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aurora
삶은 그를 실망시켰고, 그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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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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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분위기가 만연한 이런 시골에서 여자가 독자적 삶을 갖겠다는 생각은 도대체가 시건방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조로 표현되었던 거부의 표정들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진심이 되어버렸고 가장 기본적인 감정들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기뻐할 때에도 <여자답게 얼굴을 붉혀야> 했다. 왜냐하면 기쁨도 수치스럽게 여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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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밤중에 가끔 어떤 내적 충격에 깜짝 놀라서 눈을 뜨고는 공포 때문에 숨이 막혀하면서 시시각각 내가 살아 있는 채로 부패되어 가는 것을 체험한다. 어둠 속에 공기가 너무도 가라앉아 있어서 내게는 모든 것들이 균형을 잃고 갈갈이 헤쳐진 듯 보인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중심을 잃고 소리없이 얼마간 떠다니다가 결국은 여기저기서 추락하여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런 악몽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부패해 가는 짐승이 되고 모든 감정이 자유롭게 서로 교감하는 만족감을 소극적으로 맛보는 것과는 달리 수동적이고 객관적인 공포감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힌다.
치욕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을, 가늠을 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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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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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진 행복에 대한 관념과,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어긋나 있는 것 같은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뒤척이고, 신음하다가, 미치기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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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괴상한 새가 날개를 퍼 덕 이 며 날아와, 기억 속 상처를 그 주둥이로 쪼아 찢어놓습니다. 금세 과거의 수치와 죄에 대한 기억이, 뚜렷이 눈앞에 펼쳐지고, 악 하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공포가 엄습하여,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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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껏 살아온 아비규환의 '인간' 세상에서, 오직 하나,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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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공포로 항상 떨었으며, 또한 인간으로서 제 자신의 언동에 조금도 자신감을 갖지 못해서, 저 혼자만의 고민은 가슴속 작은 상자 안에 감추고, 그 우울감과 긴장감은 그저 숨겨놓고, 오로지 천진난만한 척 낙천성으로 장식하며, 점차 저는 우스갯짓을 하는 괴짜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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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의 고통이 어떻다는 건 그걸 가져본 여자만이 안다. 모든 질병의 고통은 동정자를 끌어 모으지만 그 고통만은 비난과 조소를 면치 못한다. 사람을 질병에서 해방시키는 게 인술의 꿈이라면, 여자를 그런 질병 이상의 고독한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건 나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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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언니 같은 효녀 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엄마한테 잘하려고 애써왔어. 이젠 지쳤어. 언니도 곧 지칠 거야. 엄마한테 잘 하는 건 밑 빠진 가마솥에 물 붓기야. 엄마가 우리한테 어쩌다 보이는 관심이 뭔 줄 알아? 저 계집애들 중 하나를 잃었으면 내가 이렇게 원통하진 않았으련만,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볼 때야. 그런 표정 정말 소름 끼쳐. 엄만 우리가 살아 있는 걸 미안해하게 만들어. 우리도 우리에겐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래야 돼? 엄만 정말 해도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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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나에게 있어서 자유란 나뭇가지 끝에 걸린 별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딸 수 있을 것 같아 나무를 기어올라가 봤댔자 허사였다. 올라갈수록 별은 멀고 돌아갈 수 있는 땅 역시 멀어져서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위기의식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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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직껏 꿋꿋하게 잘 버티기에 그냥저냥 극복한 줄 알았더니 이제 와서 웬 약한 소리냐구요? 형님 보시기에도 제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입디까? 아무렇지 않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시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나를 놓아주겠다고도 말하지 마세요.
열세 살 그날 이후, 나는 한 뼘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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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을 때 사실 나는 이미 죽은 것이었다. 인생은 옷처럼 그렇게 쉽게 벗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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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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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려서 제일 좋은 점은 아무도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류이팅은 생각했다. 사실을 부풀려 얘기할 수도 있고,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거짓말을 해도 괜찮았다. 그건 어른들의 반사적인 자기 보호이기도 했다. 아이가 진실을 말해도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철없는 소리일 뿐이라며 귀담아듣지 않는다. 반복된 좌절감에 학습된 아이는 사실을 말하는 아이에서 선택적으로 사실을 말하는 아이로 변하고, 그러면서 어른이 된다.
나는 아무 희망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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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고싶었다.
낡고 깨진 공중전화부스가 아니라, 닳고 더러운 보도블럭 틈새에 핀 잡초가 아니라, 부옇고 붉은 밤하늘이나 머나먼 곳의 십자가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다 죽고 싶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덧칠한 시와 산문들 눈물이 마르지 않은 종이 위에 쓴 명랑한 노래 그지없이 한심한 필체나 지웠다가 쓰고 다시 덮어버린 잿빛 모래 위 갈매기 같은 글자를 보지 않길 바라 이걸 읽으며 넌 키득키득 웃어넘기겠지 한심한 네 작품을 누가 힘들여 분석하겠냐며 답장을 쓸지도 모르지 내가 죽거든 다시는 못 살아나게 지켜줘 내 얘길 하지도 마 일기든 메모든 수첩이든 불태워줘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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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는 노래처럼 살게 되고
시인은 시를 몰고 간다고 해도
안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경로들
앎이 만든 핏자국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 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을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내 삶을 내 손으로 그만 중단시켜 버리고 싶은 열망에 얼마나 자주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수년 동안이나 머릿속에는 오직 단 한 가지, 자살에 대한 끔찍하고도 메마른 상상이 가득했고 내가 도피처로 기꺼이 받아들인 그런 상상은 삶을 더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가장 견딜 수 없어진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일상의 무의미함에 저항하며 발버둥 쳤지만 아마도 나 자신의 나약한 기질 때문에, 그중에서도 특히 나약한 성격 때문에 나는 도리어 그 무의미함 속으로 더욱더 깊이 침몰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끝까지 살 수도 있다는 소름끼치는 사실은, 이미 한참 전부터 나에게는 악몽이 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조차도 혐오스러웠다. 나는 더 이상 삶의 목적이란 것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동적으로 반복되는 자살에 대한 강박관념에 무력하게 나를 맡겨 버렸고 하루 종일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나 스스로 그들 모두를 버렸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 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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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기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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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한적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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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 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그들은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바다가 있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카프카는 지워지지 않는 꿈들을 소설에, 편지에, 일기에 기록했다. 그 기록을 발췌해 모은 이 책은, 꿈들에 홀린 자들이 잠 없는 밤 벌인 투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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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무렵, 최후의 잠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진되어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꿈을 꿈 뿐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 나는 밤새도록, 건강한 사람이라면 잠들기 직전에 잠시 느끼는 그런 혼몽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꿈들이 내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꿈들을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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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잘 수가 없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꿈을 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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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같은 내면의 삶을 묘사하는 일이 운명이자 의미이고, 나머지는 전부 주변적인 사건이 되었다. 삶은 무서울 정도로 위축되었고, 점점 더 계속해서 위축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