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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치치시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4.08.16|조회수5,622 목록 댓글 21

출처: https://www.fmkorea.com/7362149601

오늘은 치치시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1945년 2월

 

조종사의 연인 이름을 딴 '바버라 III' 폭격기가

 

 




치치시마에 설치되었던 대공포에 맞고 추락한다

 




당시 바버라 III 에는 여러 명의 승무원들이 탑승하고 있었으나

 

치치시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에 의해 하나씩 사로잡히고

 

조종사만 간신히 해변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고

 

뒤에서는 일본군 수색대가 추격해 오고 있었다

 

조종사는 이들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이 조종사는 근처를 지나던 미군 잠수정에게 구조되었다

 

 

훗날 그 조종사는 이에 대해

 

만일 잠수정이 조금만 늦게 나타났다면

 

자신 역시 일본군에게 붙잡혔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일본군에게 잡힌 자신의 동료들의 운명을 떠올리곤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치치시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치치시마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구성하는 작은 섬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격전지인 이오지마보다 큰 섬이지만

 

지형상 활주로를 놓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전략적인 가치는 사실상 없어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주목하던 섬은 아니었다

 

 

 



다만, 미국은 일본이 저지른 진주만 공습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고

 

 

 



미국이 레이테만에서 일본 연합함대를 궤멸시키고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미국은 진주만에서 당한 폭격을 일본 본토에 재현함으로서

 

자신들이 당한 것을 되갚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치열한 격전 끝에 이오지마를 장악하였고

 

미군 폭격기들은 이제 일본 본토를 마음놓고 폭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미군 폭격기들이 도쿄를 폭격할 경우

 

최단거리로 비행하는 경우 위 지도처럼 치치시마 주변 상공을 지나가게 되는데

 

치치시마에 있는 관측 기지가 눈에 거슬리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이오지마 전투를 진행하면서 

 

바바라 III로 하여금 치치시마의 정찰 기지를 폭격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대공포 공격으로 문제가 벌어졌던 것이다

 

 

유일하게 생환한 조종사는 자신의 동료들이 일본군에게 붙잡혔음을 이야기하며

 

이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미국은 이오지마 전투로 인하여 정신이 없었으며

 

 

이후에는 '일본군이 민간인들을 옥쇄하라고 강요하며 총알받이로 써먹은'

 

오키나와 전투가 이어져서 치치시마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마무리 된 다음에는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승산이 없는 걸 깨달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치치시마에서 잡힌

 

포로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

 

 

그리고 9월이 되자 미군은 일본군들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치치시마에 상륙하였다

 

 



 

미군이 상륙하자 사단장 다치바나 요시오는

 

자기 휘하의 병력들의 무장을 해제하라고 지시하고

 

미군을 환영하며 항복한다

 

 

정말로 순조롭고 깔끔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당시 조종사의 증언을 잊지 않았기에

 

'치치시마에 추락한 바버라 III 승무원은 어디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영어가 능숙한 참모 호리에 요시타카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분들은 폭발물을 만지다가 전원 폭사하였습니다' 라며

 

그들이 묻혀 있다는 봉분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무덤까지 있는데다가

 

관련자들의 증언이 모두 논리정연했기에

 

미군은 이 문제를 더 이상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이제 일본군이 의도했던 것처럼 

 

'치치시마: 이 섬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음' 으로

 

그 섬에서 있었던 일은 조용히 넘어갈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상 어느 군대도 포로에게 폭발물을 쥐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증언은 너무나도 수상했다

 

 

그렇기에 미군은 일본군들이 치치시마에서 숨기고자 하는 일을 벌였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본 본토로 귀환한 병사들을 중심으로 치치시마에서 있던 일을 심문했다

 

 

물론 당시 부대에서는 '치치시마에서 있던 일을 발설하지 말라' 고 하였던 데다가

 

혹시라도 추궁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예상 답변을 맞추어 둔 상황이었지만

 

미군의 치밀한 심문에 입을 여는 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군은 치치시마에서 붙잡힌 포로들은 폭발로 사망한 게 아니라

 

일본군들에게 잡아먹혔다는 증언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미군은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섬에 붙잡아 둔

 

사건 관계자들을 체포하여 괌에 있는 법정에 세웠다

 

 




 

그리고 괌에서 벌어진 재판 결과는

 

온갖 잔학한 행위들에 대한 증언이 난무한 군사재판임에도

 

모두를 기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이를 보도한 괌뉴스는 

 

'호주 정부가 말하길 쪽발이들이 식긴을 하였다' 라고

 

식인을 뜻하는 'cannibalism' 조차 'cannabilism' 으로 오타를 냈을 지경이었다

 

 

재판 결과 이들이 식인을 벌인 이유는 식량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치치시마의 식량 사정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 포로를 잡아먹은 이유는

 

'연회에 안주가 변변치 않아서 색다른 안주를 먹어보려고 했다' 라는 점에서

 

근엄해야 할 판사조차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또한 행동대장 마토바 스에오가

 

사단장인 다치바나 요시오의 결제를 받아서

 

대대 전원은 반드시 미군의 인육을 먹을 것을 명령했다는 것과

 

->저게 개소름 돋는게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식량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었다, 그것도 아님
걍 사람고기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임

 

 

아무리 막장 그 자체인 일본군이라지만

 

인육을 먹으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서 억지로 먹고 있는 와중에

 

사단장인 다치바나 요시오가

 

'너무나 맛있는데 한 접시 더 달라' 고 말했다는 것들이 밝혀지면서

 

이들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았다

 

 

결국 당시 주범들은 사형이 선고되었고

 

명령이었다고 하지만 미군 포로를 살해한 이들도 중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몇몇은 유창한 영어로 미군에게 증언을 해주고

 

자신은 무고하다고 자기 변호를 한 끝에 기소당하지 않거나

 

 

처벌받을만한 짓은 아랫 사람에게 짬때리고

 

자신만 쏙 빠져나간 경우도 없지 않지만

 

 

승전국인 미군 포로를 학살하여 잡아먹은 일이었던만큼

 

힘없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잡아먹힌 밀리환초 학살사건과 달리

 

그렇게 빠져나간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안주거리가 없어서 포로를 잡아먹었다' 고 알려지자

 

모두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다

 

 

미군 헌병들은 물론이고 일본군조차도 이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특히나 포로를 잡아먹으라고 지시한 마토바 스에오나

 

이를 조장한 다치바나 요시오 같은 경우

 

분노한 미군 헌병에 의해 매일 같이 구타를 당했고

 

처형대에 올랐을 때도 의식이 없는 상태여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처형당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둘만큼 죄질이 심각하지 않은 이들도

 

인간 말종인 건 변함이 없었다

 

 

나카지마 노보루 같은 경우

 

'일본 사회가 포로를 경멸하고 수치스럽다며

 

이들을 학대하는 것을 조장했는데

 

일본 사회 전체가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포로를 학대한 개인만

 

전범으로 몰아서 처형하는 건 부조리하다!

 

처벌하려면 일본 국민 전부를 처벌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억울해 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미군 전사자 유족들이 해당 기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전사자들이 저렇게 잡아먹혔다는 기사를 보고

 

이러한 보도가 소문이 나면 전사자들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다며

 

이들의 명예를 위해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엠바고로 인하여 이 사건은 우리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이 사건은 더 이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십 년 후 이 사건이 다시 주목 받게 되었는데

 

당시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조종사가 바로 아버지 조지 부시였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조종사로 복무했던 조지 부시는

 

치치시마에서 유일하게 귀환한 사람이었고

 

비행기 이름인 '바버라 III' 의 바버라는

 

당시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될 바버라 여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어쨋든 조지 부시는 당시 치치시마에서

 

잡아먹힐 뻔하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잊지 못했다

 

 

물론 미국 대통령으로서 조지 부시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비나토 동맹국으로 지정할 정도로

 

일본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제어했지만

 

 




1989년 히로히토가 죽었을 때

 

'이제야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이나마 생기는 것 같다' 고 했던 걸 보면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매우 나빴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간혹 조지 부시가 반일 감정으로 일본을 골로 보냈다고 하면서

 

플라자 합의, 미일 반도체 협정, 도시바 스캔들 같은

 

80년대 미국의 '일본 때리기' 의 사례들을 이야기 하는데

 

 

이 일들은 대부분 조지 부시가 부통령이던 시절에 벌어진 거라

 

아무리 당시 레이건이 치매 증세를 보이고 있었어도

 

조지 부시가 일본에 대한 악감정으로 벌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일본의 버블 경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버블이 무너진 게 조지 부시 재임기인 1990년 3월의 대출 총량 규제 때문인데

 








보통 버블은 연착륙을 유도하는 게 정상임에도

 

일본 정부가 저렇게 급하게 대출 총량을 저렇게 규제하고

 

 




금리 역시 비정상적인 속도로 급하게 인상한 건

 

바젤 I 합의에 의해 1992년부터

 

일본 은행들의 BIS 비율을 8%로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젤 합의가 은행의 건전성을 위해 필요한 거긴 하지만

 

미국은 자기 이익에 맞지 않으면 국제 협약도 손바닥 뒤집듯

 

주도하다가 탈퇴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만일 부시가 일본에 대해 호감이 있었다면

 

바젤 협약을 이행하더라도 한 두해 정도 유예기간을 갖자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이 주도하는 판에 선진국들이 참여한 것이었던 것이니

 

다들 BIS 비율 맞추기 위해 분주한 가운데서

 

한 두해 정도 유예기간을 갖자고 하면 반대할 나라가 딱히 없었으니까

 

 




물론 이렇게 말하면

 

'공적인 업무에 있어서 개인적 감정이 들어가는 게 말이 되냐?'

 

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골드만 삭스 시절 한국에서 모욕을 당한 일로

 

한국을 극도로 싫어했던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의 경우

 

97년 아시아 외환 위기가 전염된 한국을 상대로

 

'한 번 당해봐라' 라며 지원은 커녕

 

IMF 구제금융조차도 거부권 행사해서 막아버리려다가

 

한국측의 애원으로 마지못해서 

 

IMF 구제금융은 받아줬던 사례만 보더라도

 

 

공적인 업무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보니

 

적당히 봐줄지 FM대로 처리할 지는

 

담당자의 판단에 따른 것이니 말이다

 

 

물론, 역사에는 if라는 건 무의미한 데다가

 

당시 미국 입장에선 일본의 부상에 위기감을 느끼고

 

그 시절 블레이드 러너나 백 투더 퓨처 같은 대중 문화엔

 

일본이 미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그렸을 정도로

 




미국 입장에선 일본을 조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냅두고 넘기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조시 부시가 일본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역사가 일본에게는 조금이나마 나은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야기하려는 내용과 살짝 벗어난 내용이지만

 

당시 치치시마에는 김수환 추기경도 있었다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치치시마에 배속되었었는데

 

미군에 증언을 했다는 내용은 있지만

 

귀국 후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결코 입을 열지 않으셨다

 

 




김수환 추기경이 6월 항쟁 당시에도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진압을 하시려면 제일 먼저 저를 밟고

 

그 다음엔 신부들을 밟고, 그 다음엔 수녀들을 밟고 넘어가십시오' 라며

 

 

서슬 퍼런 독재 정권 하에서도 두려운 기색 없이

 

양심에 따라 할 말을 하셨던 분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시 그 곳에서 차마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을 보셨던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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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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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Pinnacle | 작성시간 24.08.16 시발 미군도 이렇게했는데 한국인은 어쨌겠냐고 으 끔찍함 글고마워
  • 작성자요르고스란티모스 | 작성시간 24.08.16 정말 끔찍하다 처음 알았어...
  • 작성자허밍온 | 작성시간 24.08.20 헐 아버지 조지부시가 왜 알본을 싫어하나했는데 정말 끔찍한 기억이네..
  • 작성자럭키삥키 | 작성시간 24.08.26 미쳤다 첨알았어 속안좋아 미친넘들..
  • 작성자peeta mellark | 작성시간 24.09.10 와 진짜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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