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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궁예의 진짜 최후?

작성자너너뉘기야|작성시간24.09.29|조회수1,219 목록 댓글 1

출처: https://www.fmkorea.com/7183196094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밤을 머물렀는 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물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고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말하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은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에 무사히 도망쳤고 끝까지 왕건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구비 전승이 특정 지역에서 많이 전승된다. 

 

 

 



 

또 대구의 반야월, 반월당, 팔공산, 안심역 등에서도 공산전투 관련 지명설화가 내려오는데 어느정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설화 속에 몇몇 역사적 사실이 있을 수 있다. 

 

궁예의 최후에 관하여 특정 지역에서 관련 전승들이 다양하게 내려온다. 

 

 

 

 

정보) 글에 나온 반야월의 다른 이름은 안심(安心)인데 왕건이 견훤에 쫓겨서 런하다가 해안 땅을 거쳐 지금의 반야월에 도착했을때 시간이 반야(한밤중)이고 달이 떠있었다고 해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생겼었는데 왕건이 이 곳에 와서야 비로소 안심해서 진짜 지명이 안심(安心)이 됨

 

 

 

 

 

 

철원성 남부 군탄리에서는 왕건의 반란으로 도망치는 궁예와 관련된 전승이 나온다.

 



느치고개: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흐느껴 울며 넘었던 고개라고 한다. 

 

 

시루메고개: 시루메 고개를 넘어가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한잔모텡이:왕건에게 쫓겨 달아나던 궁예왕이 쉬면서 한숨을 돌렸다는 골짜기이다. 

 

 

 

군탄리:궁예가 왕건의 군사들에게 쫓겨 명성산으로 갈 때 이곳을 지나며 한탄했다고 한다. 

 

 

 

 

 

 

 

 



포천시 명성산에서는 궁예와 왕건과의 전투 관련 설화가 다수 내려온다.

 

 

 

궁예왕굴, 궁예침전:명성산 위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게 쫓기어 은신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궁예바위: 명성산 정상 부근에 있는데 이곳에서 궁예도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고 한다.

 

 

치마대: 궁예가 군사를 독려했다는 곳이다.

 

 

망봉: 산정호수 좌우에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이다. 궁예가 이 봉우리에 망원대를 높이 쌓고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망을 보았다고 한다. 

 

 

사실골고개: 왕건에게 쫓긴 궁예가 명성산에 주둔하고 있을적에 왕건의 군사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궁예의 병사들이 모든 사실을 밝히고 왕건에게 투항하였다고 한다. 

 

야단골:왕건의 군사에게서 도망칠때 궁예의 군사가 계속해서 망봉에서 망을 보자 야단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이르렀을 때 궁예는 망봉에서 망을 보는 군사를 내려오라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항서받골:궁예와 왕건의 결전에서 왕건이 궁예로부터 항복을 받은 곳이라 해서 항서받은 골이라 부르다가 항서받골이 되었다고 한다.

 

 

가는골: 궁예의 군대가 왕건의 군대에게 패하여 지나간 길이라고 한다. 

 

명성산 전투 관련 설화도 내려온다.

 

왕건이 명성산이 험해서 공격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때 백발노인이 밤에 밭을 갈면서 자신의 소를 왕건에게 비유하여 “왕건 태조같이 미련한 놈의 소야. 이렇게 돌아가야지, 그걸 허부적거리고 네가 넘어갈거야. 바위돌이 이렇게 있으니까”라고 암시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성산의 형상이 소이니 정면 공격은 뿔로 막아서 성공하지 못함으로 후면 공격을 하라고 하여, 왕건은 비교적 평탄한 후면 공격을 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명성산에서 30 km 떨어진 운악산 주변에서도 왕건과의 투석전 설화가 내려온다.

 

 

 

강사골: 왕건의 반역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궁예가 격전을 벌였던 곳인데, 이 일대에 강한 군사들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벌앞골: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라고 하던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평장터, 태평장터:궁예와 왕건이 투석전을 벌일 때 운악산 높은 산에서 신선이 불을 비쳐준 이곳에 장이 서게 되었다. 

 

 

느릅내: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다가 투석전을 벌인 느릅내라는 곳에 쌓인 돌이 고개를 이루었다고 한다. 

 

 

피나무골:궁예의 군사와 왕건의 군사가 대 육박전을 벌인 곳이라고 한다. 그때 군사들의 피가 흐르고 튀어서 나무마다 온통 붉게 물들었다고 하여 피나무골이 되었다.

 

 

설원골:운악산 남쪽 골짜기. 궁예의 군사가 나라가 망했다고 서럽게 울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북한의 평강군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한 궁예의 최후에 관한 전승이 내려온다.

 

 

왕재고개 :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평강 방면으로 도주하기 위해 궁예가 넘어 갔다는 고개이다.

 

 

 

검불랑:궁예가 왕건의 군대와 직접 격전을 하다가 칼을 내던진 곳이라고 한다

 

 

갑기천: 왕건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힘에 부치자 달아났는데 이곳에서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지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궁예는 이 일대에서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먹다가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돌터미:왕건이 삼방 일대의 백성들에게 궁예를 잡으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궁예를 찾아 돌팔매를 하였는 데,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돌을 던져 궁예를 맞추었다고 한다. 돌팔매는 궁예가 죽은 뒤에도 그의 시신위로 계속 행해졌다. 그렇게 하여 돌이 더미로 쌓이게 되었고, 여기에서 돌터미라는 동네이름이 생겨났다.

 

옹주포: 패한 궁예왕의 옹주가 자살한 곳이다.

 

 

 

 

 

 

 

 

 

 

 




 

 

"억지로 연결시키면" 

철원성에서 도망친 궁예는 명성산에서 산성을 짓고 왕건과 대치. 그러나 병사들 중 투항하는 자도 생기고 왕건이 평탄한 지형을 공략하자 소수의 졍예 병력만을 데리고 도망친다. 

 

운악산에서 왕건의 군대와 맞닥뜨리고 투석전까지 벌이며 저항하지만 패배한다. 

 

갑옷과 칼까지 버리며 평강군까지 도망쳐 보리이삭을 먹으며 연명하다가 왕건이 궁예를 죽이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여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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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๑˃̵ᴗ˂̵)و | 작성시간 24.09.29 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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