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비밀의늪
오늘 9월 30일, 며칠 전 살인을 저지른 피의자 박 모씨(30)의 신상 공개 여부가 밝혀진다기에 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기다리고 있는 중...
신상 공개 여부가 결정이 되면 이 글도 타이밍 맞춰서 함께 올릴 예정이었으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결정 여부 뉴스가 나오지 않아, 부득이하게 이 글이 먼저 올라갑니다...
-라고 적었는데 방금 막 공개가 됐네요. 박대성.
혹시 형사 사건의 네이밍이라고 아시나요?
쉽게 말해서 "신정동 살인사건", "엽기토끼 살인사건", "포천 매니큐어 살인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노들길 살인사건" 같은 거예요.
더 말해 볼까요? "화성 부녀자 살인사건",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배산 여대생 살인사건"이라는 이름도 낯설지는 않으시죠?
저 윗줄에 얘기한 사건과 그 밑에 얘기한 사건의 차이점은 뭘까요?
'네이밍'입니다.
예컨대 이런 거예요.
화성 부녀자 살인사건이라고 오랫동안 불렸던 살인사건은, '부녀자'라는 피해자들의 성별을 특징적으로 부각하여 사건 네이밍이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라고 여겨져,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이름을 따서 "화성 연쇄살인사건"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차례 바뀌었죠? 뭘로? "이춘재 살인사건"으로.
이제 경·검찰에서는 이처럼 사건이 일어나면 지역 이름이나 피해자의 특징을 부각해 네이밍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웬만하면 '가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부르기로 한 거죠.
근데 경찰이 그러면 뭐해요. 일단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을 보도하는 기사 헤드라인부터가 서울 연쇄살인사건, 여고생 살인사건, 이런 식으로 갖다 붙이는데.
그러니까 우리 약속 하나 합시다.
언론이 헤드라인에 지역 이름이나 피해자의 성별을 가지고 와서 이름을 붙여대도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잘못된 네이밍으로 피해자를 더 아프게, 피해자의 유가족과 지인들을 더 힘들게, 지역의 이미지를 훼손하여 그로 인한 부수적인 모든 피해를 방지하고자 '가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부르기로.
Q. 이춘재도 나중에서야 이름이 밝혀져서 이춘재 살인사건으로 부르게 된 거지, 처음 이춘재가 범인이라는 게 알려졌을 때에도 이춘재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서 그렇게 부르기가 어렵던데?
A. 그래도 노력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춘재 살인사건이라고 끊임없이 불러서 결국 이춘재 살인사건이라고 부르게 되었잖아요. 이건 다 범죄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춘재, 이춘재 하니까 익숙해진 거예요. 처음부터 익숙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Q. 가해자 이름을 모르면? 미제사건이라든가, 검거했지만 피의자 신상공개가 결정되지 않은 사건의 가해자 이름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불러?
A. 그런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지역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아예 그렇게 부르지 마! 이게 아니라 최대한 지양하자는 거예요.
Q. 지역 이름으로 부르는 걸 왜 지양하자고 하는 거야? 간결하고 피해자 특징도 안 드러나고 괜찮은데?
A. 가해자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졌다면 가해자 사건으로 부르면 되지, 굳이 지역을 언급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불필요하잖아요. 가해자가 그냥 사건을 하필 그냥 그 지역에서 벌인 거지, 그 지역에 무슨 마가 끼어서라든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 지역에서 벌어진 게 아니잖아요. 재난사고처럼 지역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사건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지역 이름이 들어가는 건 애초에 불필요한 건데, 가해자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에는 사건이 어디서 벌어졌는지가 사건의 주요한 특징이 되기 때문에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네이밍이 되겠죠.
Q. 한마디로 지역의 이미지를 지키자는 얘기인 것 같은데 집값 때문에 그런 거야?
A. 아니요.
뭐, 거기 사는 주민들에게 있어서 집값 문제 같은 게 아예 없지는 않겠죠. 더불어 지역의 이미지, 지자체의 절망(...)과 이미지 쇄신을 위한 노력에 드는 부차적인 비용이나 노력 등을 다 따져본다면 피해가 막심한 편이기도 할 테고요.
근데 한번 그렇게 고착화된 네이밍은 나중에 바꾸기가 되게 어려워요.
이춘재로 네이밍 바꾸기까지도 범죄전문가들이 온갖 예능프로 교양프로 라디오 뉴스인터뷰 잡지인터뷰 총동원해서 다 나와서 굳이 굳이 그렇게 불러서 겨우 바뀌게 된 거예요. 그런데도 아직 모든 사람이 '이춘재 사건'이라고 하지는 않죠. 아직도 '이춘재 사건'보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해야 알아듣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한번 정해지면 바꾸는 게 너무 너무 어려워요.
솔직히 생각해 보면, 기분이 썩 좋은 일도 아니긴 하잖아요. 내가 짱짱동에 사는데 짱짱동에서 일어난 사건이 너무 유명해져서 짱짱동 살인사건이라고 불리고 회사에서 여시씨 어디 산다고 했지?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짱짱동이요." 그랬을 때, 다들 "아, 그 살인사건??", "헐 그 토막살인 거기 맞지?", "와, 거기 살인사건 난 데 아니야? 여시씨도 조심해~" 그러면 기분 나쁠 거 아니에요. 그러지 말자고요, 우리.
Q. 이런 것도 여자들만 신경쓰지, 남자들은 신경쓰지도 않아. 여자들끼리만 쓸데없이 서로 서로 더 검열하라고 눈치주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다.
A. 정말 애석하게도요, 맞는 말씀입니다.
근데 진짜 애석한 건 뭐냐면요, 피해자가 죄다 여자잖아요.
무슨 말이냐면, 여자들조차도 그렇게 신경써서 네이밍을 지양하고 바꿔부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거의 대부분의 사건 이름들이 "피해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지역+여대생/지역+여고생/지역+여중생/지역+여직원"사건으로 불릴 게 뻔해요.
그러니까 싫은 사람이 바꿔야지, 어쩌겠어요. 여기에 남자들이 동참해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요만큼도 없어. 근데 우리끼리라도 그렇게 좀 안 부르면 안 될까 하는 거지.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Q. 그래도 이런 건 여자만 하는 것 같아서 별론데. 남자들도 남자가 피해자라고 딱히 신경을 더 쓰는 것 같지도 않고 이런 거 하지도 않잖아.
A. 남자들 엄청 해요. 걔네는 이런 약속도 없이 암묵적으로 잘해.
볼까요?
고유정 살인사건 다 아시죠? 여기에 지역이 어디인 것 같으세요? 제주도? 제주 앞바다? 그래서 뭐라고 불리나요? 제주 바다 토막살인사건? 전남편 살인사건? 남해 바다 전남편 사체 유기사건?
이은해 살인사건이라고 하잖아요. 이은해 사건을 용소 계곡 살인사건이라고 부르는 남자 본 적 있어요? 심지어 이은해는 이은해 혼자 피의자도 아니고 남성 공범이 같이 있었잖아요. 조현수. 이은해 사건이라고 안 하고 조현수 사건이라고 부르는 거 봤어요? 아니면 이은해&조현수 사건이라고 꼬박꼬박 조현수 이름 넣어서 부르는 거 봤어요? 못봤지. 딱 이은해 이름 하나 남겨놓고 나머지 싹 뺐어요. 남자들은 잘만 그렇게 하더라고요.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남자들은 진짜 자기들 필요할 때는 귀신같이 잘한다니까. 이런데도 여자만 노력하는 거 같고 노력이 불필요하다고 느껴지시나요?
Q. 근데 너 뭐...돼?
A. 저는 뭐 안 되는데🥲
2024년 9월 29일, 그러니까 바로 어제 자로 전 프로파일러였던 권일용 교수님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근데 이거는 제가 뭐 어디 따로 녹화나 녹음을 해두지 않아서 증명할 수는 없는데... 하여튼 교수님께 여쭤봐도 좋습니다. 어제 잠깐 행사에서 말씀하셨다고 하실 거예요.
사실 저도 피해자 2차가해만 안 하면 됐다 싶지, 지역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닌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닌 거예요. 그럼 어떡해. 바꿔야지.
자,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그 사건을 뭐라고 불러야 될까요.
박대성 사건.
순천 살인사건도, 순천 10대 여학생 살인사건도, 순천 여고생 살인사건도 아닌
<박대성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