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616203749
브금
이야기에 앞서
조선시대 노비의 생활을 논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전근대 농경사회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농민 계층은 하나같이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된 일생을 살아내야만 했다는 것이다.
농민과 엄격히 구별되어 성스러운 업(業)에만 열중했던 농경사회의 귀족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단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동류의 인간종으로도 여기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귀족들은 오직 한 순간, 성스러운 그 순간만을 위해서 평생토록 먹고 사는 것과는 상관 없는 무언가를 갈고 닦았다. 사람이라면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의 격리, 역설적으로 그것이 귀족을 이 세상의 유일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조선에서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자들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양인과 천인이었던 바, 그 고됨 정도는 당연히 양천 사이의 차이보다 귀족(양반)과 농민(상놈) 사이의 차이에서 완연히 드러났을 것이다. 반상(班常)의 법도는 지엄했다. 노비도 상놈도 쟁기를 서로 공유했다. 노비는 그저 멍에 하나를 더 메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노비의 생활수준을 양인과 비교하여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도, 인간이 타인의 사적 소유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지나치게 추화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일일 것이다. 농민도, 농노도, 노비도, 노예도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핏빛 땅에 매여서 착취와 고통뿐인 인생을 살다 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특별히 노비만을 따로 골라 알아보아야할 이유가 있는데, 조선에서 노비라는 존재는, 시대의 유일한 인간종이라는 사람들이 드리운 가장 짙은 그림자이자, 실제로 드리워져 있으나 쳐다보면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해 차라리 쳐다보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허영청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 집은 오직 미래의 내락된 사람들에게만 가택 출입권을 주는 바, 그 곳에 들락거리는 것을 통해 우리는 언제든지 조선이라는 시대의 의미를 겉과 속을 까뒤집어 더듬을 수 있는 것이다.
# 어떻게 노비가 됐을까?
한 인간이 노비 신세로 전락할 때의 경위는 제각기 다양하다. 가장 흔한 경우는 태어나고 보니 노비였던 경우, 즉 출산이다. 그러나 임금, 제후, 장수, 재상의 씨앗이 세상 시작할 때부터 각기 따로 구별되어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분명 노비가 되었던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째서 노비 신세로 전락했던 것일까?
고조선 법률의 팔조법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고려시대 이전까지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혼란했다. 서로 다른 정치체들끼리의 전쟁이 빈번했고, 그로 인해 대량으로 발생한 전쟁포로들은 노예적 신세로 전락했으며 대대로 그 신분을 세습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에 통일된 정치체가 들어서자 드물게 반역자가 나올 경우에야 그들의 가족이 연좌되어 노비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광범위한 전쟁포로의 발생은 옛 말이 되었다.
## 스스로를 팔다
복쇠라는 사람이 본인과 본인의 처를 박승지댁 팔았다는 내용을 보여주는 자매문기(自賣文記)
고려 건국 이후 한국사에서 노비의 발생은 주로 먹고 사는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바깥으로는 고리대로 인한 탈점이 벌어졌고, 안으로는 스스로 노비로 파는 자매(自賣)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양인이었던 자가 노비 신세가 되는 것을 두고 압량위천(壓良爲賤)이라 한다.
조선시대 압량위천의 대부분은 군역과 부세 등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나 그 가족을 권세가나 국가기관에 팔아버리는 형태로 나타났다. 공노비의 신공은 시대에 따라 구체적인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면포 2필 정도, 사노비도 그 쯤 되었는데, 양인이 군역을 직접 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 그보다 배 이상의 면포를 나라에 갖다 바쳐야만 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말의 가격은 가장 우수한 종자의 경우 40필이었는데, 노비 가격이 그와 비슷했다. (왕조의 초창기에, 노비는 말의 반값도 되지 않았다.)
이들은 위세를 떨치는 대감집에 찾아가 자신이 도망한 노비거나 도망한 노비의 자손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다. 때로는 노자(奴子: 남성 노비)와 양인 여자 사이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더 치밀하게는 아예 문서(白文)를 위조하여 상속 또는 매매문기를 작성한 뒤 어떻게든 관의 입안(立案)을 받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양반은 이들에게 속거나, 짐짓 속아주는 척 하며 노비로써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범죄는 본래 압량위천의 율(壓良爲賤律)로써 처벌되었다. 대명률에 근거하여 적발된 이들은 장 80대와 함께 일반 군인들보다 훨씬 가혹한 수군에 강제 배치되었는데, 세조 대에 이르면 장 100대와 일가족의 변방 이주(전가사변(全家徙邊))로 처벌이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가혹한 처벌의 조항이 있었음에도 양인이 자발적으로 신고하지 않는 이상 사실상 적발되기 힘들었기에 감시를 피해 스스로 노비가 되는 일은 조선 전기 내내 지속적이고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하여 명종 대에 이르면 아예 전가사변의 처벌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스스로를 팔아 노비가 된 이들을 자매노비(自賣奴婢)라고도 한다. 조선후기로 접어들수록 스스로를 팔아 노비가 된 자들에 대한 처벌은 더욱 더 느슨해졌다. 이전에는 문서를 위조하여 관의 감시를 피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지만, 조선후기에는 아예 대놓고 자매문기(自賣文記)를 작성하였으며 이에 대한 관의 대응은 아예 그 자매문기에 입안(立案)을 내려 공식적인 인정을 해주는 것이었다.
## 처자식을 팔다
그런데, 자매노비 중에는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처자식이나 형제남매를 함께 노비로 파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양인 가장(家長)이 스스로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 그러니까 처자식만 노비로 내다파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외조부모가 외손자녀를 매매한 사례도 있다. 보통 자매(自賣) 행위가 빈번하게 이루어진 시기는 흉년과 기근으로 당장 먹고사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때였기에,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파는 이들이 제각기 어떤 사연을 갖고 있었을지는 짐작할만 하다.
일흔 노모의 병구완을 위해 스스로를 팔거나, 부모가 죽었는데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스스로를 파는 경우가 허다했다. 열 다섯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자식들이 효도를 위해 스스로를 내다팔기도 하였다.
한가지 의문을 가져봄직 하다.
스스로를 팔았던 것에 정말로 이러한 '명분'은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열 다섯도 되지 않은 상민 아이들이 그 정도로 효도의 가치를 내면화할 수 있었을까?
혹, 효로 포장된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부모가 자신들을 제외하고 자식들만을 내다파는 내용의 자매문기가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어두운 동기를 암시하는 듯 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