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599615976
2004년 8월 1일 서울 서부 경찰서 강력 2팀 소속의 형사들인 심재호 경사,이재현 순경은 당시 애인에게 흉기를 휘둘러 상해혐의를 받던 이학만을 검거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카페로 출동했다.
원래 이학만 사건은 강력 1팀 소속 관할 사건이었으나 당시 강력 1팀 형사들이 모두 잠복을 나가 강력 1팀 대신 강력 2팀의 심재호,이재현 형사 2명이 이학만을 검거하기 위해 출동했다.
두 형사는,이학만을 발견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던 중 이학만은 품에 숨긴 흉기를 꺼내 심재호 경사의 옆구리와 심장을 찌른 뒤 본인을 검거 하려 던 이재현 순경의 등을 몇 차례 찌른 뒤 달아났다.
이학만의 흉기 공격으로 서울 서부 경찰서 강력 2팀의 유능한 강력계 형사 2명이 순직하는,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경찰은 공개수배를 발동해 이학만을 추격하기 시작했으며 현상금 역시 2,000만원으로 책정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던 이학만은 8월 8일 할머니와 손자가 거주하는,가정집에 침입 할머니와 5살 된 손자를 위협하며 본인이 경찰관 2명을 죽인 살인범이라며 피해자들을 협박했다.
이때 할머니가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 이학만을 진정 시키며 시간을 끌었으며 진정한 이학만은 할머니에게 경찰관들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며 가정집에서 뉴스 기사를 검색하며 경찰의 동향을 살폈다.
할머니는 컴퓨터를 하는 이학만에게 청소를 해야 한다며 진공 청소기를 크게 튼 뒤 아들에게 자신의 집에 이학만이 있다며 112 신고를 부탁했고 이에 아들이 경찰에 신고하며 경찰은 이학만이 숨은 집 주위를 포위했다.
할머니는 5살 된 손자를 안고,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으며 경찰이 가정집에 들어가 이학만을 포위하자 이학만은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며 저항했지만 끝내 경찰에 검거 된 뒤 이대목동병원으로 후송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학만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현재 무기수로 복역하고,있지만 이학만의 손에 순직한 심재호,이재현 두 형사의 가정은 박살났다.
심재호 경사의 경우 1남 1녀의 아버지로 무궁화 견장을 어깨에 달고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하는게 소원이었던 평범한 가장으로 아내 분과 아들은 무궁화 견장의 제복을 남편,아버지가 순직 한 뒤에 받았다.
이재현 순경의 어머니는,아들이 순직하자 큰 충격을 받으셨으며 20년 뒤 방영된 꼬꼬무에서 트라우마로 칼을 못 잡는다며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아들이 생각난다고 하셨다.
심재호 경사와 이재현 순경은 경위,경장으로 1계급 특진과 순직 판정을 받아 대전국립현충원 경찰관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유족들은 약 4천 만원의 순직 보상금을 받았다.
심재호 경장,이재현 경위의 죽음은 대한민국 경찰관 처우 개선의 첫 발걸음이 된 사건으로 2004년 당시 두 형사는,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제대로 된 무장을 하지 못하고 범인 검거에 나섰다가 순직했다.
두 형사의 순직 이후 테이져건 개발이 시작됐고,경량화 된 보호복이 일선 경찰서와 지구대에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국회에서 위험 직무 관련 순직 공무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기초가 되었다.
심재호 경장의 아들인 심우연 군은 아버지와 같은 경찰이 되기 위해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해 경찰의 꿈을 꾸고 있고 부인 황옥순 씨는 남편의 순직 이후 남편을 그리워 하는 일기를 매년 쓰셨다.
무기수로 복역 중인 이학만은 반성 없이 본인들의 가족이 고통을 받고 있다며 기자들에게 제대로 취재를 하라는 옥중편지를 작성했는데 이를 읽은 꼬꼬무의 게스트 류승수는 미친 X이라며 이학만의 옥중편지 복사본을 단숨에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