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비밀의늪
여기 여러가지로 불리는 이음동의어가 있다.
누군가는 데이트 폭력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교제폭력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왜 안 만나 줘"라는 헤드라인을 통해 누리꾼들에 의해 '외않맍나조' 등으로 치환되어 불린다.
다소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이 범죄 행위는 정확히 "교제폭력"이라 불려야 맞다.
데이트 폭력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건 '데이트'도 단순한 '폭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낭만적인 이름을 가질 이유도 없는 몹시 추잡한 범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범죄를 "교제폭력"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전문용어로는 IPV(Intimate Partner Violence), 즉 "친밀한 파트너 폭력"이라고 한다.
교제폭력, (이하 IPV)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폭력이라서 문제일까? 아니다. 교제폭력은 곧 교제살인으로 이어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다(친밀한 파트너 살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 김성희, 2020).
물론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다. IPV를 당하면 반드시 IPH(Intimate Partner Homicide, 친밀한 파트너 살인)도 당하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유의미한 연구 결과가 있다. 이별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대부분의 IPH 범죄는 헤어진 당일이나 최초로 결별한 시점으로부터 3개월 이내에 발생했다는 보고 결과가 있다(Banard, Vera, Vera & Newman, 1982).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교제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혹은 교제를 했다면 이별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조금만 보아도 그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교제를 시작했다면 이별할 수 있다. 세상에는 교제했다가 헤어진 커플이, 교제했다가 결혼한 커플보다 더 많다. 헤어지자는 발언을 했다고 연인에게 살해당해야 하는 커플 관계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흥분하여 상대를 목조르고, 죽일듯이 두들겨 패고, 심지어는 흉기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이는 비단, 어제 오늘 일어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장 어제 오늘까지만 해도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받고, 웃는 얼굴로 인사하던 사람과 안전하게 헤어질 수 없는 사회에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제를 아예 하지 않으면 되지 않냐는 시각이 생기기도 한다. 이상한 게 아니다.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친밀한 파트너를 만들지 않으면 이 범죄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탁월한 생각이다. 원인 제공을 아예 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으므로.
다만, 정말 그 생각이 현실에서도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친밀한 파트너를 만들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연인을 만들지 않는 비혼주의자 및 비연애주의자들은 정말 안전하다고 볼 수 있나?
그것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IPV와 IPH가 어떤 상황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 범죄는 연인, 즉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자신의 통제력을 확인하려는 심리에서 발생한다. 쉽게 말해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상대에게 손찌검을 행하는 경우다. 물론, 손찌검 없이도 IPV는 이루어질 수 있다. 언어적, 정신적 폭력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IPH는 어떠한가? 어떨 때, 연인이라는 호칭을 가진 사람이 제 연인을 살해하는가?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 대개 "이별" 때문에 발생한다. '이별'이 IPH 발생 원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이별"로 인한 가해자의 심리 문제로 인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역시 IPV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유를 안고 있다. 상대가 자신에게 통제되지 않아서이다. 그러므로, IPH 범죄는 잔혹하다. 감정이 섞인 살인 범죄가 대개 그러하듯, 공격은 상대의 머리, 얼굴, 목, 가슴 등의 치명적인 부위로 집중된다. 176번이나 211번 같은 세자릿수나 되는 자창이 피해자의 몸에 새겨지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는 표현적 살인의 특징인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표출에 초점을 맞춘 살인'과 동일한 양상을 띤다.
'감히 네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
여기서 전제는 무엇인가. '헤어짐을 고한 것'이다. 이별하자는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단순히 애정다툼에서 일어난 사소한 투정으로 발생한 "우리 헤어져"가 아니라, 정말로 관계의 종말을 고한 "헤어져"였을 때, 헤어짐을 입에 담은 사람은 IPH의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이전에 IPV를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른 사람과의 새 교제를 위해 헤어짐을 고한 케이스(=환승이별 혹은 환승연애)를 제외한다면, 헤어진 사람은 싱글로 돌아간다. 즉, 타인과 교제를 하는 상태가 아니란 것이다. 여자의 경우, (지극히 동성 차별적인 한국 사회 입장에서만 본다면)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자와 헤어졌으니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여성은 IPH가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직면한다. 남자를 만나지 않는, 그러니까 '비연애'에 놓인 순간에 말이다.
헤어짐을 고한 당시에 죽지만 않으면 된 걸까? 이제 연인이라고 불릴 수 없는 '전 연인'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비유명인인 일반인이 일반인에게 행하는 스토킹의 시작인 것이다.
유명하지 않은 일반인이 자신과 똑같은 유명하지 않은 일반인에게 행하는 것만큼 위험한 스토킹은 없다. 모든 스토킹은 지극히 위험하고 유해하나 비유명인의 경우는 주변에 알리기도 어렵고, 하루 아침에 성벽을 쌓을 수도 없으며, 모든 개인정보를 말소한 뒤 증발하는 경우도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경호원도 없이 출퇴근을 해야 하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다면 가족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으며, 주거지를 이사하고, 휴대폰 번호를 바꾸며, 수시로 주변을 살피는 등의 불안에 시달리면서 지내야 한다. 위협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피해자는 자신이 스토킹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신고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한국 사회에는 최근 신설된 스토킹 특별 처벌법이 있다. 이전에는 그조차 없어서 그냥 죽어갔던 여성들에 비하면 지금 살아있는 여성들은 최소한의 대책이라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죽음을 막아줄 수 있는가?
고작 100m 이내 접근금지 신청이, 경찰에게 지급받아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 따위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다. 경찰의 개입은 IPH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을 벌어줄 뿐이다.(친밀한 파트너 살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 김성희, 2020)
스토킹에 대처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애석하게도 피해자가 자신의 신분을 말소하다시피 사라지는 방법 뿐이다. 자신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과 범죄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알고 있는 지인도 만나지 않아야 하고, 누군가와 반드시 붙어다녀야 하며, 주거지와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직장과 학교를 쉬어야 한다. 결국, 스토킹을 당하지 않으려면 피해자가 '사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시당초 안전이별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끊임없이 IPV 위험에 노출된 채로, IPV를 겪으면서도 교제 관계를 유지하는 피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헤어지고 싶은데, 헤어지자는 말만 꺼내도 상대가 돌변하여 주먹을 휘두른다면, '감히' 헤어지자고 말할 수 있을까? 공포와 두려움은 상대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상대를 거스르지 않으려 하는 본능으로부터 방긋방긋한 웃음이,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행동이 나오게 만든다. 죽지 않기 위해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죽어 마땅한가? 헤어지려는 '노오력'조차 하지 않고 지레 포기해버렸으니까?
혹은 남자가 폭력을 휘둘러도 좋다고 만나는 속칭, '남미새' 멸칭을 사용하거나 '죠?'로 응수하면 그만일까? (물론, 그러한 조롱이 쓰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알지만 피해자의 속내나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외부에서 볼 때는 그렇게 오인해 볼 수도 있다는 점으로 미뤄봤을 때─또한 이 글에서는 '남미새'와 '죠?'의 사용에 대해 토론하지 않음을 알린다) 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스토킹에 가까운 피해를 받아도 스토킹으로 신고조차 할 수 없다. 일방적인 스토킹이 아니라 쌍방 합의 하에 만나는 교제 중인 사이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사실을 하나 말해 본다면, IPH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흔히 건네는 말이 있다.
"그러게. 왜 하필 만나도 그런 사람을 만나."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발언이라지만 터무니없는 2차가해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 멀쩡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그런 놈을 만나다니. 운이 나쁜 피해자탓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나는 운이 나쁜 편이고, 골라도 하필 그런 놈을 고를 수 있으니 아예 연애를 하지 않겠다 비혼과 비연애를 선언한다면? 살면서 단 한 번도 교제를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안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자꾸 피해자에게 제한을 두는가. 왜 피해자들에게 페널티를 부과하는가. 애초에 교제를 하지 않았으면 되는데 교제를 해서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든 어리석은 피해자라고 손가락질하면 그만인가? 교제 경험이 있는 피해자는 살해당해 마땅한가? 그럴 만한 위험을 안고 교제를 했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교제 시작 전에 "나는 IPH에 동의합니다"하는 각서를 쓰는 건 어떠한가? 그 각서에 지장이라도 찍으면, 추후 IPH로 사망하게 되어도 문제가 없나? 죽을 각오로 교제를 했으니, 죽어도 싼가?
안타깝게도 남자를 피한다고 해서 죽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유영철이나 정남규 같은 비면식 관계의 연쇄살인범들 때문이 아니다. 여성은 면식관계에 있는 즉, 얼굴을 아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다(살인범죄의 원인과 대책, 2004, 고영종).
전세계의 전체 살인사건 피해자 성별 통계를 내자면,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다(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UNODC, 2013). 남성이 살인으로 훨씬 더 많이 죽는다. 그러나 IPH 범죄만 따졌을 때는 여성 피해자가 남성 피해자보다 훨씬 많다. 전체 살인 통계 중 IPH 범죄로 인해 죽는 여성은 38.6%나 되고, 남성은 6.3%에 그친다(Stöckl et al., 2013). 무려 4배 이상 차이나는 것이다.
애석한 사실을 하나 더 말해보자면, 이 통계는 대한민국의 통계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IPV와 IPH의 정확한 통계 사실이 없다. IPV든, IPH든 정확히 집계 보고된 바도 없고, 따라서 통계도 나오지 않는다. 최근에야 부랴부랴 집계해 보겠다는 의견이 나왔을 뿐, 이전까지는 가족과 친척 등도 모조리 집어넣은, 그러니까 말그대로 '그냥 친밀한 관계≒면식관계'에서 일어난 범죄 피해 사실까지 뭉뚱그려넣은 빈약한 통계만이 있을 뿐이다. 섹슈얼한, 말그대로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서 벌어진 IPV와 IPH 통계는 이제 막 집계되는 참이지, 이전에는 제대로 된 통계마저 없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통계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한 대처 방안과 법안은 아예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발의된 건은 하나 있으나 여태 국회에 계류되어, 그냥 무산될 확률이 크다. 매일마다 "왜 안 만나 줘" 타이틀을 단 인명 피해 기사가 줄줄이 이어지고, 매일 매일 IPH로 죽어가는 여성이 뉴스에 보도되고, 그것이 알고싶다나 궁금한 이야기Y 같은 탐사 보도가 이어져도 우리가 가진 IPV 관련 법안 하나가 없다.
우리는 앞으로 몇 명의 여성을 더 IPH로 잃어야 관련 법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내 옆의 연인과 안전이별을 할 수 있을까? 안전이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지자체가 귀중한 세수를 축내 핑크빛으로 마련한 현수막에 '미혼 남&녀 만남의 장'같은 행사 따위를 이어나가도 문제가 없는 걸까?
마지막으로, 최근 일어난 IPH 사건 보도를 아래에 첨부한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IPH로 소중한 목숨을 떠나보내고 있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530516463?OutUrl=naver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62515312718429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223446638922048&mediaCodeNo=257&OutLnkChk=Y
https://www.khan.co.kr/national/incident/article/202406141923001
https://www.yna.co.kr/view/AKR20240620108900060?input=1195m
*참고 문헌
-친밀한 파트너 살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 김성희, 2020
-최신 범죄심리학, 이수정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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