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흥미돋]왕비의 무덤 앞에서 고인드립을 친 인물이 있다?

작성자세차|작성시간24.10.29|조회수1,592 목록 댓글 0

출처: https://www.fmkorea.com/7619992135

 

 

 

이번 글에서는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보려고 해

 

* 단의왕후는 경종의 부인으로 남편이 왕이 되기 전에... 향년 33세로 사망하여 생전에는 사실 왕비가 아니었지만... 경종이 즉위하고 단의왕후로 추봉됨(원래 숙종이 정한 처음 시호는 '온의'였으나 그녀의 12대 조상이 심온이었기 때문에... 단의로 시호가 변경되었으므로 참고 요)

 



이 혜릉과 관련한 사건은

 

이른바 '유성한의 흉소' 사건으로 이슈화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

 

정조는 4월 초파일 통금을 해제하고 도성의 백성들에게 연등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어

 

그런데 그것과 관련하여 사간원 정언 유성한이 

 

왕이 공부도 안하고 여악이 난잡하게 논다는 식으로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결국 정국에 파장을 일으킨 것

 

* 여악은 궁중 또는 지방 관아에서 악가무를 공연하는 여자 악인이나 그녀들이 공연하는 악가무를 말하는데... 연등절에 여악이 대궐로 들어왔다는 것은...  대궐의 건너편 춘원에서 장수들이 여악을 불러 논 것을 그렇게 쓴 것으로... 현대였어도 '가짜뉴스' 혹은 '왜곡기사'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음(게다가 정조는 절대로 학문에 게을렀던 인물이 아니었으니...)

 

* 이는 정조가 실시한 '도산별시(이 과거가 시행된 표면적인 이유는 '서양의 사학'이 서울로부터 퍼져나가 기호 지방까지 미친 와중에 유독 영남의 70여 고을만은 한 사람도 오염되지 않은 것을 정조가 선정 즉 퇴계 이황의 교화 덕분으로 칭송하며 영남유생들을 대상으로 별시를 베풀음)'와 관련하여 노론 벽파의 불만이 반영되었다는 시각이 있는데... 시간적으로도 불과 십여 일 뒤 유성한의 상소가 있었고... 도산별시는 이인좌의 난 이후로 금지되었던 영남 유생의 과거 응시를 공식적으로 해제한 것이자... 그러한 조치를 통해 그들을 정권의 우호 세력으로 삼으려는 정조의 뜻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야(기호 남인의 천주교 문제도 관련이 있었는데... 정조는 그것에서 자유로운 영남 남인을 등용하여 그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

 

* 거기에 유성한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임오의리'를 두둔하는 듯한 태도가 같이 문제가 되었는데...

 

* 이는 이 문제가 명백한 당파적 대결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 정적들에게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유성한은 '역적'으로 공격받게 됨

 



그리고 이 문제에 현직 대간인 윤구종이 연좌되는데

 

유성한과 같은 당파에 속했던 윤구종은...

 

이 사태와 관련하여 '광병'에 걸린 것을 이유로 침묵을 지켰는데...

 

반대파들은 갑자기 광병이 생겼다는 것은 핑계이며 왕의 부름을 어겼다고

 

윤구종도 공격하였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윤구종이

 

단의왕후에 대한 고인드립 문제가 터져 나왔어

 

윤구종은 빈번이 혜릉의 홍살문을 지났는데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 곧바로 지나가도 괜찮다"고 

 

단의왕후의 능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음은 물론

 

왕비로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인드립을 쳤다는 것....

 

* 게다가 윤구종은 숭릉(현종과 그의 왕비 명성왕후의 능)의 별검으로 있으면서 그런 드립을 쳤다는 것인데... 왕실의 능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고의적으로 왕실과 관련한 예법을 어겼다는 것이야...

 



물론 윤구종은 이러한 혐의들을 부정하였는데

 

자신은 진짜 정신병에 걸린 것이 맞으며 ㄷㄷㄷ

 

단의왕후의 무덤 앞에서 고인드립을 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지...

 

* 정조가 경종의 직계는 아니었지만... 경종은 명백히 종묘에 모셔진 조선의 군왕으로... 아무리 노론이었다고 해도 대놓고 경종이나 경종의 왕비를 모독하는 것은 빼박 '역적'으로 몰릴 수 밖에 없는 사안이었어...

 

* 영조도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경종을 '황형'으로 칭하며... 형의 은혜를 칭송하는 입장이었고...

 



하지만 윤구종이 단의왕후의 무덤 앞에서 고인드립을 쳤다는 증인들이 나왔고...

 

윤구종 본인 또한 곤장 25대를 맞자...

 

본인이 그런 적이 있다고 인정하였는데...

 

더 나아가 "신하로서의 절개(경종에게)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고 하였지...

 

* 윤구종이 매를 못 이겨 허위자백을 하게 된 것인지...

 

* 매를 맞아 실토를 하며 노론인 자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것인지는...

 

* 솔직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 윤구종의 운명은 그것으로 사실상 결정되었지...

 



이러한 보고를 들은 정조는

 

"이게 무슨 흉악한 말인가?" "이게 무슨 흉악한 말인가?"라고 반복하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역적이 있단 말인가?"라고 

 

충격과 분노를 표시하였고

 

선왕의 효성과 우애를 언급하여

 

경종과 영조는 '사이좋은 형제'였다는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을 재확인함

 

* '역적 윤구종'은 결국 국문 과정에서 사망...

 

* 아이러니한 것은 애초에 이 사건의 시작이 된 유성한은 정조의 비호로 살아남음(윤구종: ㅅㅂ...)

 



이 사건의 파장은 분명히 굉장하였는데

 

당시 좌의정으로 남인이었던 체제공은

 

사대부들 사이에 문호가 갈라져 자기에게 이롭게 하기를 국가 호위하는 것보다 먼저하고 당파 비호하기를 임금 높이는 것보다 중히 여긴다고 당대의 세태를 비판하며

 

윤구종을 경종의 역적으로 유성한은 선세자(사도세자)의 역적으로 칭함

 

* 결국 노론 인사들이 국가나 왕보다는 사리사욕과 당파적 이익을 앞세운다고 비판한 것이자... 사도세자의 죽음 문제를 들고 나온 것으로...

 



이 사건은 역사상 첫 '영남만인소'로 이어지게 됨

 

* 제 1차 영남만인소는 두 차례에 걸쳐서 이뤄졌는데... 사도세자의 복권을 요구하였고, 정조는 그것에 감격하면서 유생들에게 여비를 주어 돌려보내고 ... 이들을 대표한 소수 이우를 경종의 능인 의릉을 관리하는 참봉으로 임명하기도 함

 

* 글을 마칩니다.

 

*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