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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야구]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목숨을 포기했던 어느 포수 이야기

작성자KBO 개그콘서트|작성시간24.09.27|조회수1,785 목록 댓글 9

출처: 여성시대 KBO 개그콘서트






때는 1884년. 미국은 그날도 야구를 하고 있었음.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현재의 시카고 컵스가 연습 경기를 위해 경기장에 들어옴. 당시 시카고의 감독은




캡 앤슨이었음.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기 위한 보증수표로 여겨지는 지표들이 몇 개 있음. 투수의 경우 300승과 3000 탈삼진이고, 타자는 500홈런이나 3000 안타임.

앤슨은 시카고의 선수 겸 감독이었는데, 메이저리그 최초로 3000안타를 달성한 레전드이자 시카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음.




상대팀인 톨레도 블루스타킹스의 라인업을 훑어보던 앤슨은 낯선 이름을 발견함. 이름은 플리트 워커, 포지션은 포수였음.

이 선수는








(당시 기준으로) 놀랍게도 흑인이었음.

광분한 앤슨은 “깜둥이 새끼랑 경기를 하느니 팀을 해체하겠다”고 날뜀.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진짜로 시카고 선수들한테 철수하라고 명령함.

위에 말했다시피 앤슨은 시카고의 프차 겸 메이저리그 전체의 슈퍼스타여서 입김이 셌음. 게다가 앤슨만 저러는 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흑인인 플리트를 꺼려했음. 결국 톨레도의 감독은 하는 수 없이 플리트를 라인업에서 제외시킴.










첫 연습 경기부터 수모를 겪었지만 플리트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훈련에 참여했고, 그해 5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로 데뷔함. 당시 리그 평균보다 좋은 타격을 보여주고 포수로서도 준수한 수비를 뽐냄.


그치만 19세기는 인종차별이 만연했고...소속팀인 톨레도의 선수들마저 플리트와 경기하는 걸 싫어함. 플리트가 투수 리드를 하면 일부러 정반대의 공을 던지는 식으로 감독과 프론트에 (흑인과 함께 야구하기 싫다고) 어필을 해댔고, 끝끝내 백인 선수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한 플리트는 시즌이 끝난 후 방출됨.















시간이 더 지나 20세기로 넘어온 후에도 미국과 메이저리그의 인종차별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음. 그럼에도 야구가 하고 싶었던 흑인 선수들은 결국 새로운 리그를 만들어내는데




흑인들의 야구 리그인 ‘니그로리그’였음.


니그로리그는 메이저리그보다도 격렬하고 오락적인 리그로 인기를 끔. 매년 메이저리그 팀들과 순회 경기를 해서 통산 309승 129패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기기도 함.













그리고 1930년, 이 니그로리그에 천재 포수가 등장함.





조시 깁슨은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인 플리트 워커와 똑같은 포수였는데, 매년 200경기를 소화할 정도의 내구성에 어마어마한 장타력까지 갖춘 야구 천재였음. 양키 스타디움이 개장된 이래 장외홈런은 딱 3번 나왔는데 그 중 두 개가 깁슨일 정도 ㅇ.ㅇ

이 때까지만 해도 포수는 오로지 수비만 잘하면 되는 포지션이였는데, 깁슨이 등장하며 수비에 공격까지 잘하는 일명 ‘공격형 포수’라는 분야가 나옴.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아 한 획을 그은 것임.



니그로리그는 일요일에만 유료관중을 받을 수 있어서, 일요일 경기만 집계했음. 다른 요일에 열리는 경기는 승패만 기록할 뿐 타자와 투수의 정확한 스탯은 남기지 않음ㅇㅇ

깁슨이 매주 일요일 경기에서 기록한 홈런은 총 115개인데, 이걸 일주일 전체로 환산하면 커리어 동안 대략 750개의 홈런을 친게 됨.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 1위가 762개를 친 배리 본즈인데, 본즈가 약쟁이인 걸 감안하면 ㅇㅖ,,,게다가 깁슨은 포수니까 ㅇㅇ


(물론 저 750개가 정확한 기록은 아님. 또한 니그로리그는 팀간의 전력차가 엄청 컸음. 깁슨 같은 슈퍼스타가 몰린 몇몇 강팀이 나머지 약팀을 일방적으로 패는 너낌,,이렇다 보니 니그로리그 레전드들의 기록을 숫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주장이 존재함.)













어쨌든 이런 야구 천재 깁슨에겐 평생의 꿈이 있었음.








바로 메이저리그 데뷔 ㅇㅇ



당시 니그로리그는 팀 재정상 홈 구장이 없어서, 전국을 순회하며 메이저리그 구장을 빌려 써야 했음. 표를 팔아서 얻은 수익의 대부분은 구장 대여비로 냈고, 관중들이 음식을 사먹느라 쓰는 돈도 다 메이저리그 구단주 주머니로 들어감.

게다가 흑인 선수들이 사용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라운드 뿐이었음. 구장 대여비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락커룸이나 샤워 시설은 전부 사용 금지였고, 경기가 끝난 후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경기장 근처 식당에 갔다가 흑인이란 이유로 쫓겨남ㅠ












그래서 깁슨은 더더욱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 꿨음. 인종차별의 벽을 뚫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다른 흑인 선수들도 보다 나은 환경에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자기도 베이브 루스 등 메이저리그의 레전드 선수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ㅇㅇ



하지만 메이저리그 구단주들 대부분이 흑인 선수들을 배척함. 니그로리그는 위에 말했다시피 구장 대여비를 내고 (메이저리그) 경기가 없는 날에도 관중을 불러 음식을 사게 만드는 등 메이저리그 구단 재정에 작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었음. 니그로리그의 스타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오면 니그로리그는 자연히 인기가 떨어질 테고, 그럼 더는 부수익을 얻지 못하게 될 테니 ‘흑인은 흑인끼리 놀아라’는 스탠스를 유지함.


게다가 당시 메이저리그의 커미셔너는








케네소 랜디스였음.



랜디스는 메이저리그의 초대 커미셔너로서 메이저리그를 엄청나게 부흥시키고 야구를 미국의 국기로 자리잡게 만듬. 올스타전, 명예의 전당 등 시스템도 다 랜디스가 만든 것임. 나름 메이저리그 역사에 입지전적인 인물 ㅇㅇ


BUT 랜디스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음. 깁슨을 비롯한 니그로리그 슈퍼스타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반대했고, 틈만 나면 주위에 “야구가 깜둥이들에게 오염당하는 걸 내가 막아냈다”고 자랑하고 다님.












메이저리그의 몇몇 구단주는 니그로리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하리란 가능성을 보고 영입하려고 했었음. 그러나 총재인 랜디스가 이를 악물고 반대하니 그들도 어쩔 수가 없었고, 깁슨의 꿈은 끝없이 좌절됨.


그리고 1943년,





32살의 깁슨은 뇌종양 진단을 받음. 당장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지만, 대신 야구는 평생 포기해야 했음.



메이저리그에서 한 경기라도 뛰어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던 깁슨은 야구와 목숨 중 목숨을 포기하기로 결심함. 깁슨은 수술을 거부하고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감.

그러나 메이저리그는 흑인인 깁슨을 끝끝내 받아들여주지 않았음. 매년 포수로 200 경기를 소화해온 깁슨의 무릎이 메이저리그의 장벽보다 먼저 무너졌고, 결국 깁슨은 평생의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이루지 못하고 1946년 은퇴함.


이렇게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깁슨은 은퇴 직후인 1947년 1월, 뇌종양으로 사망함.














그리고 3개월 후인 1947년 4월,




다저스는 흑인 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을 영입함. 랜디스의 후임자였던 메이저리그 제 2대 커미셔너 해피 챈들러는 이 영입을 승인해줬고, 로빈슨은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정식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함.



물론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음. 흑인이라는 이유로 관중들한테 항상 살해 협박을 받았고, 타석에 설 때마다 머리로 빈볼이 날아왔고, 심판은 대놓고 로빈슨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고, 안타를 치고 출루하면 상대 1루수가 발길질을 했고, 수비 도중에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면 상대 주자들은 무조건 스파이크를 높게 들고 로빈슨의 발목을 노렸고, 언론도 그를 검은 파괴자라고 불렀고, 같은 다저스 동료들조차 로빈슨을 따돌림.












그러나 당시 다저스의 감독이었던 레오 듀로셔는 달랐음. “난 저 친구가 깜둥이든 외계인이든 알 바 아니야. 중요한 건 쟤가 야구를 잘해야 (팀 성적이 좋아지고) 니들 연봉도 오른다는 거야, 바보들아”라고 일침하며 로빈슨을 감싸줌.

듀로셔 감독은 피부색이 아닌 실력으로 선수를 평가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로빈슨은 ‘실력’을 어필해 다저스의 주전 자리를 따냄.









이후 1947년 5월, 로빈슨과 다저스는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레즈의 홈구장 크로슬리 필드에 들어섬. 흑인 선수가 나온다는 걸 듣고 줄곧 살해 협박 편지를 보냈던 레즈 팬들은 로빈슨이 그라운드에 등장하자마자 일제히 야유하고, 레즈 선수들도 로빈슨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흑인과 경기를 뛸 수 없다고) 보이콧할 준비를 하는데






다저스의 백인 유격수 피 위 리즈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로빈슨과 어깨동무를 함. 둘은 야유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웃으며 수다를 떨고 각자 수비 위치로 돌아갔고, 레즈 팬들이 잠잠해지면서 경기가 무사히 진행됨.


이 역사적인 날을 기점으로 샤첼 페이지 등 니그로리그의 다른 슈퍼스타도 하나둘 메이저리그에 들어서게 됨.











그리고 1948년,



한 흑인 포수가 다저스에서 데뷔전을 치름. 이름은 로이 캄파넬라, 조시 깁슨이 친동생처럼 여기고 자신의 노하우를 하나하나 전수해줬던 후계자였음.



깁슨이 그랬듯 훌륭한 수비력과 장타력을 보여준 캄파넬라는 얼마 안 가 다저스의 주전 포수로 자리잡음. 1949년에 올스타에 진출했고, 1950년엔 내셔널리그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MVP를 수상함.











캄파넬라는 1952년과 1954년에도 MVP를 수상하며 다저스의 슈퍼스타로 활약하지만, 1958년 커다란 교통사고를 겪음. 의사들은 캄파넬라가 평생 전신마비로 살아야 하며 10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진단함.


그러나 캄파넬라는 엄청난 의지로 재활 운동을 한 끝에 두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됐고, 다저스와 메이저리그는 캄파넬라의 밤을 개최하기로 함.





로빈슨을 포옹했던 피 위 레즈가 휠체어를 밀어주며 입장했고, 캄파넬라는 많은 팬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남. 이 캄파넬라의 밤에는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인 93103명이 들어옴.


이후 1969년, 캄파넬라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됨. 그로부터 3년 후인 1972년에는 캄파넬라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조시 깁슨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됨.












그리고 1997년,




메이저리그는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42번을 메이저리그 전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함.

재키 로빈슨 데이인 4월 15일에는 메이저리그의 모든 선수, 코칭 스탭, 심판이 42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참여함.


(로빈슨은 다저스에서만 뛴 다저스의 레전드기 때문에 다저스의 4월 15일 경기는 무조건 홈 경기로 편성해줌 ㅇ.ㅇ)

















그리고 마침내 2020년


메이저리그는 니그로리그의 역사를 공식 인정하고 니그로리그를 메이저리그에 편입 시켰고, 조시 깁슨은 73년의 기다림 끝에 정식으로 메이저리그 선수가 됨.















- 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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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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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롯데 힘내 | 작성시간 24.09.27 하 감동이다.. 저 인종이 뭐라고…
  • 작성자지니야부를때만대답을해 | 작성시간 24.09.27 와 진짜 스포츠정신스포츠정신하더니 참여도 못하게 하다니 진짜 미개하다....
  • 작성자프렌즈모니카 | 작성시간 24.09.27 진짜 그시대 인종차별 살벌하다… 그래도 끝까지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거 너무 감동이야
  • 작성자Dmou | 작성시간 24.09.28 진짜 너무 ㅈ같다 개미개해
  • 작성자돌아버린과학자 | 작성시간 24.10.02 시핥 이 밤에 우는 사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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