면 효력이 떨여져 장기보관이 불가능했다.

 

반면에 구하기 쉬운 일산화탄소는 유류 보급만 끊기지 않는다면야 살인작업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치클론 B에 비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인 경비대원의 고함과 채찍소리에 그들이 내모는 방향으로 쫓겨 가야만 했다.

 

그리고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잘리고,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모든 소지품을 내려놓은 뒤에는 '샤워실'로 향했다.

 

이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대 15분이었다.

 

이들이 샤워실에 몰아넣고 문을 닫은 뒤, 20분 내지 25 동안 기다렸다가 작은 유리창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하고서 문을 열었다.

 

그러면 숙련된 방독면을 쓴 시체처리반원들이 온갖 오물과 피가 뒤범벅이 되어버린 샤워실 안에서 시체를 끌어내 금니가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그대로 수레에 싣고 가 땅에 묻거나 소각했다.

 


시체를 소각하는 시체처리반원들

트레블링카에서 죽은 유대인은 90만 명이 넘었다.

 

베우제츠에서는 60만명이, 소비부르에서는 25만명이 살해되었다.

 

'살인 공장'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는 100만명의 이상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렇게 강제 수용소에서나 가스나 굶주림, 질병, 고문과 가혹 행위, 처벌로 죽어간 유대인이 모등 300만 명을 넘었다.

 

기억의 승리

 

유대인은 제노사이드를 겪은 집단들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가해자들을 압박하고, 중립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희생의 의미를 각인시키는데 성공한 민족이다.

 

그리고 독일은 자기 민족이 저지른 제노사이드를 인정하고 보상과 배상에 나선 최초의 국가다.

 

그런 점에서 홀로코스트는 사후에도 20세기의 모든 제노사이드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뉘른베르크 주요 전범 재판 이후에 열린 일련의 후속 재판 과정에서 감춰져 있던 진실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유대인의 희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우선 유대인 생존자의 일부는 학살의 가해자들을 추적하기 위한 '나치 사냥'에 평생을 바쳤다.

 

홀로코스트 기억이 가져다줄 정치적 손익 계산에 분주하던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의 정치 지도자들도 대세를 좇아 진상 규명에 나섰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미국 내 유대인 조직들이었다.

 

이들의 기획과 치밀한 공조 작업으로, 그동안 법정에서만 환기 되었던 과거사는 학계와 언론을 통해 관련 국가으 지식 대중에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이후에는 매스미디어의 기획에 힘입어 세계의 일반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게 될 정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기억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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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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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탈출개같이소원 | 작성시간 24.06.26 아 끔찍하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생각나네
  • 작성자뽀롱뽀롱뽀로 | 작성시간 24.08.16 유대인이 많이 죽은 건 사실이지만 정말 많은 민족, 동성애자, 장애인, 정신질환자들이 학살 당했는데 사람이 똑똑하고 돈 많고 볼 일이라고 유대인이 민족적으로 들고 일어나니까 유대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서 보상과 사과를 한 느낌이라 아직도 떨떠름해...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 생각도 나고ㅠㅜ 우리나라도 유대인처럼 했어야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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