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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중세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학살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4.06.26|조회수1,890 목록 댓글 1

출처: https://www.fmkorea.com/7173848660

 

 

 

11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도시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무역 특혜를 약속받은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비잔티움의 해군 약화와 더불어 동지중해를 독점했고 비잔티움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피사, 제노바, 아말피를 끌어들였다.

 

콘스탄티노플로 진출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당연히 현지 상권에 각종 영향을 미쳤다. 영세 토착 상인들은 몰락했고 수출업자들은 지주들과 결탁하여 더욱 많은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빈익빈 부익부로 인해 콘스탄티노플 서민들의 라틴인들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동서 대분열 이후 서로를 고깝게 여기던 양자 간의 종교관 차이는 거기에 추가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간의 경쟁이 더해지며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1162년 피사인과 베네치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제노바 거주구를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은 대부분의 제노바인과 피사인을 추방했지만, 베네치아인에게는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기고만장한 베네치아인들은 1171년 콘스탄티노플의 제노바 거주구를 다시 공격하여 파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누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비잔티움 황제는 제국 전역의 모든 베네치아인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강간, 살인, 가옥 방화도 자행되었다.

 

분노한 베네치아인들은 비잔티움을 공격했지만, 그다지 좋은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지지부진한 전쟁 사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그 빈자리는 제노바인과 피사인이 차지했다.

 

1180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6만 명 가량의 라틴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180년,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이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마누일의 아들인 알렉시오스가 즉위했으나, 그는 아직 10세에 불과한 소년이었기에 실제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모후인 마리아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친서방적인 행보로 인기가 없었다. 이듬해인 1181년에는 선제 마누일의 딸인 마리아 콤니니가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었고, 그 남편 레니에르는 섭정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선동했다.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는 마리아 지지파와 반대파의 시가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양자는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화해했지만, 민중의 마리아와 서방인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한편, 수도의 이러한 혼란은 폰토스 총독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의 시선을 끌었다. 불타는 야망으로 이전에도 여러 번 사건을 일으켰던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마리아 콤니니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넘치는 지원자로 그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에 가까워질수록 불어났다. 심지어는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귀족들조차 그에게 가담했다. 칼케케돈 해협에 이르렀을 무렵 그의 병력은 수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수도에 입성한 순간, 전례 없는 규모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인들 역시 그리스인들이 자신을 증오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부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에게 위협이 임박했음을 알렸고 소수의 인원은 참극이 일어나기 전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라틴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라틴인 거주구에 진입한 시민들은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라틴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도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저항하는 모든 사람을 쳐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과 병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 안에서 타죽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교회로 도망쳤지만, 그리스인들은 그곳에도 불을 질렀다. 개중 살아서 잡힌 성직자들은 극심한 고문의 표적이 되었다. 교황의 명을 받아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돕기 위해 파견된 요한 추기경은 참수된 뒤 머리가 개 꼬리에 매달렸다.

 

성 요한 병원의 환자들 역시 분노한 그리스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살육당했다. 어떤 사람은 라틴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은 라틴인 거주구를 샅샅이 뒤져 숨은 라틴인들을 사형대로 넘겼고 그 광기는 콘스탄티노플 내의 제노바인 거주구와 피사인 거주구를 모두 파괴한 뒤에야 끝났다.

 

참극에서 살해당한 라틴인은 약 수만 명이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4천 명의 라틴인은 룸 술탄국에 노예로 팔렸다.

 

당대의 티레 대주교 기욤은 이 사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독사 같이 악독한 그리스는 가슴 속의 뱀이나 장롱 속의 쥐처럼 손님들에게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고 그런 행위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딸과 조카와 누이를 아내로 삼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과 오랫동안 어울리며 친구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 사건은 가톨릭 국가들의 비잔티움에 대한 의견을 크게 악화시켰다. 1185년 시칠리아 왕 월리엄은 테살로니카를 약탈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와 하인리히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겠다며 위협했다.

 

이같은 적대 관계는 비잔티움의 내분으로 촉발된 1204년의 콘스탄티노플 학살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1204년의 학살에 비해 이 학살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4차 십자군의 참극은 너무나 자주 베네치아의 탐욕 때문이라 단순화되지만, 이 학살로 목숨을 잃은 라틴인의 아들딸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은 끔찍하고 변명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취급받은 것처럼 라틴인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에 분개하며 열변을 토하는 역사가들은 1182년의 서방인 학살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워렌 H. 캐롤(Warren H. Car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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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레이몬드현식 | 작성시간 24.06.26 너무 끔찍하다 아 머리 아파 단체로 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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