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636680881
김홍일 장군(1898~1980)
태극무공훈장 / 건국훈장 독립장
한국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군인 겸 정치인
누가 보면 픽션이 아니냐고 의심할만한
어마어마한 경력의 소유자
임정 합류 전 장제스 휘하에서 국민군으로 활동했으며
외국인으로 중장까지 진급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음
(국민군 활동 당시 김구선생의 요청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에 사용된 폭탄을 제공함)
후에 임정에 합류하여 광복군 참모장으로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광복 후 이승만의 특별지시로 육군 준장, 육사교장으로 활동함.
6.25 개전 초기 국군 지휘부가 혼란에 빠진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소방수로 등장, 흩어진 병력을 모아 한강 이남 방어선 구축했고
미군과 협력을 통해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북측의 공세를 방어함.
낙동강 방어전에서도 큰 활약을 했고 중장으로 예편함.
후에 중화민국 대사를 수행했고 한일협정 이후에 정계에 투신하여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함.
유신체제를 반대했으며 광복군 회장을 맡기도 했음.
최용덕 장군(1898~1969)
태극무공훈장 / 건국훈장 독립장
"올해는 기어코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들의 뇌로서 만들어져 나올 비행기를 자체 제작하고 싶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비행기로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비통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외교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그후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하여 비행사가 됨.
공군기지사령관까지 역임하며 활동했으며
의열단으로도 활동했으며 김상옥 열사의 의거를 지원하기도 했음
후에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으로 활약함
광복 후 국방부 차관, 항공기지사령관,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공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이 당시 휴전까지 공군의 모든 작전을 총괄함.
최용덕 장군은 우리 손으로 만든 항공기를 꿈꿔왔고
항공청을 설립하여 결국 1953년 한국최초의 경비행기 부활호를 제작함
(2004년 복원, 최초의 부활호는 소실됨)
후에 체신부 장관,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1969년 8월 15일 자택에서 영면
최용덕 장군은 월급 대부분을 후배나 남을 위해 써버리고
집 한칸 마련하지 못했고 부인이 장사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부와는 거리가 먼 청빈한 삶을 살았음.
아래글은
최용덕 장군과 우정을 나눴던 이은상 시인이 영결식에서 쓴 추도사
오늘 아침, 낯익은 벗들 공군 장병들 다 모였는데 장군은 혼자 어디로 가십니까
당신은 이 나라 공군의 아버지 아들들 무럭무럭 자라는데 장군은 돌아서 어디로 가십니까
<중략>
한인전선에서 조각조각 부숴진 다리뼈 피눈물 괸 독립운동의 표본으로
절뚝거리며 다니던 불구장군 이 땅에 우글거리는 사상의 불구자
지조의 불구자들을 꾸짖던 걸음걸이 병과, 가난과, 유혹도 비웃으며
다만 광복된 조국 땅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더니 장군은 문득 어디로 가십니까.
<중략>
그 높고 맑은 인간성 그 나라 사랑하던 정신과 지조
남은 우리들 가슴 속에 새겨졌기에
오늘 아침 당신 관 위에 태극기 덮고
원하던 조국땅, 포근한 흙 속으로 꽃이랑 먼저 보내옵니다.
보내며 마지막 드리는 말씀
몸은 비록 흙 속에 묻힐지라도
넋은 저 해와 달과 별들과 함께 조국 하늘을 지켜주소서.
이준식 장군(1900~1966)
태극무공훈장 / 건국훈장 독립장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어린 시절부터 군인 되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 고급장교로 활동하며 임정을 지원함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합류하였고 해방이 될 때까지 임정 및 광복군 활동을 함.
해방 후 수도사단장을 지내며
지리산 공비 토벌 및 38선 경계임무로 공을 세웠고
6.25 전쟁 당시 영덕지구 전투에서 방어에 성공하는 공을 세움.
장철부 중령(1921~1950)
태극무공훈장 / 건국훈장 애족장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대한민국의 마지막 기병대장
본명은 김병원(金秉元)으로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에 합류, 항일 유격대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김구의 추천, 권유로
중화민국 군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했고 1947년에 졸업했다.
47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입교하여 장교에 임관됐으며
과거 중화민국 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한 이력으로
독립기갑연대 휘하 제2수색기마대대장에 임명됐다.
6.25 발발 이후 그가 소속된 독립기갑연대 장갑차들은
북측에 밀려 손망실됐고 결국 장철부 휘하 기마대대가
부대의 핵심이 됐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지연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공주-대평리 전투 당시
미군 제 63포병대대 소속의 B포개가 약 400여명의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위기에 놓이자 그가 지휘하는 기병중대가
적의 배후를 타격하여 미군의 탈출을 도왔으며
이 전공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전사에 기술돼 있다.
1950년 8월, 청송전투에서 적에게 포위되었고
그는 '포로가 되는 수치와 불명예 대신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며
권총으로 자결을 선택했다.
잘모르기에 베댓펌..
건군초기에 일본군, 만주군, 관동군 등등 다양한 출신의 장군들도 합류하여 우리군의 모태가 되었지만... 저렇게 젊은시절 독립운동만을 위해 일하시던 분들이 해방된 조국의 군인으로도 활동하시는게 진짜 참군인이라고 생각함
참고로 장철부중령이 전사하신 전투인 청송전투는 인민군 766유격대가 참여했는데 조선의용군 출신들이며,
포화속으로(영화)에도 나온 악명높은 인민군의 정예부대임.
맞음. 이거 글쓰려고 자료찾다보니 인민군 유격대가 같이 독립운동했던 사람이니까 항복하라고 권유했다는 설이 있었음. 근데 그게 위키에 나오는거라 사실여부 확인이 안돼서 글에 쓰지는 않았음
최용덕 장군이 대단한게 공군 창설을 위해서 병 계급부터 시작하는 수모도 감내하셨고, 당시 친일파 출신이 대부분이던 조종사들도 포용해서 공군 창설에 중추 역할을 하심..
그리고 공군가 작사도 하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