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374268937
2차 대전 후
더글라스 맥아더 주일 연합군 최고 사령관과
일본국 천황 히로히토는 11번 만났다.
그 중 첫 만남은 1945년 9월 27일에 있었다
이 회담은 그 유명한 사진을 남긴 회담이기도 하다
뒷짐을 진 채 편안해 보이는 맥아더와
양복을 입고 다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히로히토
이 사진은 패전 후 일본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당연히 일본 정부는
이 사진이 널리 퍼지는 걸 원치 않았다
언론사들은 이 사진을 1면에 실었지만
일본 정부는 검열을 통해 막았다
불경하다는 이유였다
어디 감히! 불경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의 위에는
연합군 사령부가 있었다
일본과 연합군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진인데다
불경 운운하며 검열하는 것이
연합군 사령부의 마음에 들었을 리 없다
검열을 검열한다!
결국 연합군 사령부는
일본 정부의 검열을 취소했고
일본의 언론사들은 이 사진을 신문에 실을 수 있었다
(물론 연합군 사령부는 점령 기간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고
검열도 했다)
일본 정부의 걱정대로
이 사진은 일본인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16살에 해군 수병에 자원 입대해
1945년 패전으로 고향으로 돌아간
와타나베 기요시라는 사람은
전쟁 기간 천황 폐하를 위해 죽기를 꿈꿨다
하지만 이 사진을 본 날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나의 천황 폐하는 이 날 죽었다고 적었다
이후 그는
히로히토도 전쟁 책임을 져야 하며
상징 천황제에 대해서
천황을 상징으로 삼느니
정어리 대가리를 상징으로 삼는 게 나을 것이라는
천황제 반대론자가 되었다
이 사진이 당시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참고 자료
- 와타나베 기요시, 장성주 옮김, 『산산조각 난 신』, 글항아리, 2017.
- 이시카와 마스미, 박정진 옮김, 『일본 전후정치사』, 후마니타스, 2006.
- 고모리 요이치, 송태욱 옮김,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이파리, 2004.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쌍문동몽지 작성시간 24.08.20 염병을 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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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낭콩스프 작성시간 24.08.20 겨우 저 사진한장 갖고 충격받았을 정도면 평소에 세뇌를 엄청 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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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페퍼민트 오일 막 발라 작성시간 24.08.20 불경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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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구리워하다 작성시간 24.08.20 쪽국이 이겼어도 저렇게 생겼는데 뭐.. 승전국 느낌이 났겠나싶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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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읂어하고참왜하라 작성시간 24.08.21 웃긴게 덩치도 좋고 외모가 지들이 생각하는 상위였음 전쟁범죄를 저질러도 후회없이 계속 추종했을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