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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1930년대의 경주 모습 모음

작성자세차|작성시간24.11.05|조회수6,991 목록 댓글 2

출처: https://www.fmkorea.com/7634606274

경주역

1918년 영업 시작.

건설 당시 총독부 관헌의 방침에 따라, 경주와 같이 역사적 배경이 있는 고장의 철도 역사는 한옥 양식을 차용하여 지어지게 되었다.

 

佛國寺

불국사




佛國寺 三層石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鷄林

계림

신라의 왕족인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소나무 숲.



鮑石亭址

포석정지



掛陵

괘릉

1950년대까지는 유골이 바다에 뿌려진 문무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가묘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원성왕의 릉.



五陵

오릉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 총 5명의 무덤.



태종 무열왕릉의 귀부



芬皇寺 模塼石塔

 

분황사 모전석탑



瞻星臺

첨성대



慶州 石氷庫

경주 석빙고

조선 영조 14년(1738)에 처음 조성된 석빙고.



柏栗寺

백률사 원경

이차돈이 순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石窟庵

석굴암






 

 

瓢巖

표암

표암이란 ‘박바위’, ‘밝은바위’를 뜻하는데, 신라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 하여 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9년 6촌장이 첫 화백회의를 개최한 장소이기도 한, 사실상 신라가 탄생한 곳.

 

 

雁鴨池

안압지


 

옛 신라의 천년고도로 명성이 드높던 경주의 1930년대의 풍경.

 

조선 왕조 당시의 숭유억불 기조는 유생들로 하여금 이전의 불교계 집권층의 사치와 향락, 혹세무민의 상징이었던 경주의 불교 유적에 대해 회의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자연스레 가지게 했으나, 그래도 불국사와 같은 주요 사찰은 조선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이따금씩 여러 군왕들에 의해 번듯하게 중창되기도 하며 신라의 옛 영화는 그런대로 명맥이 이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세도 정치 이래 국운이 기운 구한말, 경주 도처의 여러 사찰과 석탑, 석굴암과 같은 고적은 초목이 무성한 채 그 형태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인, 가히 목불인견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경주의 옛 불교, 신라계 고적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와 근대적인 보존사업이 제대로 펼쳐지기 시작된 것은 뭇 조선인들에게는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선 얄궂을 일일지 몰라도, 1910년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집권기의 조선총독부 관헌과 일본의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주된 계기로 한다.

새롭게 합병된 외지에 위치한 일본의 고적이 된 불국사와 석굴암 복원사업은 비록 당대의 기술적 한계는 있으나(석굴암의 내부 보강을 위해 콘크리트를 들이붓는다던지) 총독부 입장에서도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학술적 관심을 두고 펼쳐진 일이었으며, 이렇게 구한말의 목불인견의 꼴은 벗어난 경주의 여러 유적들은 1930년대에 이르면 금강산의 정경과 평양의 고적들, 경성의 고궁들과 함께 식민통치 시기 조선의 주요 관광 명소로 홍보되며 총독부의 근대화 사업의 치적으로 선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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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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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부리부리대머리독수리 | 작성시간 24.11.05 이런거보면 진짜 신기해
  • 작성자매직키보드 | 작성시간 24.11.05 내 최애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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