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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대한민국이 될뻔한 아프리카 국가, 코트디부아르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4.09.14|조회수5,215 목록 댓글 6

출처: https://www.fmkorea.com/6625866188

 

 

 

아프리카 대륙은, 솔직히 말하면 별로 긍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대륙이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과 가난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아프리카는 지금도 끔찍한 군사 분쟁과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는 크게 틀린 인식은 아니다.

 

 

 

 

 

한 나라는 이러한 빈곤의 마수에서 벗어날 뻔했다. 우리나라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경제 개발을 한창 이룩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정부와 국민의 노력으로 대한민국과 비슷한 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1970년대 말의 격동기를 버티지 못하고 오늘날 아프리카 평균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 찼으나 절망으로 끝나버린 이야기. 이것은 코트디부아르의 이야기다.

 

현대 코트디부아르 역사는 1893년 3월 10일, 프랑스의 식민지 선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각종 도로와 철도 시설을 구축했다.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고 해외 문물도 유입되었으나 막대한 자원 수탈과 노동력 착취도 뒤따랐다. 프랑스어와 기독교가 동화 정책으로 전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프랑스는 수탈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카카오와 커피 플랜테이션들이 들어섰고 선진 농업 기술이 전파되었다. 

 

농업 기술 연구소들이 설립되었고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경제를 감독했다. 타 식민지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오기도 했다. 이러한 식민 시절 경제 성장은 195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당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성장률은 매년 7%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은 더욱 강해졌다. 코트디부아르 지방의 독립 운동은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라는 자가 이끌고 있었다. 우푸에부아니는 사회주의자에 프랑스에 매우 비판적인 인물이었지만, 프랑스 내에서 코트디부아르 지역 국회의원 직을 맡으며 독립 운동을 하던 도중 그의 견해를 수정했다. 그는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했다. 그는 독립 직후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이 되었다.

 

 

 

 

 

코트디부아르가 프랑스의 식민지들 중 발전된 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1960년 독립 당시의 상황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문맹률은 80%가 넘었고, 사회는 60개가 넘는 부족들로 분열되었다. 인구의 대다수는 열악한 환경 속에 진흙오두막에서 살았다. 이들은 대부분 여전히 카카오 같은 환금 작물이 아닌 자급 농업에 의존해서 살았다. 지하 자원도 거의 없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자금을 마련하기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니 식민지 말기부터 빠르게 성장하던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는 독립 이후에 폭발했다. 1961년에서 1969년 사이 경제는 연평균 8.7%의 속도로 성장했다. 동기간 평균 성장률이 9.5%였던 대한민국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치고 올라온 것이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세는 어려움을 겪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대비되었고,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이라는 단어도 생겨났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우푸에부아니는 당대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물론 박정희나 장제스 같은 아시아권 개발 독재자들과도 다른 경제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당시 한국, 대만보다 더 자유로운 시장 경제 원칙에 기반한 경제 성장을 도모했다. 1960년대 국가의 개입은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정부는 외국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5년간의 면세 및 자본재 수입 관세의 10년 면세, 자본 이득의 본국 무제한 허용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또한 창업을 장려하며 기업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무리하게 산업화를 하는 대신 이미 기반이 있는 농업 육성에 더 집중하였다. 수출주도 성장 정부 정책에 따라 농산품 재배와 수출이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코트디부아르의 주력 상품은 그 전부터 재배되던 커피와 카카오, 목재였다.

 

 

1970년 즈음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생산량은 무려 전세계 1위, 커피 생산량은 전세계 3위에 달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이 상품들을 수출하면서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정부는 그 수익을 주로 도로망과 철도망, 전력망과 교육 시설에 재투자했다. 식민 시절에 지어진 낡아가는 기반 시설들이 현대에 맞게 개조되고 확장되었으며, 새로운 운송과 발전 시설들이 건설되었다. 교육 예산은 전체 예산의 3할이 넘는 막대한 투자를 받았다.

 

 

프랑스 출신 교사와 기술자들이 대거 고용되었고 우수한 학생들은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공업에 대한 투자는 주로 발전시키기 쉬운 원자재 가공 산업에 집중되었다. 그 덕분에 1960~1970년대 내내 공업은 매년 11%씩 성장했다.

 

 

 

 

 

 

 



우푸에부아니는 친-프랑스 정책을 펼쳐 경제를 개발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프랑스군의 자국 주둔을 계속 허용했다. 프랑스인들은 고급 인력으로서 여전히 대우받았고, 프랑스 기업들도 환영 받았다.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대통령의 참모로 일하며 국정 운영을 보좌했다.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의 대외 원조를 제일 많이 받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 자본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프랑스는 여러 농산품들을 국제 가격 평균보다 더 비싼 가격에 사주었다. 상술한 교사와 기술자들 외에도, 프랑스 출신 관리인들이 정부 조직과 사기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코트디부아르 내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은 독립 후에 오히려 5천명에서 4만 5천명까지 증가했다.

 

 

 

 

 

이민 친화 정책은 주변국에서 노동자들이 이주해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이민자들이 신규 영토를 개척할 경우 그 땅을 이민자들도 얻을 수 있게 했고, 이는 이민자들이 유입되는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들은 정권의 지지 기반인 동시에 추가 노동력을 공급하는 주체로서 환영 받았다. 레바논 등지에서 상인들이 와 경제에 활력을 더하기도 했다.

 

 

 

 



 

우푸에부아니를 비롯한 코트디부아르 지배층도 제 역할을 다했다. 우푸에부아니의 일당, 일인 독재는 철저했다. 그는 통합된 국가를 강조하며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한편, 정적들을 탄압하기 보다는 이권을 제시하고 타협하는 등 그들을 포섭하며 안정된 체제를 이끌었다.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도 독재 국가 치고는 상당히 보장되었다. 프랑스군의 존재 또한 불만을 품은 자들이 반란과 쿠데타를 함부로 꿈꾸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토록 코트디부아르는 타 개발도상국에서 보기 힘든 정치적 안정을 제공해 투자자들을 매혹했다. 관료들과 부농들을 비롯한 코트디부아르 엘리트층도 정부 정책에 협조하고 서로 건전한 경쟁을 펼치며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코트디부아르의 성장은 계층, 지역 간에도 나름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우푸에부아니는 한 마을의 촌장처럼 나라를 다스렸다. 대통령 본인이 속한 바울레족에게 상당한 이익이 돌아갔고, 북부의 무슬림들보다 남부의 기독교도들을 편애하는 분위기가 생기는 등, 진정으로 공정한 정책이 실행되진 못했다.

 

 

 그러나 정부는 빈부 격차의 확대를 막았고, 상대적으로 개발이 더딘 지역들에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시행하며 지역 균형 발전을 꾀했다. 이런 정책은 국민들을 하나로 묶고 소외감을 느끼는 지역이나 부족이 거의 없도록 도왔다.

 

 

 



1970년대 들어서자 그동안의 성과에 한층 고무된 정부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더욱 야심적인 정책들을 펼쳤다. 특히 1970년대 중반에 카카오 가격이 4배, 커피 가격이 5배나 폭등하면서 세수가 크게 늘어났다. 

 

 

 

코트디부아르는 원자재 가격이 높게 유지될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에 기반해 준-국영 기업들과 국영 기업들을 대거 설립하며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들을 시행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1975년에서 1978년 사이에 정부 지출은 세 배나 늘어났다. 1970년 2억 5600만 달러였던 외채 또한 10년 만에 75억달러로 폭증했다.

 

 

 

 

 

 

 


정부는 그 막대한 돈으로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수도 아비장에는 리조트와 호텔들을 세워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전력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대규모 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투자해 원자재 가공업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화학 산업과 섬유 산업, 제지 산업 등 공업을 지원했다.

 

 시장의 투자가 부진한 지역에 국영 기업들을 설립해 지역 경제 진흥에 힘을 썼다. 철 원석 광산과 해양 유전 시설의 개발에 나섰다. 야자유와 열대과일, 고무와 목화, 설탕과 코코넛유 등 더 다양한 농산물을 재배해 농업의 다각화를 노렸다.

 

 

 

 

 



1970년~1978년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연평균 8.2%의 속도로 성장하며 꾸준하게 발전했다. 1960년 $147이던 1인당 GDP는 1980년 $1,225까지 상승했다. 당시 코트디부아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인구는 14위였으나 전체 GDP 순위는 4위, 1인당 GDP 순위는 2위였다.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은 ‘어르신’, ‘아프리카의 현인’ 같은 긍정적인 별명을 얻었고, 수도 아비장은 아프리카의 파리라고 칭송받기도 했다.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은 마치 대한민국이 그러했듯 이러한 성공 신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프로파간다 전략을 펼치며 추가적인 원조를 해줬다.

 

 

 

 

 

당시 코트디부아르의 사회 분위기는 희망이 넘쳤고 낙관적이었다. 전화와 전보 건수,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급률, 그리고 독서율과 영화 관람율은 모두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최상위권이었다. 정부의 집중 투자 덕분에 문맹률은 20년 만에 80%에서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최신식 건물이 들어섰고 농촌 지역까지 현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외화가 넘쳐났고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운영되어 국민들의 삶은 윤택했다.










그러나 이런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들과 불안한 균열들이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농업에 의존하는 경제의 구조 그 자체였다. 본래 농업이라는 것 자체가 생산성과 부가가치가 다른 산업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와 커피 생산량은 매년 크게 증가했으나, 토지당 산출량은 매년 1%도 성장하지 못했다. 생산량 증가에 있어서는 생산성 증가가 아닌 신규 농지 개척이 절대적이었다. 




또한 농산물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 수준도 억제되었다. 결국 농민 개개인의 소득 수준은 경제 성장률과 농업 생산량에 비해 미미하게 개선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는 상술했듯 카카오와 커피, 목재라는 세 가지 물품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의 가격이 폭락한다면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이 올 게 뻔했다.

 

 

 

 



 

물론 코트디부아르 정부도 바보가 아니라서 상술했듯이 제조업 진흥과 농업의 다각화를 추진했다. 문제는 그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간 투자는 대부분 당장 이득이 돌아오는 농업에 집중되었고, 공업에 대한 투자는 직물 산업과 가공업을 제외하면 미미했다. 




이 부류가 아닌 제조업에 대한 투자는 국영 기업들이 주로 도맡아야 했는데, 이들은 비효율적이고 심각하게 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상술한 인구 과잉과 임금 억제는 개개인의 소비력이 제한되게 만들어 내수 시장을 제한했다. 결국 전반적인 제조업 수준은 경공업에 머물렀으며,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농업 다각화 전략도 비슷한 문제점을 맞이했다.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국영 기업들의 지도 하에 국제 시장에서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들과 경쟁을 벌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체 농산품들의 생산량은 성장하긴 했으나, 정부의 기대치에는 미달했다. 여기에 기존 농산물의 수확량도 대폭 증가하면서 결국 전체 수출액에서 3대 수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농산품에 기반한 수출 주도 성장 자체도 리스크를 가져왔다. 세계 각국과의 무역량 증가는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국제적 경제 위기 상황에서 코트디부아르가 큰 충격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인구 과잉 성장도 주요 문제 중 하나였다. 박정희와 덩샤오핑 같은 동아시아의 개발독재자들과 달리 우푸에부아니는 산아 제한 정책을 펼치지 않았고, 코트디부아르의 출산율은 20년간 7명대 후반을 유지했다. 여기에 경제 발전과 의료 발달로 전반적인 사망률도 낮아지고, 설상가상으로 대량의 이민자까지 유입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인구는 1950년 270만에서 1980년 830만명이 되었다.

 

 

 불과 30년만에 인구가 3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피부양인구가 늘어나고 농경지와 같은 부와 지원을 나눌 대상이 많아지자, 전체 경제 성장에 비해 국민 개개인의 소득은 부진한 증가세를 보였다.

 

 

 



1978년 후반, 기어코 사태가 터졌다. 정부의 기대와 다르게 카카오와 커피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1981년에 이르러 카카오 가격은 최고가의 4분의 1, 커피 가격은 절반까지 떨어졌다. 동시에 지나친 벌목으로 목재 생산량도 감소했다. 정부 세수는 10억달러가 넘게 감소했고,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했다. 




신 상품과 공업 개발을 담당하던 국영 기업들의 수익성은 극도로 악화되어 정부 보조금으로 연명하게 되었다. 여기에 오일 쇼크로 석유값이 폭등하자 전세계적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세계 경제가 안 좋아졌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금리를 미친 듯이 올리면서 경제 성장을 견인하던 해외 자본이 급히 이탈하기 시작했다

 

 

 

 



경제 위기는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980년에서 1983년 사이에 정부 수입은 65%나 감소했다. 경제성장률은 1980년 -11%를 찍더니 이후에도 정체되었다. 1982년에 총 외채는 90억 달러에 육박했다.

 

 

 미국 금리가 자꾸 오르면서 외채 이자 증가와 자본 이탈이 계속되었다. 코트디부아르는 1981년 IMF의 구조조정 체제에 들어갔으나, 정부와 IMF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개혁이 진행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에 원자재 가격과 생산량의 상승, 서구 원조의 확대로 경기가 일시적으로 반등했으나, 1987년 들어 다시 수출액이 폭락했고, 이 즈음 외채는 137억달러까지 늘어났다.

 

 

 

 

 

 



1987년 5월,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파산을 선언했다. 기적이 신기루가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뒷이야기도 있다. 카카오 생산의 40%에 달하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믿은 코트디부아르는 ‘카카오 전쟁’을 선포하며 오일 쇼크와 비슷하게 카카오 가격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 최후의 발악은 다른 국가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코트디부아르의 점유율이 반토막나고 마지막 경제 여력까지 소모되며 대실패로 끝났다. 

 

코트디부아르는 과거 IMF시절 우리나라처럼 고통스러운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거쳤지만 이를 극복한 대한민국과 달리 꾸준히 쇠퇴했다. 1993년 우푸에부아니가 전립선 암으로 사망할 즈음, 코트디부아르의 실질 1인당 GDP는 30년 전과 비슷했다.

 

 

 

 

 

 

 

이후 코트디부아르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아프리카식 비극이다. 우푸에부아니가 사망하자 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은 종교와 지역, 민족에 따라 점점 분열했다. 그의 정적과 두 명의 후계자들은 정국을 주도하며 우리나라의 삼김 시대와 비슷한 시대를 이끌었다.

 

 

 물론 이들은 훨씬 야만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세 지도자들은 민족, 종교 갈등을 뒤에 업고 부정 선거와 폭력 사태, 민중 봉기, 쿠데타, 두 차례의 내전과 외세의 개입이 포함된 길고 긴 권력 투쟁을 20여년간 벌였다. 일반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계속 하락했다.

 

 

 

 



2011년, 거의 20년간 이어지던 혼란기는 우푸에부아니 말기 경제 관료 출신인 알라산 와타라가 내전에서 승리해 집권하면서 종식되었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던 와타라는 집권 후 즉시 경제를 안정시켰다. 지난 10년간 경제성장률은 다시 7%대의 성장을 기록했고, 아프리카 평균 이하까지 추락한 1인당 GDP는 다시 평균 이상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1978년의 황금기보다 낮은 수치다. 또한 와타라의 경제 성장 또한 기존의 농업에 기반한 성장이기 때문에, 언제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









코트디부아르는 과거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며 먹고 살만한 국가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낙관적이던 정부 정책이 우푸에부아니도 인정했듯 ‘발전 없이 성장’하던 경제 구조의 취약성과 맞물려 국가적 비극으로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코트디부아르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은 희미해 보인다

 

 

 

ㅊㅊ-백갤, 마틴 메러디스 '아프리카의 운명' P400~405

https://documents1.worldbank.org/curated/en/479571468032412133/pdf/multi0page.pdf

 

https://documents.worldbank.org/en/publication/documents-reports/documentdetail/780501468246399856/volume-i-main-report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62802424_Nationalism_and_Decolonization_in_the_Ivory_Co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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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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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티몬아 돌아와 | 작성시간 24.09.14 내친구 캐나다 이민와서 캐네디언된 코트디부아르 출신인데 ㅜㅜㅜ 이런 역사가 있었네 안타깝다... 되게 본인 나라 문화의식 강하던데.. 잘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작성자그렇게됐다고 | 작성시간 24.09.14 아프리카 ㅠㅠ 이런 역사가 잇구나 잘 읽었어
  • 작성자나도서재가갖고싶다 | 작성시간 24.09.14 흥미돋이다 진짜
  • 작성자Earth | 작성시간 24.09.14 와.. 저무는게 너무 순식간이네..
  • 작성자나왓내형 | 작성시간 24.11.30 진짜 유익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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