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흥미돋이야기해주는여시
오늘 글의 주인공은 청나라 건륭제의 두번째 황후인 계황후 휘발나랍씨임. 중국 드라마에 꽤 자주 나옴.
영화 화광여인 여주 = 위의 짤, 연희공략의 휘발나랍 숙신, 여의전의 오라나랍 여의, 황제의 딸 황후 등등등.
(화광여인&여의전에선 주인공이고 연희공략&황딸에선 악역임)
자 일단 계황후의 남편인 건륭제는 누구시냐
청나라의 6번째 황제로, 강건성세의 마지막 주인공임.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리즈시절을 강건성세라고 부름. 이 당시 청나라는 인구가 거의 4억 명에 막강한 경제력까지 갖춘 초초초 강대국이었음. 역대 중국 대륙의 모든 통일왕조 중 가장 쎈 나라를 꼽자면 강건성세 당시의 청나라와 원나라일 정도.
참고 1 : 매우 장수한 황제임. 87세에 사망했는데, 이 사람이 18세기 사람이란 걸 고려하면 으마으마한 장수임. 초상화가 할배인 것도 노년에 그려진 초상화라 그럼.
참고 2 : 청 건륭제 치세는 조선의 영조&정조 시대임. 건륭제 즉위 당시 조선은 영조 11년이고 사망 당시는 정조 23년임. 건륭제가 영조보다 17살 어리고 + 영조보다도 오래 살아서 정조 시대까지 넘어감ㅇㅇ
참고 3 : 후궁견환전은 건륭제 윗세대의 이야기임.
후궁견환전 황제 = 옹정제 = 건륭제 아빠
후궁견환전 견환 양자 = 4황자 애신각라 홍력 = 건륭제
일단 미리 알아둬야할 게, 청나라 황제들은 대부분 한 여자한테 깊게 꽂히는 경향이 있었음. 뭐 유전자에 각인된 것마냥ㅇㅇ
(물론 청나라 황제가 전부 다 그런 건 아님. 강희제는 오히려 여성 편력이 심한 편이었음. 다른 왕조였으면 한둘 나오고 말았을 수준의 찐사가 청나라에선 이례적으로 잦았다 정도)
순치제 이야기가 이 글을 읽는데 필요한 사전지식이기도 하고 얘네 이야기 자체가 나름 흥미돋이니 짧게 요약해보자면
- 숭덕제 : 청나라의 두번째 황제이자 나라의 기틀을 다진 사람임. 건륭제에겐 고조 할아버지인데, 해란주라는 후궁한테 반평생 미쳐 있었음.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잖음? 만주족은 원래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그냥 대충 짓는 편임. 근데 해란주가 첫 아들을 낳자 해란주와 혼인하기 전 다른 후궁들에게서 본 아들이 일곱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황제가 된 후 태어난 첫 아들이니 이 아이야말로 진정한 황제의 장자다”라며 대사면 선포 + “이런 소중한 아이의 이름을 다른 아들들처럼 대충(...) 지을 수 없다”며 저명한 유학자들을 불러다 이름을 지으라고 명령함. 미친놈ㅋㅋ
해란주가 병으로 급사할 당시 숭덕제는 명나라 잔존 세력과 전쟁 중이었는데, 해란주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군대를 버리고 5일 밤낮을 달려서 돌아옴. 얼마나 강행군이었는지 말 다섯 필이 지쳐서 죽어버림. 그러나 숭덕제가 도착했을 때 이미 해란주는 죽은 후였고, 숭덕제는 대성통곡하다 실신해서 하루 넘게 못 깨어남. 대신들 피셜 “황제가 울다가 뒤진 줄 알았다(...)”
숭덕제는 해란주가 죽은 후 아예 다른 사람이 됨. 극심한 우울증 수준의 슬픔에 빠져서 장례를 국상으로 치르고 + 해란주의 장례 기간에 제대로 애도하지 않았다며 황족들을 처벌하고 + 해란주는 어디까지나 일개 후궁인데 해란주의 3년상을 치르겠다며 모든 연회에 불참하고 + 심지어 해란주의 죽음을 기점으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서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지도 죽음
- 순치제 : 청나라의 세번째 황제이자 숭덕제의 아들로 건륭제에겐 증조할아버지 되는 사람임. (해란주의 아들은 아님. 해란주가 낳은 아들은 돌이 되기 전에 사망함. 순치제는 해란주의 아들이 죽고 이틀 후에 다른 후궁한테서 태어난 애라 아버지 관심은 한 조각도 못 받아봤음.)
이쪽은 한 술 더 떠서 동악비라는 후궁한테 평생을 미쳐 있었음. 원래 황후를 책봉할 때만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는데, 동악비를 황귀비로 책봉하면서 천하에 조서를 반포함. 즉 황후로 책봉하지만 않았을 뿐 대우는 거의 황후처럼 한 거임.
(황후가 가만히 있어요? -> 순치제의 친모인 태후는 몽골 출신이었고 순치제의 황후도 몽골 출신이었음. 순치제는 어머니랑 극도로 사이가 나빠서 어머니가 정해준 몽골 출신 황후도 죽도록 싫어했음. 황후 의사를 고려할 이유가 없었음. 태후도 동악비를 매우 싫어해서 황귀비로 책봉하는 거 반대했는데, 태후가 병석에 누운 틈을 타서 순치제가 밀어붙인 거임.)
동악비가 아들을 낳자마자 황태자에 봉하려고 했는데, 이 아이가도 요절함. 엄청난 충격을 받고 쇠약해진 동악비는 자금성에 천연두가 유행할 때 그대로 급사했는데, 순치제는 동악비 사망 후 “동악비가 없는데 내가 살아서 뭐하냐, 따라 죽고 싶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실제로 자살 시도까지 함.
그 후 순치제는 대신들 반대 다 쌩까고 동악비를 황후로 추존하고 국상으로 장례 지냄. 할 일 다 하고 삶의 의지를 아예 잃었는지(...) 동악비가 죽고 네 달 만에 똑같이 천연두로 뒤짐.
이 글의 서브 주인공인 건륭제도 조상님들만큼은 아니지만 좀 한 여자에 심하게 꽂히는 성향이었음. 다만 조상님들이랑 차이점이 있다면 심장이 여러개셨음. 꽂혀있는 동안은 그 사람한테 존나 찐사랑이긴 한데 따라 죽거나 수절할 정도는 아니라 그 사람이 죽으면 새 사랑을 찾는 너낌.
(사실 건륭제가 정상인 거고 따라 죽는 놈이 비정상이거든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음...일단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소임은 후계자 생산임. 이 때는 유아 사망율이 엄청 높은 시대였기 때문에 자식을 한둘 낳아선 안 됨. 당장 위에 해란주랑 동악비가 낳은 아들들도 죄 다 한 살 되기 전에 요절했잖음.
특히 청나라는 황제의 혼인이 일종의 결혼 동맹 역할도 했었음. 청나라의 핵심 군사 제도인 팔기군만 봐도 만주족, 몽골족, 한족이 섞여 있었음. 숭덕제랑 순치제의 황후도 몽골족 여인이었고ㅇㅇ 국사 시간에 배운 태조 왕건의 결혼 동맹이 어쩌고 그거 생각하면 됨. 대충 비슷함.
또 만주족은 장자 상속의 원칙이 없었음.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좀 바뀌긴 하는데 강희-옹정 시대까지는 여전히 만주족 관습이 많이 남아 있어서, 아들을 여럿 두고 그들 모두를 교육하면서 지켜보다가 가장 자질이 훌륭한 황자를 후계로 지목해두고 죽는 식이었음. (적장자를 세자로 못 박는 조선과 비교했을 때 어디가 더 좋다고는 말하기 힘듬. 각각 장단점이 있음)
그래서 황제, 특히 청나라 황제는 자식을 많이 두는 게 최우선 덕목이었고, 아예 의무적인 합방일이 있었음. 황후 + 비빈들과 골고루 합방하라고 법에 정해져 있음.
예를 들어 숭덕제는 반평생 해란주에 미쳐 있었지만 해란주가 임신 중이던 시기엔 다른 후궁과 합방함. 숭덕제가 선택한 게 아니라 황후가 다른 후궁을 지목해서 “해란주가 회임 중이라 황상의 시중을 들 수 없으니 누구누구가 황상의 시중을 들게 하시라” 간언함ㅇㅇㅋㅋ(이걸 계기로 태어난 애가 순치제임)
동악비한테 찐사랑이었던 순치제의 경우도 비슷함. 동악비는 엄청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순치제의 생모인 태후는 평생 동악비를 싫어했는데, 동악비가 순치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음. 각각 출신 성분과 가문이 다른 후궁들을 골고루 공평하게(?) 총애해야할 황제가 동악비한테만 꽂히니 동악비의 존재가 내명부에 해가 된다고 여겨서 싫어한 거임.
(참고로 특정 한 명이랑만 계속 합방하면 황후 태후가 지랄하는 수준에서 안 그치고 아예 대신들까지 상소 올리면서 님 왜 그러냐고 난리침. 황제도 은근 극한직업;;)
동악비 죽고 20대 초반에 따라 죽은 순치제만 봐도 후궁 35명이 있었고 14명의 자식을 둠. 강건성세의 시작인 강희제는 총 62명의 후궁한테서 55명의 자식을 둠.
건륭제는 황후가 둘에 후궁이 49명 있었고 청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 산 황제인데도 자식은 강희제의 절반 수준인 27명임. (이중 17명이 아들인데, 건륭제 사망 당시 생존해있던 아들은 고작 넷임. 물론 건륭제가 매우 장수한 영향이 크지만 당대의 영유아사망률이 얼마나 극악이었는지 엿볼 수 있음)
건륭제의 특이한(?) 점은 수많은 후궁 중에서 특정 몇 명만 총애했고 자식도 다 그들한테서만 얻었단 거임. 건륭제의 아이를 둘 이상 낳은 여인은 두 황후 + 다섯 후궁해서 일곱 명이 전부인데, 그 중 영귀비와 용비 두 명을 제외하면 전부 황자 시절 결혼한 여자들이었음.
여튼 이런 건륭제가 처음으로 꽂힌 여자는
본인의 첫 황후인 효현순황후였음. 부찰황후라고도 부름. 일단 이 글에선 편의상 황후라고 부르겠음.
건륭제가 아직 황자였던 시절 아버지 옹정제의 명으로 결혼한 적복진 (정실 부인)임. 남편 건륭제가 황제가 되자 자연스럽게 황후 책봉을 받음.
실제 역사의 청나라 내명부는 철저한 서열제라 출신 가문을 엄청 따졌음. 황후는 유서 깊은 명문가 출신 규수에, 옹정제가 직접 뽑은 며느리란 명분도 있고, 건륭제의 아들도 둘 낳았고, 성격도 어질고 검소하고 자애로운...말 그대로 완벽한 황후였음. 이상적인 황후의 교본 같은 사람임.
건륭제는 결혼하고부터 늘 황후를 총애했고, 황후가 죽은 후에도 평생 그리워함.
- 황후가 낳은 아이들이 연달아 요절하며 황후가 우울해하자 황후를 위로해주겠다며 함께 산동성으로 여행을 감
- 근데 이 여행 중 황후가 사망하자 황후가 여행 당시 탔던 배를 통째로 자금성으로 옮기라고(...) 지랄을 하고, 황후가 사망한 지역엔 두 번 다시 가지 않음
- 황후가 죽었는데 제대로 애도하지 않는다며 대신들을 파면하고, 몇몇 서출 황자들한테도 같은 이유로 ‘최악의 범죄자’라고 일갈하며 처벌하고 황태자 후보에서 영영 제외시켜버림
- 황후가 사망한 후 성격이 바뀌어서 잔인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 죽은 황후를 위한 제를 지내는데 올라온 제물이 더럽다며 관리자를 강등하고 채찍형을 내리는데, 이 관리자가 건륭제가 오래 총애하고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영귀비의 친아버지였고(...)
- 황후가 마지막으로 준 자수 선물을 얼마나 소중히 간직했는지 아직까지 완벽하게 보존돼서 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 황후의 아들이 요절하자 황태자의 예로 장례를 지내고
- 공주들은 원래 몽골쪽 사람과 결혼하면 전부 몽골에서 살았는디, 황후의 자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주가 결혼할 때 “내 딸을 멀리 보낼 수 없다”고 게거품을 물어서 이 공주는 결혼 후에도 북경에 거주했고
- 이 딸이 낳은 아이, 즉 손자의 이름은 건륭제가 손수 지었고
- 건륭제는 황후가 죽고 51년이 지나서 승하했는데,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지은 시도 황후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음미친새끼
(여담으로 건륭제의 황후 사랑은 황후가 죽은 직후 가장 심했다가, 좀 잔잔해졌다가, 건륭제 본인이 죽기 직전 다시 불 붙는 경향을 보임. 사실 건륭제가 황후한테 정말 찐사였다고 보기 애매한 게, 황후 사후 1년 동안 극도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나랍씨를 미친듯이 총애하고 특혜를 쏟아부음. 황후가 죽고 고작 열흘 후에 나랍씨한테 황후 처소를 넘겨줄 정도.
뭐랄까, 위에 말한대로 이쪽이 엄청 이상적인 황후였던 것도 있지만...건륭제가 워낙 장수했잖음? 건륭제는 30대에 황후를 먼저 보낸 후 50여년 동안 온갖 일을 겪었고, 다른 아내들과 자식들을 대부분 먼저 떠나보내야 했음. 그 상실의 연속에서 첫 아내이자 소년 시절의 첫사랑이었던 황후가 (건륭제의 기억 속에서) 완벽한 여인으로 미화 내지는 변질된 느낌이 없지 않아 보임. 특히 두번째 황후인 나랍씨랑 너무 최악으로 끝나버린 바람에 처음부터 끝까지 평온했던 첫 황후가 어떤 이상향으로 굳어진 너낌.
그래서 나는 건륭제의 찐사를 한 명만 꼽으라면 부찰황후나 영귀비보다는 나랍씨라고 봄. 보통 미디어에선 건륭제가 부찰황후한테 존나 찐사였고 나랍씨는 총애하지 않은 느낌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후술하겠지만 자세한 기록을 찾아보면 나랍씨한테 베푼 특혜가 비정상적인 수준임.
역사 오타쿠 모드로 중국 사서 원문을 읽다 보면...부찰황후랑 영귀비는 건륭제를 언제나 황제로 대했고 + 건륭제도 그 둘은 황후와 후궁으로 여겼지만, 나랍씨와 건륭제는 서로를 평범한 남녀 관계로 대했다고 읽힐 때가 종종 있음. 불같이 사랑하고 개같이 싸우고 화끈하게 망해버린 느낌이랄까ㅋㅋㅋㅋ그래사 난 나랍씨가 건륭제의 찐사였다고 생각함. 물론 이 문단은 개인적인 감상임)
뭐 쨌든 건륭제는 황후무새였으나 다행히(?) 조상님들처럼 황후를 따라 죽진 않았음. 1748년 황후가 36세로 사망할 당시 건륭제는 37세였는데, 당시 황후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후궁이
이 글의 주인공인 계황후 휘발나랍씨임. 당시에는 한귀비였음. 품계에 따라 매번 호칭이 변하는데, 그러면 여시들이 헷갈릴 수 있으니 이 글에서는 쭉 나랍씨라고 부르겠음.
(참고로 황귀비와 귀비는 서로 다른 직책임. 황귀비가 더 높음. 한귀비는 ‘한’이라는 봉호를 받은 귀비인 거지 황귀비가 아님. 황후>황귀비>귀비임. 장희빈이 장씨 성을 가지고 ‘희’라는 봉호를 받은 빈인 것처럼 그냥 봉호임)
나랍씨는 1734년에 건륭제랑 결혼함. 당시 나랍씨는 16살, 건륭제는 23살로 이 때의 건륭제는 아직 황자였음. (청나라에서 황제나 황족의 아내가 되려면 무조건 수녀 선발을 거쳐야 했는데, 수녀 선발의 나이 제한이 17살이었음. 지금은 물론 17살이 미성년자지만 17세기 18세기 기준으로 17살이면 혼인 적령기를 살짝 지난 나이ㅇㅇ)
사실 나랍씨의 집안이 엄청난 명문가가 아니었음. 만주족 귀족인건 맞는데 그 중에서도 개쩌는 가문은 아니고 적당한 귀족 정도? 역대 청나라 황후 중 가장 집안이 한미한 황후를 꼽을 때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게 나랍씨임ㅇㅇ 건륭제의 후궁 중에도 나랍씨보다 더 집안 좋은 후궁이 있었음.
두 사람의 결혼 당시 건륭제는 유력한 후계자였는데, 나랍씨의 집안은 황태자의 측복진으로 들어올 가문이 아니었음. 나랍씨의 할아버지가 4품 벼슬을 한 게 최고였으니 황태자의 측복진이 되기엔 속된 말로 격이 떨어지는 가문이었음.
근데 나랍씨를 건륭제의 측실로 들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옹정제였음. 옹정제가 8기를 골고루 등용하는 걸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양람기 출신 나랍씨를 아들의 측복진 삼은 거로 추측됨.
건륭제의 아버지이자 당시 황제인 옹정제가 밀어준(?) 후궁이고 + 건륭제가 황자였던 시절에 들어와 측실로 시작한 후궁이라 가문이 한미한데도 불구하고 꽤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
미리 말하자면 청나라의 기록은 아직 완전하지 않음. 역사책이 실시간 업데이트 되고 있음ㅠㅋㅋ
게다가 건륭제와 나랍씨의 관계가 최악으로 끝난 후 건륭제가 사실상 나랍씨에 관한 기록을 분서갱유해버림. 나랍씨의 초상화를 전부 없애버린다던가, 나랍씨를 좋게 추억하는 대신들을 죄 다 처벌하고 옥살이 시킨다던가(...)
그래서 건륭제가 나랍씨를 총애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음. 다만 당시 건륭제의 행보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나랍씨한테 찐사랑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음. 왜냐면 나랍씨가 받은 대우가 전부 청나라 역사에 전례가 없던 수준이었음 ㅇㅇ...
일단 간략한 타임라인을 먼저 보자면
1734년 - 황자였던 건륭제와 결혼 (측실로 ㅇㅇ)
1735년 (옹정 13년) - 옹정제 승하, 건륭제 즉위
1737년 (건륭 2년) 한비 책봉례 (황귀비>귀비>비)
1745년 1월 (건륭 10년) - 한귀비 진봉
1745년 11월 - 한귀비 책봉례
1748년 3월 (건륭 13년) - 황후 사망
1748년 7월 - 황귀비섭육궁사 진봉
1749년 4월 (건륭 14년) - 황귀비섭육궁사 책봉례
1750년 7월 (건륭 15년) - 황후 27개월상 종료, 나랍씨를 새 황후로 진봉
(진봉과 책봉례의 차이가 뭔가요? -> 일단 귀비로 진봉되면 그날부터 귀비 대우를 받음. 근데 해당 품계에 맞는 책보나 도장 같은 건 책봉례 때 받음. 진봉은 혼인신고고 책봉례는 결혼식이라고 생각하면 대강 맞음. 혼인신고 먼저하고 결혼식 아직 안 했어도 법적으로 부부인 거처럼, 진봉되면 일단 그 품계임)
저 타임라인을 세세하게 살펴보며 건륭제의 총애를 분석해보겠음.
1차 특혜
일단 1745년의 귀비 진봉&책봉례부터 보겠음. 본래 청나라의 후궁 제도에서 황귀비는 1명, 귀비도 1명이었음. 건륭 7년의 <흠정궁중현행칙례> 에도 똑같이 명시되어 있음. 나랍씨가 아직 한비이던 시절에는 고귀비 한 명만 있었음ㅇㅇ
건륭 10년, 고귀비가 병이 들자 건륭제는 고귀비를 황귀비로 올려줌. 고귀비가 죽기 전 예우해준 느낌이고 실제로 진봉만 받고 책봉례는 못 치르고 사망함. 따라서 귀비 자리는 공석이 됐고, 비 중 한 명이 승진할 차례였음.
일단 나랍씨보다 훨씬 좋은 집안 출신인 서빈이라는 후궁이 있었음. 물론 빈에서 바로 귀비로 두 자리를 건너뛰는 게 좀 오바긴 하지만 강희제 치세에는 후궁의 품계를 올려줄 때 출신 가문을 1순위로 볼 정도로 가문이 중요한 요소라 서빈이 나랍씨를 제치고 먼저 귀비가 될 여지가 없진 않았음.
또 순비라는 후궁도 있었음. 순비는 나랍씨보다 집안은 딸리지만 나랍씨보다 먼저 결혼했고, 건륭제의 아들도 둘이나 낳은 상태였음. 반면 나랍씨는 황자 시절 측복진들 중 거의 마지막으로 들어와 상대적으로 건륭제를 모신 기간이 짧았고, 집안도 애매하고, 자식도 아예 없었음.
여기서 건륭제의 첫번째 특혜가 나오는데, 귀비를 두 사람 둘 수 있게 후궁 제도 자체를 바꿔버리고 나랍씨와 순비를 둘 다 귀비로 올려줌.
나랍씨와 순비 둘 중 누구를 위해 법을 바꾼 건지 오피셜은 없지만, 오타쿠의 시선에서는 나랍씨를 귀비로 올리기 위해 바꾼 거로 추측됨.
근거 1 : 나랍씨의 승진은 진짜 이례적으로 빠른 수준이었음. 쉬운 예시로, 나랍씨는 건륭제 60년 치세를 통틀어 가장 어린 비이자 가장 어린 귀비이자 가장 어린 황귀비였음. 나이가 어리단 건 곧 황제를 모신 기간이 짧단 건데, 자식도 없고 집안도 그냥저냥인 나랍씨가 초고속 승진을 한 건 건륭제의 총애 없이 불가능한 일임.
근거 2 : 순비가 한미한 집안 출신인 건 맞지만 건륭제 시대에는 강희제 때에 비해 후궁의 가문을 덜 따졌음. (황후가 공석이라) 황후의 직무를 대리할 황귀비를 올리는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팔기만주 출신의 나랍씨를 올리는 게 맞음. 근데 당시에는 황후가 건강했잖음? 순비가 나랍씨보다 5살이 많고, 그만큼 더 오래 건륭제를 모셨고, 건륭제의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순비가 먼저 승진하는 게 자연스러운 그림임.
근거 3 : 두 사람이 동시에 귀비가 된 후에도 문서에 기록할 때 무조건 나랍씨를 순귀비보다 앞에 적었음. 같은 귀비지만 나랍씨가 더 높은 사람이라고 못 박은 거임. 물론 이건 나랍씨가 팔기만주 출신인 게 가장 컸지만, 그래도 건륭제가 직접 서열을 정해줄 정도면 나랍씨한테 애정이 있었다고 보임.
2차 특혜
다음으로 1748년. 3월 11일에 황후가 사망하고 같은 해 7월 나랍씨를 황귀비섭육궁사로 올려주는데, 이 시기부터 미친 특혜가 본격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짐.
일단 황후가 사망하고 11일 후인 3월 22일, 건륭제는 귀비(나랍씨) 거처의 모든 가구를 황후 거처로 옮기고 수리하라고 명령함. 이때부터 이미 나랍씨를 차기 황후로 내정한 것임. <청궁내무부조방처 기록총회>에 따르면 나랍씨가 새로 황후의 거처에 기거할 것이니 수리하라는 칙령을 받고 곧장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갔단 걸 알 수 있음.
또한 황귀비섭육궁사 진봉 자체는 7월에 받았지만 한참 이전인 4월부터 내정 문서에 호칭을 황귀비라고 하고 있었음ㅇㅇ
이런 건륭제의 이례적인 행보는 바로 옆 나라 조선에도 전해짐.
(참고로 조선은 완전 유교 국가답게 나랍씨에게 특혜를 베푸는 건륭제의 행보를 비판적으로 본 것 같음. “쟤네 지금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두겠단 거임? 거기에 황후면 황후고 후궁이면 후궁이지 황귀비섭육궁사는 대체 뭐임? 별 듣도보도 못한 걸 만드네ㅋㅋㅋㅋ 근본 없는 새끼들 진짜 쳐도랏나?ㅋㅋㅋㅋㅋㅋ” 정도?)
당시 승정원일기를 읽어보면
7월 2일, 건륭제가 나랍씨와 단둘이 곤녕궁에 가서 복을 구하는 제사를 지냈다. 만주족 전통에서 이런 제사는 오로지 황후만 지낼 수 있고 황후의 거처를 제사 장소로 삼는다. 예를 들어 숭덕제의 경우 여러 측복진(후궁)이 있었지만 제사는 적복진(황후)인 철철의 거처인 청녕궁에서만 지냈다. 이로써 나랍씨가 정식으로 책봉되기도 전에 건륭제의 실질적인 정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죽은 황후의 자리를 대신했단 것을 알 수 있다.
또 청나라에는 팔기군이란 제도가 있었음. 나랍씨의 집안은 만주 양람기 소속이었는데, 양람기는 8기군 중 하오기 소속이었음. 건륭제는 나랍씨를 황귀비섭육궁사로 책립하면서 가문을 통째로 만주 정황기로 올려줌. 정황기는 팔기 중 높은 상삼기니까 아예 집안 전체를 높여준 것임. 당시 황후의 가문은 무조건 상삼기 소속이어야 했으니 황후 자격 요건을 충족한 거기도 하고.
총애하는 후궁의 가문을 옮겨주는 거 자체는 종종 있는 일이라 다른 특혜에 비해선 소소한 수준이지만 시기가 중요함. 앞선 특혜와 마찬가지로 나랍씨를 차기 황후로 내정하고 힘을 실어줬다고 해석할 수 있겠음.
이렇다 보니 나랍씨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갈림. 대놓고 황후 취급을 하니 우리가 뭐 해주긴 해야하는데 미친 황제놈이 예법을 창조해대니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 와서 좃같다, 황후 내정인데 그냥 황후 예로 하죠? vs 정식 책봉을 받은 게 아닌데 황후 예는 좀 에바 아님? 등등....난장판이었음ㅋㅋ남의 나라 황귀비로 예송논쟁 갈길 뻔
(동악비 사례를 참조해서 결론 지음. 동악비 때 표전을 안 보냈으니 나랍씨한테도 표전 안 보내는 거로 ㅇㅇ. 대신 표전만 안 보냈을 뿐 조선에서도 나랍씨를 선황후에 준하는 수준으로 대하)
여담으로 이 무렵 청나라 대신이 건륭제에게 ‘나랍씨를 황후로 책봉하시라’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데, 건륭제는 ‘황후의 상중에 안 될 말이다’라며 거절함. 근데 웃긴 게 이런 상소를 올린 놈을 처벌하긴커녕 나흘 후에 상을 줌.투명한 새끼...
3차 특혜
같은 해 7월, 건륭제는 조서 하나를 천하에 반포하는데
대충 요약하면 “한귀비(나랍씨)가 선황(옹정제)에게 사혼받은 측복진이니 황태후의 자애로운 뜻을 받들어 황귀비섭육궁사로 책봉한다”라는 내용임.
(여기서 ‘황태후의 자애로운 뜻을 받들어’는 일종의 관례적 표현임. 황제가 즉위할 때 하늘의 뜻을 어쩌고 하는 것처럼ㅇㅇ. 외명부 정치에서야 황제가 1인자지만 내명부는 엄연히 여인의 일이기 때문에 황태후가 가장 윗사람임. 고로 내명부의 가장 큰 어른인 태후가 얘를 지지한다고 포장해서 권위를 실어주는 것임.
일례로 순치제를 보면 됨. 위에 말했듯 어머니인 태후는 동악비를 몹시 싫어래서 황귀비 책봉을 반대했고 순치제도 어머니를 몹시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가 아픈 틈을 타) 동악비를 황귀비로 책봉할 때 책봉 조서에 똑같이 “황태후의 자애로운 뜻을 받들어”라고 썼잖음. 순치제가 태후 극혐하고 태후가 동악비 싫어하는 거 모르는 사람 없지만 황태후 웅앵을 써야만 동악비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으니 관례적 표현을 쓴 거임.)눈가리고 아웅
황귀비섭육궁사 처음 들어요.
-> 당연함. 황귀비섭육궁사는 건륭제가 나랍씨를 위해 창조한 직위니까ㅎ...청나라는 물론이고 중국 역사 다 통틀어도 존재한 적 없는 품계임.
황귀비섭육궁사 글자를 그대로 풀면 ‘내명부의 육궁을 다스릴 권한이 있는 황귀비’라는 뜻임. 내명부를 다스리는 건 오로지 황후의 권한인데, 그 권한을 가지는 거임. 뭐 이리 가오를 잡는지 머리 아플 테니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보겠음.
위에 말했듯 내명부의 가장 큰 어른은 태후임. 또 중국 황실은 대대로 신분을 엄격히 따지기 때문에 후궁의 품계를 올려줄 때마다 이 후궁의 친정 가문이 얼마나 명문가인지 중요하게 보고, 얘가 황제를 몇 년이나 모셨는지도 깐깐하게 고려함. 고로 황제라고 해서 자기가 총애하는 후궁의 품계를 막무가내로 높여줄 수 없음. 그래서 황제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후궁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으면 현재 품계에 맞지 않는 권한과 특혜를 베풀곤 했음.
(동악비는 뭔데요? -> 순치제가 미친놈입니다^^)사실 건륭도...읍읍...
청나라의 첫번째 황귀비는 위에서 언급했던 순치제의 동악비임. 원래 후궁 책봉 교지는 천하에 반포하지 않음. 오로지 황후 책봉 교지만 천하에 반포함. 근데 순치제는 동악비를 황귀비로 책봉할 때 교지를 천하에 반포했고, 황후 책봉할 때처럼 태후전에 존호를 올림. 따라서 동악비는 순치제의 다른 비들보다 훨씬 더 고귀한 대우를 받았음. 황후보단 낮지만 다른 후궁들보다는 존귀한...진짜 쉬운 비유로 쩜오?
두번째 황귀비는 강희제의 황귀비인데, 품계는 동악비랑 같은 황귀비였지만 동악비 수준의 예우는 못 받음. 내명부의 육궁을 다스릴 권한도 없었음. 동악비 이후의 황귀비 책봉은 총애의 표현이 아님. 오랜 기간 황제의 곁을 지켜온 후궁에게 죽기 전 예우를 해주는 느낌에 가까웠음. 건륭제가 고귀비를 황귀비로 올려준 것도 마찬가지로 고귀비가 크게 병이 든 후였고ㅇㅇ
고귀비 다음 황귀비이자 최초의 황귀비섭육궁사가 바로 나랍씨인데, 이쪽은 동악비와 마찬가지로 황후에 준하는 예우를 받음. 황귀비섭육궁사로 책립되면서 내명부 육궁을 다스릴 권한을 받았고, 책봉 교지도 천하에 반포됨. 황귀비의 책봉 교지가 천하에 반포된 건 청나라 역사를 통틀어 동악비 나랍씨 두 명 뿐임.
참고로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를 몹시 존경했음. 강희제가 61년간 황제로 있다가 사망했는데, 강희제의 제위 기간을 넘기 싫다는 이유로 제위 60년 차에 양위할 정도 (오래 살긴 건륭이 훨씬 더 오래 살았음. 강희제는 순치제가 요절하는 바람에 8살에 황제가 됐지만 건륭은 20대에 즉위했으니ㅇㅇ)
근데 나랍씨를 황귀비로 책봉할 당시에는 그렇게나 존경하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순치 13년에 황귀비를 책봉했다. 황증조부이신 세조장황제(순치제)께서 승전명사에게 조서를 반포하라 명하셨다. 전함이 지극히 높고 무거우니 오늘날 이를 마땅히 따라야 한다.”며 동악비책봉의례를 따름.
대충 “순치제께서 동악비를 황귀비로 올려주실 때 천하에 교지를 반포하셨으니 나도 증조할아버지를 본받아(?) 나랍씨한테 똑같이 해줄 거임. 여기서 딴지 거는 놈은 내 증조할아버지 모욕한다고 여길 테니까 알아서들 눈치 챙기고 닥쳐라 ㅅㄱ ㅎㅎ”라는 뜻임. 순치제가 동악비한테 베푼 특혜를 나랍씨한테 그대로 해주기 위해 조상님 이름 갖다판 거임. 미친놈 뿌린 곳에 미친놈 난다
4차 특혜
다음 해인 1749년 4월 5일, 황귀비섭육궁사 책봉례가 거행됨. 당시 <황조문헌통고> 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 태후전에 존호를 올리고
- 관리를 나라 곳곳으로 보내 산천신령께 제를 지내게 하고
- 왕공대신 포함 모든 문무백관이 대례복을 입고 5일간 부복하며
- 책립문을 조종에 올리고 은전 18가지를 내림
저건 전부 황후 책봉례 때만 해주는 예우임. 즉 나랍씨의 황귀비 책봉례가 전부 황후의 예우로 치러진 것임. 황귀비 책봉인데 태후전에 존호가 올라간 건 청나라 모든 역사를 통틀어 동악비 & 나랍씨 둘 뿐이고, 황귀비 책봉례에서 문무백관이 부복한 건 한 술 더 떠서 나랍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임.
게다가 책립문을 조종에 올리는 건 아예 황후한테도 잘 안 해주는 극상의 예우라 청나라 역사 통틀어 딱 4번인데, 그 중 두 번을 나랍씨한테 해줌. 심지어 황후 책봉례 때는 은전을 20가지로 더 높여줌. 당연하지만 동악비도 이건 못 받아봄.
5차 특혜
당시 청나라의 황제, 황후, 태자 등등은 책봉식 같은 중요한 일이 있으면 경하례를 치르고 하전을 받았음. 황귀비나 귀비 같은 고위 후궁들도 경하례를 받긴 받았는데, 옹정 원년의 <흠정대청회전칙례>를 살펴보면 ‘후궁이 경하례를 받는 것은 오로지 황후 책봉식과 동시일 때 한정이다’라고 나옴. 황자가 새로 황제로 즉위하면서 적복진을 황후로 책봉하고 측복진을 후궁으로 올릴 때 or 원 황후가 죽고 나서 계황후를 들이고 후궁의 품계를 올려줄 때만 겸사겸사 같이 받는 것임.
또한 후궁이 받는 경하례는 황후가 받는 경하례랑 차이가 있었음. 공주와 비빈들에겐 경하례를 받지만 왕공대신들한테는 못 받는다던가? 청나라는 진짜 엄격한 서열제였으니 ㅇㅇ
나랍씨도 비에서 귀비로 승진할 때는 경하례를 못 받음. 근데 황귀비가 될 때는 황후 책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건륭제의 명에 따라 관례를 깨고 경하례를 받았음.
본래 청나라 역사에서 가장 이례적인 총애를 받은 후궁은 앞서 계속 언급한 동악비였음. 청나라의 후궁이 존나 말도 안 되는 특혜를 받은 케이스는 대부분 동악비가 첫 빠따임. 근데 이 동악비조차 황귀비로 승진할 당시 외명부 경하례를 못 받았는데, 나랍씨는 황귀비책봉례에서 외명부 경하례를 받음.
게다가 나랍씨가 황귀비로 올라가면서 귀비 한 자리가 공석이 됐잖음? 이때 가비라는 다른 후궁이 가귀비로 올려지는데, 대신들이 “나랍씨한테 경하례 해주는 김에 가귀비도 같이 해주죠?” 제안함. (앞서 말했듯 귀비는 원래 경하례를 받는 고위 후궁임)
근데 건륭제는 “황귀비랑 귀비가 같은 해에 봉해지는데 귀비가 경하례까지 받으면 법도에 어긋난다. 경하례는 나랍씨만 받는다”라고 거부함.
심지어 나랍씨가 황귀비 신분로 외명부 경하례를 받게 해준 거로 모자라서 아예 규정책에 “귀비된 몸으로 (황귀비로) 책봉되는 사람(=나랍씨)는 마땅히 공주 왕비 등 외명부 부인의 경하례를 받아야 하지만, 비된 몸으로 (귀비로) 진봉되는 사람은 의절을 적당히 생략해야 한다.”라고 새로 적어둠.
4월 2일, 건륭제는 “(책봉례 다음날인) 초 6일에 모든 왕비와 공주가 입궁해 황귀비에게 절할 것을 명한다. 단 귀비한테는 절하지 마라.”고 다시 한 번 확인사살을 함.
그래서 실제로 4월 6일에 모든 비빈, 공주, 외명부 부인들이 나랍씨한테 육숙삼궤삼고례를 올림. 이건 청나라에서 가장 높은 예법으로 오로지 황제와 황후만 받을 수 있는 예법이었음
그리고 황후가 경하례를 치르면 중궁전표를 하전으로 받는데, 이게 황후의 실권이라고 볼 수 있음. 예를 들어 또순치제는 어머니와 사이가 몹시 나빴고, 어머니가 정해준 몽골 출신 황후도 몹시 싫어함. 그래서 황후의 중궁전표를 몰수해서 황후의 실권을 빼앗으려다가 어머니 태후의 반대에 부딪쳐서 실패한 적이 있음.
나랍씨는 황귀비섭육궁사로 책봉되고 외명부 경하례를 받은 후 중궁전표를 하전으로 받았음. 황귀비가 중궁전표를 받은 건 당연히 청나라 역사를 통틀어 나랍씨가 유일함. 동악비도 중궁전표는 못 받았음ㅇㅇ지랄의 호흡 제 1형 : 법 바꾸기!
6차 특혜
모든 황실은 예법이 엄격함. 품계에 따라 옷과 물품의 색깔이 다르고,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의 가짓수도 다르고, 휘하에 거느릴 수 있는 궁인의 숫자며 공식 의장의 갯수도 달라짐. 그냥 입고 먹고 쓰는 모든 게 품계에 따라 달라지고 본인 품계 이상의 사치는 곧 하극상으로 여겨져 처벌받는다고 보면 됨.
청나라 황실도 마찬가지임. 당시 황후의 수레와 우산은 명황색, 황귀비와 귀비는 황금색이었음. 소지하는 의장도 황후는 59점, 황귀비는 31점이었음.
근데 1749년, 건륭제는 황귀비의 의장에 27점을 추가해서 황후보다 딱 한 점 모자른 58점으로 해줌. 그리고 황귀비의 수레와 우산에는 황후랑 똑같은 명황색을 쓰도록 법도를 바꿈. 100프로까진 아니지만 99프로 황후 대우를 해주도록 한 것임.
게다가 몇 달 후 황후와 태후의 의장에 서른 점을 추가함. 얼마 안 지나 나랍씨는 황후가 되는데, 죽은 황후보다 많은 건 물론이고 아예 전례가 없는 수준의 규모에 도달함.
7차 특혜 (1750년)
- 1750년 정월은 아직 첫 황후의 애도기간 중이었는데도 이미 공식 기록에서 나랍씨를 황후로 호칭함
- 당해 2월의 나랍씨 생일에 건륭제는 은자 900냥을 하사했는데, 이 역시 황후의 예법임.
- 한비 책봉문부터 시작해서 한귀비 책봉문, 황귀비 책봉문, 황후 책봉문에 모두 “황태후의 자애로운 어쩌고” 문구 들어감.
- 6월에 황후의 27개월상이 끝나자 다음 달인 7월 10일에 바로 황후로 진봉해줌.
- 진봉하자마자 7월 15일에 나랍씨만 데리고 허난성 여행 감
- 8월 2일, 여행에서 돌아오고 바로 책봉례 거행. 황후 책봉례는 황귀비 책봉례 때 해준 것보다 더 성대하게, 즉 원래 황후들이 받는 것보다도 더 스케일 크게 해줌. 이미 황귀비 책봉례 때 온갖 번거로운 짓을 다 했는데 그걸 2년 만에 한 번 더 해준 거임.
- 나랍씨를 황후로 책봉하며 대사면을 명함. 청나라는 원배황후 (첫 황후)랑, 원배황후가 죽고 올려진 계후를 구분하는 편이라 계후의 책립에는 대사면을 안해줌. 원배황후가 아닌데 책봉례에 대사면을 해준 건 동악비랑 나랍씨 뿐임.
- 황후의 친정 식구들에겐 공후작 작위를 내려주는 게 관례지만 이건 오로지 원배황후 한정임. 계후의 경우 부모한테만 주는 게 관례였음. 근데 건륭제는 나랍씨의 아버지한테 1등 승은공 작위, 어머니한테 1품 부인 작위를 준 거로 그치지 않고 나랍씨의 형제들한테도 전부 1등후 작위를 줌. 심지어 세습도 가능하게 해줘서 나랍씨의 조카들도 1등후가 됨. 원배황후의 아버지임에도 3등 승은공만 받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계황후인 나랍씨의 친정 식구들에게 모조리 1등후 작위를 준 것적당히 해 미친놈아
결론 : 특혜로 보면 황귀비섭육궁사(나랍씨) >> 동악비 >>>>> 보통의 황귀비임. 저런 거로 사랑의 크기를 완벽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랍씨는 (순치제가 자기 목숨으로 여긴) 동악비보다도 더한 특혜를 수도 없이 받았단 거임.
(애초에 다른 거 다 제쳐두고 황귀비섭육궁사라는 지위 하나만 봐도 엄청난 특혜임. 원래 모든 후궁한텐 봉호가 붙잖음? 나랍씨도 ‘한’이라는 봉호를 받아서 한비->한귀비가 된 것처럼ㅇㅇ
황귀비도 예외가 아니라서 무조건 봉호가 붙음. 영귀비가 황귀비가 된 후에도 ‘영’황귀비라고 호칭한 것처럼. 나랍씨도 그냥 황귀비가 됐다면 한황귀비라고 불렸을 거임.
근데 나랍씨는 황귀비섭육궁사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봉호를 안 붙임. 그냥 황귀비섭육궁사임. 원래 황제의 아내들 중 봉호를 안 붙이는 존재는 황후 뿐인데, 황귀비섭육궁사도 감히 봉호를 붙여 구분하지 않는 거임. 이거 하나만 봐도 황귀비섭육궁사가 얼마나 존귀한 직위인지 알 수 있음.)
다만 나랍씨의 황후 책봉 당시 건륭제의 칙서 내용은 좀 스탠스가 다름
(아래에 요약 있음)
짐은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국사를 바쁘게 보내고 있으며 후궁의 내정은 이제껏 효현황후(=첫 황후)가 맡아왔다. 황후는 성모황태후(=건륭제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면서 언제나 기쁘게 해드렸는데 효성이 지극하고 정성껏 일을 처리하는 등 경중을 잘 가늠했다. 그리하여 빈부터 궁인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지키고 은혜를 고맙게 여겼으며 마음속으로 그를 잘 따랐다. 10여년 동안 짐이 국사에 전념하고 궁중의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천하의 어머니로 군림하게 되었으니 이는 천지가 융합되고 일월이 빛나는 것과 같다. 짐은 아직 나이가 젊어 궁내를 다스림에 후궁을 다스릴 황후가 필요하다.
나랍씨는 선친께서 정해주신 측실로, 단정하고 성품이 어질다. 응당 조상들의 규례대로 나랍씨를 황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짐은 효현황후에 대한 마음의 짐이 남아있어 황후가 별세한 지 27개월이 지나는 날에 길례를 올리고자 한다. 이렇게 해야만 짐의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에 어명을 내리는 바이다. 짐은 황후와 20여년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깊은 은정을 맺었다. 그래서 새 황후를 책봉하려니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사실 27개월도 짐에게는 너무 이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성모황태후께서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짐이 자주 비빈과 손군들을 거느리고 문안을 올리지만 황태후께서는 중궁이 비어있는 터라 언제나 서글퍼 하신다. 이에 성모의 분부를 받들어 그 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후궁에 할 일이 태산 같아 확실히 이를 관리할 수장이 필요하다.
요약하면 “나한테는 (원래) 황후밖에 없는데 태후께서 황후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하시더라”라는 뜻임.
근데 건륭제는 황후가 사망한 후 27개월 동안 나랍씨한테 온갖 특혜를 베풀어왔잖음? ‘나랍씨한테 별 애정 없지만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 없으니 새 황후로 삼는다’는 사람의 태도라고는 도저히 보기 힘듬. 즉 좋게 말하면 형식적으로 해본 소리고, 좀 적나라하게 말하면 조강지처인 첫 황후에 대한 애도를 표하기 위한 쇼에 가까움.
건륭제가 첫 황후의 죽음에 슬퍼한 거 자체는 사실인데, 나랍씨한테 베푼 특혜들을 함께 놓고 보면 황후에 대한 애도는 흔히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순애보성 연정이라기보단 소년 시절부터 20년 넘게 함께해온 동반자에 대한 애도의 느낌이 더 강하단 거. 황후 사망 후 27개월 동안 건륭제는 갖가지 특혜로 나랍씨의 위치를 견고하게 해주고 + 이 사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청나라에서 존귀한 여인이라고 수도 없이 못 박았으니ㅇㅇ
그리고 황태후의 명으로 황후 삼는다는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게, 건륭제 치세의 태후가 나랍씨를 몹시 예뻐하고 뒷배가 돠어준 건 맞음. 근데 앞서 말했듯 책봉문에는 황태후 이름 갖다 붙이는 게 관례임. ‘내가 얘 너무너무 좋아해서 황후 삼는다’보다 ‘내명부와 황실의 큰어른인 황태후의 명으로 황후 삼는다’가 더 나랍씨의 권위를 높여주는 말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랍씨는 황후가 된 후에도 쭉 건륭제의 총애를 받음. 특혜가 멈추지 않았음.좀 멈춰 미친놈아
- 말했다시피 황후 진봉 직후에 나랍씨만 데리고 여행을 갔고, 이 여행 중간중간 시를 지음. 건륭제는 예술에 심취한 황제였기 때문에 건륭제가 시를 지은 것 자체는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랍씨랑 함께한 날의 행복이나 나랍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시가 수십 편이란 건 좀 눈여겨볼만 함.
- 다음해인 1751년 건륭제가 강남 순행에 갈 때 따라감
- 같은 해 8월의 사냥도 같이 갔고, 이때 임신해서 첫 아들을 낳음. (무슨 사냥을 한 거노)
- 나랍씨가 아들을 낳자 기쁨을 표현하는 시를 씀. 건륭제는 27명의 자식을 봤지만 출생 직후 기쁨을 표현하는 시를 쓴 건 죽은 황후가 적장자 영종을 낳았을 때 + 나랍씨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딱 두 번임.
- 이 아이의 이름을 영기라고 지으면서 璂 한자를 씀. 璂 글자는 황제의 관에 사용하는 피변 꾸미개를 뜻하는 글자임. 건륭제가 아들에게 저런 이름을 줬단 건 잠재적 후계자로 본다는 뜻임.
- 1754년에 또 나랍씨만 데리고 길림성 여행을 가서 시를 씀
- 나랍씨가 출산한 날은 정무를 본 기록이 없음.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출산하는 나랍씨의 곁을 지켰다는 뜻인데, 첫 황후한테도 이렇게는 안 해줌.
- 황후가 된 후로도 매년 나랍씨의 생일마다 모든 비빈이 나랍씨를 찾아와 예를 갖춰야했고, 건륭제는 정무 때려치우고 온종일 나랍씨랑 데이트하면서 같이 연극을 봤고, 나랍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왕공대신에게 길복을 입으라고 명령함.
참고 1 : 나랍씨는 황후가 된 후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음. 첫 황후가 낳은 아들 둘이 전부 요절했기 때문에 나랍씨의 장남인 영기는 출생 당시 건륭제의 적장자였음. 건륭제는 위에 보다시피 영기를 몹시 예뻐하면서 적장자 대우를 톡톡히 해줌
참고로 막내를 출산할 당시 38세로 노산이었기 때문에 자식이 더 없는 건 건륭제의 총애가 끝나서라기보단 그냥 아이가 더 안 생겼다고 보는 게 맞음. 막내가 태어나고 2년 후인 1756년에도 나랍씨의 생일을 축하해야한다며 모든 왕공대신에게 길복을 입힌 기록이 있음.
참고 2 : 만주족은 조선처럼 서자의 출세를 막진 않음. 근데 그게 적서를 아예 구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 청나라가 적서에 1도 신경을 안 썼다는 건 과장된 이야기임.
위에 말했듯 청나라라는 통일 제국을 다스리면서 한족의 풍습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음. 조선처럼 적장자면 무조건 세자 박는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청나라 극 초기에 비하면 적자를 우대해주는 분위기로 가고 있었음. 당장 건륭제만 해도 (부찰) 황후의 아들이 요절하자 ‘적자가 황위를 계승하는 일이 오래도록 없다’고 탄식함. 그런 와중에 나랍씨가 적장자를 낳았는데 다른 서출 황자들이랑 똑같이 취급할 리 없음 ㅇㅇ
나랍씨의 황후 등극 이후 건륭제가 영귀비라는 후궁 포함 다른 후궁들 몇을 총애하긴 했음. 미디어에도 꽤 자주 나옴. 근데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실제 역사의 영귀비는 감히 나랍씨한테 대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음. 비단 영귀비만 그런 게 아니라 후궁이란 직책이 그럼.
청나라를 다룬 드라마에선 후궁들 간의 암투가 엄청 활발한 것처럼 그려지는데, 실제 청나라 내명부는 중국의 모든 왕조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할 만큼 매우 엄격한 서열제였음. 연희공략에 나오는 일들의 90프로는 실제였다면 바로 모가지 날아가서 드라마 끝났을 수위임ㅋㅋㅋ
연희공략 여주인 영귀비도...일단 가문이 한미했고, 무엇보다 나랍씨에 대한 건륭제의 사랑이 식은 게 아니잖음. 나랍씨는 후궁 시절부터 역사에 없던 특혜와 총애를 받으며 고속 승진해서 황후가 된 사람임.
황귀비가 될 때 황후의 예로 책봉례를 치르고, 황후가 될 때 그걸 또 한 번 더 받고, 황후가 된 후에도 쭉 총애 받으며 건륭제의 적장자까지 낳고, 모든 걸 황후의 예우로 받고 있는 나랍씨를 일개 후궁 나부랭이가 이겨먹으려고 든다? 곱게 뒤지면 다행ㅇㅇ...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1765년, 문제의 사건이 벌어짐.
이 해 정월, 건륭제는 남순(순행)을 떠남. 어머니인 태후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였음. 황후나 후궁이 황제의 남순이나 사냥에 동참하는 건 총애받는다는 상징 같은 건데, 나랍씨는 황후가 된 후 모든 행사에 함께했고 이 남순에도 동행함. 나랍씨가 건륭제랑 함께한 네번째 남순이었음.
해당 남순은 나랍씨가 황후가 된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건륭제와 나랍씨는 여전히 사이 좋는 부부였음. 남순 도중 나랍씨의 생일이 돌아오자 건륭제가 직접 축하해줬는데, <선저편>에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음.
- 2월 10일, 나랍씨의 48번째 생일이 돌아옴.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같이 했고, 건륭제가 직접 생일을 축하해줌.
- 둘은 그날 저녁 식사도 함께 했음. 이 자리에서 건륭제는 왕공대신과 해당 지역의 관리들에게 음식을 챙겨주고 장쑤성과 저장성의 모든 병사들에게 두 달 치 식량을 하사함. 나랍씨의 생일 기념으로 음식을 하사한다는 건 건륭제가 나랍씨를 총애한다는 표현이고, 나랍씨의 권위를 높여주는 행위임.
- 당일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둘은 식사를 함께하며 행복해했고, 특히 건륭제가 몹시 즐거워함.
- 나랍씨의 생일 전후로 비빈의 상에 올라온 반찬 목록을 보면 나랍씨가 하사받은 음식과 영귀비 포함 비빈이 받은 음식에 명확한 차이가 있음. 나랍씨는 귀한 고기 등을 여러 접시 하사받은 반면, 비빈은 채소 한 접시만 받았음.
- 생일 당일 건륭제와 나랍씨의 식사이 사용된 식기도 평소에 쓰는 식기가 아니었음. 팔선식기 등 길조의 의미가 있는, 특별한 날에만 쓰는 식기였음.
즉 이 때까지만 해도 건륭제는 나랍씨의 생일을 ‘모두 함께 축하해줘야 마땅한 길한 날‘로 여기고 있었으며 두 사람의 부부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단 게 확실함.
운명의 날인 2월 18일, 황제의 일행은 항주 (현재의 항저우)에 있었음. 건륭제는 이 날도 자신의 상에 올라온 귀한 음식을 따로 챙겨 나랍씨한테 보내주며 나랍씨를 극진히 챙겼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도 함.
근데 막상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나랍씨가 보이지 않았고, 나랍씨가 앉았어야 할 자리의 명패는 가려져 있었음. 그날만 그런 게 아니라 남순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랍씨를 보지 못함.
알고 보니 사건 당일인 2월 18일에 건륭제가 수로를 이용해서 나랍씨를 북경으로 먼저 돌려보낸 거였음. 당연하지만 남순 도중 나랍씨만 따로 돌려보내는 건 일종의 처벌임.
다만 사건 직후의 <건륭조상칙서>를 살펴보면 이 때까진 나랍씨랑 갈라설 의사가 전혀 없었던 거로 보임.
- 관리들에게 나랍씨를 마중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한 점
- 2월 23일, 나랍씨가 수로를 통해 돌아갈 것이니 미리 (북경으로 향하는) 수로를 확인하고, 나랍씨의 이동을 준비하라고 칙서를 통해 꼼꼼히 지시한 점
- 3월에도 칙령을 보내 나랍씨를 살피고 환궁한 나랍씨의 식사 시중을 들 요리사와 내관의 수를 구체적으로 지시한 기록이 있는데, 이때까진 모든 게 황후의 예우인 점
- 사건 직후 나랍씨의 친정을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카한테 상을 내린 점 (화해하자고 건륭제가 먼저 손 내민 거...)
- 3월, 나랍씨가 북경으로 돌아가던 중 해당 지역의 총독이 나랍씨에게 물품을 진상했으나 나랍씨가 받길 거부한 점
즉 여기까지 보면 ‘2월 18일 낮에 나랍씨와 건륭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건륭제가 화가 났으나, 작은 다툼 정도였을 뿐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화가 난 쪽은 오히려 건륭제가 아니라 나랍씨일 가능성도 있다.’는 결론이 나옴
그런데 4월이 되고 건륭제 일행이 북경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전개되기 시작함.
건륭제가 4월 21일에 귀경하고, 태후가 25일에 귀경함. 이에 귀비 포함 모든 비빈들이 26일에 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는데, 나랍씨만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음.
(나랍씨 본인 의사로 ‘안’ 간 건지, 건륭제가 금족령을 내려서 ‘못’ 간 건지는 모르겠음. 기록을 못 찾음.)청나라 새끼들아 기록 좀 해라
나랍씨와 건륭제의 관계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달음. 거의 뭐 아우토반 달리는 포르쉐 ㅇㅇㅋㅋ
- 5월 1일, 건륭제는 나랍씨를 폐위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내비침. 대신들이 반대함. 이때는 대신을 벌하진 않음.
- 5월 10일, 건륭제는 영귀비를 황귀비로 올리고 나랍씨 대신 내궁을 통솔하게 함.
- 5월 14일, 나랍씨의 책보를 거둬들이고, 나랍씨의 친정을 도로 하오기인 양람기로 강등시키고, 궁녀 둘이서만 나랍씨를 모시게 함. 후궁 중 가장 품계가 낮은 답응이 궁녀 둘을 두는데 황후인 나랍씨를 답응과 똑같이 대우한다? 사실상 폐위나 마찬가지임. 공식적으로 폐위하진 않았지만 폐위나 다름 없는 것임ㅇㅇ
건륭제의 영총을 독차지하며 황후가 아님에도 황후의 예우를 받았던 총비가, 이젠 황후임에도 황후의 예우를 전혀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 거임. 존나 아이러니함. 인생살이란ㅇㅇ...
자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몇십 년간 총애하던 나랍씨에게서 한 순간에 등을 돌린 걸까?
항주 사건 직후인 3월 3일, 건륭제는 나랍씨의 조카이자 총애하던 대신인 눌소궁에게 비밀 서신을 보냈음. 이 서신을 보면 건륭제가 분노한 이유가 나옴.
<내가 태후를 모시고 항저우에서 돌아오려던 참에 출발 전날(2월 18일) 황후가 갑자기 출가하겠다며 머리를 잘랐다. 황후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이렇게 보니 황후가 평소에 나를 미워함이 틀림없다.>
바로 단발이었음. 순행 도중 나랍씨가 갑자기 출가하겠다며 황태후와 건륭제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잘랐단 거임.
엥? 고작 그거야? 머리 자른 게 뭐 어때서?
-> 당대 청나라에서 단발은 가족이 죽었을 때만 하는 행위임. 일종의 고인 드립인 것.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한테 네 번 절하거나, 면전에서 향 피우거나, 상복 입고 나오는 거랑 똑같은 짓임.
더군다나 나랍씨는 황제와 황태후가 보는 앞에서 머리를 잘랐다고 하잖음? 이건 황제나 황태후의 장례를 치른다 = 국상 나길 바랍니다 = 나가 뒤지세요 씨발새끼들아랑 똑같은 뜻이고, 저 시대에 황제&황태후를 저주하는 건 단순한 불경을 넘어 반역죄임.
(동시대의 영조한테 게장 드립 친 애들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보셈...단발은 게장 드립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은 행동임. 나가 뒤지란 것보다는 차라리 살인자 취급이 나음)
그리고 백번 양보해서 나랍씨가 단발한 걸 문자 그대로 출가하기 위함이라고 받아들여도 여전히 심각한 게, 유부녀가 출가하겠다는 게 무슨 말이겠음...최대한 좋게 포장해서 말해도 “이혼하자”고, 당시 시대상에 맞게 말하면 “속세, 즉 건륭제와의 모든 추억을 잊고 건륭제와 영원히 인연을 끊겠다”임.
게다가 진짜 출가하고 싶었다면 그냥 건륭제한테 말을 하면 됨. 물론 건륭제가 허락했을지는 모르겠다만, 온건한 대화를 시도해보지도 않고 대뜸 머리를 자른 건 ㅇㅇ...
(황제에게 나가뒤지라고 저주한 것보다야 수위가 약하지만 단순한 남녀 관계로만 보면 후자가 더 쎌 수도 있음. 나가 뒤지라는 저주는 증오라도 있지...영원히 연을 끊고 지난 30년의 추억도 다 잊겠다는 건 진짜 1의 감정도 없다는 뉘앙스잖음ㅋㅋㅋ...)
당시 건륭제의 행보를 보면 건륭제가 받은 충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음. 건륭제는 나랍씨를 북경으로 돌려보내며 자신의 심복들에게 황후의 처소를 수색해서 사술의 흔적을 찾으라고 명하고, 도대체 궁인이 황후를 어떻게 모셨길래 황후가 저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야겠다며 나랍씨를 모시던 궁인을 심문함.
쉽게 말해 나랍씨가 황제와 황태후 앞에서 머리를 자른 건 ‘누가 나랍씨를 저주해서 나랍씨가 미쳐버린 거다, 그거 외엔 설명이 안 되는 행동이다’라고 여길 정도의 미친짓인 거임ㅇㅇ
(참고로 이 심문은 그냥 물어보는 수준이 아니었음. “나랍씨가 궁정생활에 마음이 없었다면 어째서 고하지 않았느냐” “나랍씨가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반드시 깊을 것이다” 등의 내용이 오갔는데, 이 과정에서 궁녀들을 고문했고 매를 60대씩 때림.)
또한 시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건륭제는 단순히 나랍씨 개인에게 실망한 걸 넘어 부부관계, 좀 비약하면 모든 아내들에게 큰 회의감을 느낀 듯한 행보를 보임.
1. 앞서 승정원일기에 언급됐듯 곤녕궁의 제사는 황제의 정실이 주관하는 거고, 나랍씨는 첫 황후가 죽은 후부터 제사를 지냈음. 근데 항주 사건 이후로는 나랍씨를 유폐하고 영귀비를 (황후 대리인) 황귀비로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곤녕궁 제사를 축소시킴.
나랍씨랑 사이가 좋을 당시에는 곤녕궁 제사의 내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의례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하나하나 다 남겼는데, 항주 사건 후로는 제사를 지냈다 정도만 대충 적고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남기지 않음.
2. 건륭제는 치세 동안 여러 행악도, 쉽게 말해 그림 속에 등장함. 나랍씨가 막 귀비가 된 1745년에 그려진 <고상행악도>를 보면 당시 생존해있던 첫 황후와 나랍씨가 건륭제와 함께 등장함. (후궁이 행악도에 등장한 첫 사례임)
근데 항주 사건이 일어난 후로는 절대 그림에 후궁이 등장하지 않음. 영귀비는 황귀비로 올랐을 뿐 황후가 되지 못했고, 나랍씨가 유폐당한 후 건륭제의 황후 자리는 건륭제가 죽을 때까지 공석이었으니 항주 사건 이후로는 그 어떤 여자도 건륭제와 같이 그림에 담기지 못했다는 뜻이 됨.
3. 숭덕제의 후궁이자 순치제의 생모인 붐부타이는 청나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태황태후로서 청나라 역사상 가장 높은 어른이었음. 당시 청나라 황실은 붐부타이의 여조복을 대대로 황후에게 물려주고 중요한 행사 때 착용하게 함.
마지막으로 이 여조복을 입은 사람은 나랍씨인데, 건륭제는 나랍씨를 유폐한 후 이 여조복을 거두고 후대의 정궁 황후에게 물려줄 테니 황실의 보물로 여기고 대대로 물려줘야 한다고 함. 근데 황귀비가 된 영귀비는 물론이고, 건륭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가경제의 황후도 이 여조복을 받지 못했음. 나랍씨가 유폐되면서 여조복도 그대로 역사에서 사라짐.
4. 나랍씨는 위에 말한대로 중궁전표를 받은 유일한 황귀비였는데, 항주 사건 이후 건륭제가 전표를 없애버림. 그래서 후대의 황후들은 중궁전표가 없음. 즉 나랍씨는 중궁전표를 받은 유일한 황귀비를 넘어 마지막 소유자임.
5. 항주 사건 이후 건륭제는 황후를 들이지 않은 건 물론이고 아예 후궁조차 안 들임.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서 해가 바뀜.
1766년 7월, 유폐된 나랍씨가 사망함. 항주에서의 단발 사건 이후 약 1년 5개월, 유폐된지 1년 2개월 만의 일임.
나랍씨가 사망할 당시 건륭제는 사냥 중이었음. 나랍씨가 죽었단 소식을 들은 건륭제의 대답을 살펴보면 또 비슷한 정황이 나옴.
황후(나랍씨)는 책립된 이래 지금까지 덕을 잃은 적이 없었다. 지난 봄 짐이 황태후를 모시고 강남 지역을 순행하여 즐거움을 나눌 때 황후의 성격이 갑자기 평소와 달라지더니 황태후 앞에서 삼가 효도를 다할 수 없었다. 항주에 이르러서는 거동이 더욱 정상에서 어긋나고 행적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어 먼저 북경으로 돌아가 궁에서 조섭하게 하였다. 이제 일 년여가 지나 병세가 날로 극심하여지더니 마침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는 실로 황후의 복이 천박하여 성모(황태후)의 자애로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짐의 은혜를 기리 받을 수 없던 것이다.
황후가 저지른 일의 어그러짐을 논한다면 바로 내가 폐출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짐은 황후의 명호를 보존하게 하여 이미 격외의 용서를 하였다. 다만 장례의 의전이 효현황후 (첫 황후)와 동등하게 따르는 것이 편치 않으니 상례는 황귀비의 예에 준하여 실행할 것을 내무부 대신과 협의하여 받들도록 하고, 이 유시를 적어 중외에 알리도록 하라.
요약하면 “나랍씨가 남순 도중 미친 짓을 했다. 바로 폐위해야 하는 수준인데 그간의 정을 봐서 폐위는 안 했다. 다만 입에 못 담을 짓을 한 나랍씨를 황후의 예로 장례 지낼 수는 없으니 황귀비의 예로 장례를 지내라”라는 뜻임.
(실제로 나랍씨의 장례는 꽤 초라하게 치러짐. 황귀비도 아니고 빈의 예 정도. 이러나 저러나 황후로 죽었는데도 건륭제가 자기 무덤에 나랍씨를 합장하지 말라고 칙령을 내려서 합장은 개뿔...순비의 능묘에 같이 묻힘.
무엇보다 시호조차 못 받음. 첫 황후의 경우 효현황후라는 시호를 받았잖음? 근데 나랍씨는 그냥 계황후임. 여기서 계는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효현황후의 뒤를 이은 황후라는 뜻밖에 안 됨.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저 시대에 후궁도 아닌 황후가 죽었는데 시호를 안 주는 건 진짜 엄청난 박해임. 자기 아들 죽인 영조도 ‘사도’라는 시호를 줬잖음. 조선에서 시호 못 받은 왕이 연산군 광해군 뿐인 걸 생각해보셈. 보다 못해서 너무한 처사라고 간언한 대신들이 여럿 있었는데, 건륭제는 이 대신들조차 다 처벌함.)
건륭제의 분노는 나랍씨 뿐 아니라 그 아들인 영기한테까지 감. 원래 청나라에서 황제의 적자가 황제보다 일찍 죽으면 친왕으로 추존해주는 게 관례임. 청나라의 첫번째 황제인 천명제의 적장자가 반역죄를 저질러 추존을 못 받은 걸 제외하면 모든 적자가 친왕 추존을 받았고, 건륭제 치세에 첫 황후 소생의 두 황자도 마찬가지로 친왕 추존을 받음.
영기는 건륭제의 적장자로서 황태자로 내정될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나랍씨의 단발 사건 당시 곧 혼인 예정이었음. 다행히(?) 혼인이 몇 달 미뤄지기만 하고 그대로 진행 돼서 무사히 혼인은 함. 이후 나랍씨가 살아있을 때 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직위를 역임하면서 잘 지내다가 (건륭제가 원체 오래 산지라) 건륭제보다 먼저 죽음.
근데 건륭제는 영기가 죽은 후 친왕 추존을 안 해줌. 영귀비의 아들이자 영기의 동생이 건륭제의 뒤를 이어 가경제가 되는데, 이 가경제가 영기를 패륵으로 추존해줬음. 이걸 해석하면 (영기의 친모인) 나랍씨를 황후로 여기지 않으며 따라서 영기도 황제의 적자가 아니다 or 나랍씨를 반역자로 여기니 그 아들인 영기도 죄인으로 여긴다 는 뜻임.
건륭제는 나랍씨가 사망하고 다음 해인 1767년부터 이미 황후를 들이지 않겠다는 스탠스를 보이고 있었음. 물론 대신들은 새 황후를 들이라고 했지만 건륭제는 끝까지 거부함.
1778년,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가 장남 윤잉을 황태자로 책립했다가 폐위한 후로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은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새 황후를 들이지 않겠다고 못 박음. 이때 실록에 다시 한 번 나랍씨의 이름이 나옴.
건륭 13년 (1748년)에 효현황후가 붕서했을 때, 나랍씨가 짐의 동궁 시절에 맺어진데다 선황께 사혼받은 측복진이고 위치가 상당해 성모황태후께 아뢰어 그를 황귀비섭육궁사로 책봉하고 이후 황후로 책립했다.
그 후 허물이 있었으나 짐은 관용을 베풀었고, 심지어 그가 나라의 풍속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단발을 행하고도 거리낌이 없었으나 짐은 여전히 감싸주고 폐위하지 않았다. 그가 나중에 병으로 훙서하자 의례를 감하긴 했지만 결코 위호를 빼앗진 않았다.
쉽게 말해서 “(황후였던) 나랍씨가 단발이라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그래도 아내니까 황후의 위호를 안 빼앗고 최소한의 도리는 지켰으나 이제 세상만사 진절머리가 난다. 죽을 때까지 황후 안 들일 거니까 입 닥쳐라.” 정도의 내용임. 해당 실록이 나랍씨가 죽고 12년이 지난 시점이란 걸 고려하면 건륭제가 나랍씨한테 얼마나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는지 추측할 수 있음.
(당대 조선에서는 국모 자리를 비워두는 청나라를 이해하지 못해서 “쟤네 ㄹㅇ 훼까닥 도른 거 아니냐?” 함. 영조 & 정조 둘 다 비슷한 입장이었음.
다만 청나라는 조선이랑 좀 관습이 달라서 황제가 나이가 많은 시점에 황후가 훙서하면 굳이 새 황후를 들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 건륭제는 나랍씨가 사망하고도 30년을 더 살았긴 했지만 사실 저때 기준으로는 나랍씨의 사망 당시 이미 노년이었으니 자기 나이를 고려해 황후를 들이지 않은 걸 수도 있음ㅇㅇ)
이렇듯 건륭제가 나랍씨한테 등을 돌린 이유는 명확함. 하지만 이제 또다른 의문이 생김.
나랍씨는 왜 순행 도중 황제와 황태후 앞에서 머리를 자른 걸까?
만주족 귀족인 나랍씨가 그 행위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으니 자신의 단발이 반역에 가까운 행위란 걸 인지하고 저지른 걸 텐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름. 건륭제가 황실의 치부로 여겨 나랍씨에 대한 언급을 꺼려 남은 기록이 없음.
그리고 오타쿠 모드로 기록을 파면 팔수록 드는 생각인데, 아마 건륭제 본인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던 것 같음.)
가설 1 : 궁중 암투 때문에 나랍씨가 빡쳤다 (=빡쳐서 ‘씨바 모르겠다 너 좆같아’ 하고 머리 잘랐다)
이 가설의 출처는 의외로(?) 조선임. 그도 그럴 게 멀쩡히 황후 노릇 잘 하던 나랍씨를 별 명분도 없이 유폐시키고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뒀으니 당대 조선에서 엄청난 이슈였음. 영조가 청나라를 오가던 역관을 불러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정도.
(나랍씨가 머리를 자른 건 일종의 극비였음. 청나라의 실록에서 공식적으로 단발을 언급한 건 나랍씨가 죽고 12년이 지난 후임. 단발했단 걸 모르는 조선인들 입장에선 건륭제가 별 이유도 없이 나랍씨를 유폐시킨 거로 비춰진 것)
당시 청나라를 오가던 조선인 실학자들도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남김. (역시 기록의 민족)
홍대용이 남긴 기록을 보면
‘아직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하나, 대강 황제가 특별히 총애하는 귀비 하나가 있으니, 황후와 싸움하는 연고로 황제에게 죄를 얻어 장차 폐할 거조가 있을 것이로되, 아직 결단치 아니 하였는지라, 방물 중에 황후에게 바칠 것이 있으니, 중국에서는 13성에 조서하여 황후의 방물을 바치지 말라 하였으되, 외국은 미리 알게 함이 좋지 않다 하여, 예부에서 의논을 결단치 못하였는 고로 바칠 기약이 없다 하더라
대충 요약하면 ‘건륭제가 영귀비를 총애하는데 영귀비가 황후랑 존나 싸웠다, 영귀비가 황후를 모함해서 그거 때문에 황후가 유폐된 거 같다’ 정도의 내용임.
또다른 실학자인 박지원도 비슷한 추측을 했는데, 대신 박지원이 지목한 원흉(?)은 영귀비가 아니라 용비였음. 위구르 지역 출신 후궁임. 용비는 만주어를 못하고, 나랍씨는 위구르어를 못해서 둘이 의사소통이 안 되는 바람에 갈등이 있었다고 함. (건륭제는 위구르어를 할 줄 알아서 용비랑 이야기 가넝)
반박
-> 가장 먼저, 홍대용과 박지원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자기들이 주워 들은 소문에 불과함. 홍대용 본인이 자기 입으로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하나’라고 하잖음. 두 사람이 지목하는 배후가 서로 다른 것만 봐도 신빙성이 떨어지짐. 그리고 영조한테 불려가서 청나라에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역관도 ‘황후 관련으로 일이 하나 일어나긴 했는데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른다’고 답함.
당시 청나라 조정의 대신들도 건륭제가 나랍씨한테 너무 가혹하다고 여겼음. 15년간 황후였고 적장자까지 낳은 사람인데다 그 적장자인 영기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나랍씨한테 시호를 안 주고, 나랍씨의 그림을 모조리 없애거나 얼굴을 덧칠해버리며 분서갱유까지 하고 있으니 기겁 안 하는 게 더 이상함.
근데 나랍씨의 편을 들며 3년상 치러주자고 한 대신들은 다 처벌받음. 옥살이는 기본이고 심한 경우에는 외딴 곳으로 유배를 가 평생 돌아오지 못했음. 건륭제가 이 정도로 나랍씨한테 분노하고 나랍씨 이야기 자체를 금지해버린 마당에 청나라 대신들이 조선인 실학자힌테 제대로 된 사정을 전해줬을 가능성은 낮아보임.
(애초에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사상과 언론을 엄청 엄격하게 통제함. 특히 만주족 황실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글을 쓰면 바로 모가지 댕강이었음.
이렇다 보니 청나라 지식인들은 언제나 몸을 사리고 입을 조심했음. 위에 말했듯 건륭제가 나랍씨한테 매우 분노해서 칼춤 추고 있는데 외국인인 조선 실학자한테 황실 사정을 떠벌린다? 능지처참해달란 거랑 뭐가 다름...애초에 청나라 대신들조차 나랍씨가 단발한 이유를 몰랐을 가능성이 더 높고 ㅇㅇ...)
후궁 암투가 진짜 있었을 수도 있잖아.
-> 나랍씨가 첫 황후와 달리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고, 건륭제의 엄청난 총애와 특혜로 이례적인 승진을 한 건 맞음. 나랍씨의 기반은 가문이 아니라 건륭제의 총애였음.
근데 용의자로 지목되는 영귀비와 용비는 나랍씨보다도 배경이 떨어짐. 영귀비의 가문은 만주족 포의인데, 포의는 하급 귀족임. 용비는 한 술 더 떠서 위구르 출신이고 ㅇㅇ
실제 청나라는 드라마와 달리 서열이 엄청 엄격했기 때문에 후궁들이 황후에게 함부로 대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음. 영귀비나 용비가 나랍씨보다 집안이 빵빵해도 위험할 텐데, 오히려 부족한 주제에 감히 황후를 모함한다? 뒤지고 싶어 작정한 거임. 자살 방법이 다채로우시네요 ㅎㅎ 할 일.
또 건륭제는 상당한 마마보이였기 때문에 태후에 대한 효도를 중시했음. 그 태후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순행 중에 영귀비나 용비가 자기보다 높은 황후를 모함했다? 그 내용에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건륭제의 성격상 오히려 모함한 사람한테 화 냈을 거임. 태후를 모시는 중에 감히 삿된 소리를 한다고ㅇㅇ
건륭제는 문제의 남순에 나랍씨를 데려가서 생일을 축하해주고 사건 당일 아침에도 귀한 음식을 챙겨줬잖음? 나랍씨의 돌발 행동이 후궁암투 때문이라면 ‘고작 반나절 사이에 영귀비가 건륭제에게 엄청난 설득력 있는 모함을 해서 ->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랍씨를 극진히 챙기던 건륭제가 180도 돌변해서 나랍씨한테 (단순한 훈계 수준이 아닌) 개지랄을 하고 -> 이에 이성을 잃은 나랍씨가 꼬우면 죽여보란 심정으로 머리를 잘랐다’ 라는 말이 되는데, 반나절 만에 벌어지기엔 너무 스케일이 큰 일임.
(만약 나랍씨가 진짜 뭐 반역 같은 큰 죄를 지었고 그걸 영귀비나 용비가 건륭제에게 고발했다고 해도...그럼 그냥 그 죄가 뭔지 공표하고 나랍씨를 폐위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그림임)
가설 2 : 건륭제가 영귀비를 황귀비로 올리고 영귀비 소생 15황자를 황태자로 책봉하려고 해서 나랍씨가 눈이 뒤집혔다
말 그대로 건륭제가 영귀비를 황귀비로 올리고 영귀비 소생의 15황자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단 거임. 나랍씨의 아들인 영기가 적자 대우를 받긴 했으나 황태자로 공식 책봉되거나 누구나 후계자로 여길 정도의 편애를 받은 건 또 아닌 데다가 남순 당시 건륭제의 나이가 (그 시대 기준으로 노년인) 50대였으니 후계 문제로 인해 나랍씨가 예민해진 게 아니었나 하는 추측임.
앞서 말했듯 동악비의 케이스를 제외하면 황귀비는 오랫동안 황제의 곁을 지켜온 후궁이 죽기 전 예우해주는 느낌임. 고로 황후가 멀쩡하고 황후 소생 적자도 있는데 아직 젊고 건강한 영귀비를 황귀비로 올리는 건 대대적인 사건이 맞긴 함. 후계 문제는 뭐 말할 것도 없이 큰 일이고ㅇㅇ
영귀비는 건륭제의 후궁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을 정도로 총애받았고, 나랍씨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이런저런 특혜를 누렸기 때문에 이 썰이 나옴. 실제로 영귀비는 나랍씨 유폐 사건 몇 달 후인 그해 5월 황귀비가 됐고, 영귀비 소생의 15황자가 건륭제의 뒤를 이어 가경제가 되자 황후 추존까지 받음
반박
-> 일단 후계 문제를 먼저 보겠음. 건륭제가 사망하고 나랍씨 소생이 아닌 황자가 황제가 되면 나랍씨와 새 황제의 생모 둘 다 태후가 됨. 이건 나랍씨가 걱정할 일이 맞음. 근데 나랍씨 유폐 당시 12황자 영기가 후계 구도에서 제외됐다는 근거가 전혀 없음.
- 첫 황후 소생의 아들 둘은 이미 사망한 후였음. 건륭제가 둘을 예뻐하고 황태자의 예로 장례를 치른 건 맞지만 영기한테 적자 대우를 소홀히 한 적은 없음.
- 4황자와 6황자는 다른 황족의 양자로 입적됐으니 제외
- 5황자가 친왕 작위를 받은 거로 5황자가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단 말이 있는데, 자금성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건륭제를 구한 공로로 친왕 작위를 받은 것 뿐임. 무엇보다 나랍씨 단발 사건 당시 5황자는 병이 들어 오늘 내일하는 상태였음. 나랍씨가 사망하던 1766년에 5황자도 사망했음.
- 당시 건륭제는 이미 50대였고, 영귀비 소생 15황자는 고작 6살이었음. 결과적으로야 건륭제가 오래 살았지만 당시의 50대라고 하면 내일 뒤져도 안 이상한 나이임. 근데 고작 6살인 15황자를 후계자 삼으려고 했단 건 신빙성이 부족함.
- 그나마 가귀비 소생 8황자&11황자가 거슬렸을 수 있겠지만...가귀비는 단발 사건 10년 전에 죽은 고인이었음. 아주 만약 가귀비 소생 황자가 즉위하더라도 태후는 나랍씨 뿐임.
청나라는 태자밀건법이란 게 있었음. 조선처럼 미리 태자를 정하는 게 아니라, 황제가 후계자를 지목하는 유서를 남겨두는 거임. 고로 청나라에서 살아있는 황제에게 후계 문제를 거론하는 건 불경한 행위였음.
‘건륭제가 나이가 많으니 나랍씨가 초조해졌다’까진 그럴 듯 함. 근데 ‘물불 안 가리고 후계 문제에 개입할 정도로 조급해질 상황이었다’는 건 딱히 모르겠음. 당시 기준으로 궁정생활만 30년을 넘게 한 나랍씨가 황제에게 후계 문제를 논하는 게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몰랐을 리도 없고ㅇㅇ
영귀비를 황귀비로 올리려고 했단 것도 딱히 모르겠음. 단발 사건 이후 영귀비를 황귀비로 올리긴 했지만 황후 자리가 사실상 공석이 됐으니 올려야만 했음. 너무 결과론적임.
일단 건륭제는 신분의 귀천에 엄청 엄격한 사람이었음. 영기를 포함한 다른 황자들이 건륭제보다 일찍 요절하면서 결국 15황자에게 양위하고 생모인 영귀비를 황후로 추존해주긴 했지만, 황후 대우는 끝까지 안 해줬음. (건륭제 양위 당시 영귀비는 이미 사망한 후였음)
영귀비의 아들이 황태자도 아닌 황제가 된 거잖음? 죽은 영귀비에게 황후 대우를 조금 해준다고 해서 감히 뒷말을 할 간 큰 대신은 없었을 거임. 비단 건륭제 뿐 아니라 새 황제인 가경제의 분노까지 더블로 받는 거니까ㅇㅇ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륭제는 ‘영귀비가 황후로 추존된 건 (귀한) 아들 때문일 뿐’이라며 황후의 예를 안 치러줬고, 영귀비가 낳은 공주도 끝까지 서출로 대함. 즉 건륭제가 영귀비를 황후로 추존해준 건 영귀비 소생의 15황자가 후계자가 됐으니 그 정통성을 보완해주기 위한 거였지 영귀비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음.
물론 영귀비의 집안이 한미했긴 함. 근데 그게 건륭제가 영귀비에게 특혜를 ‘안’ 베푼 게 아니라 ‘못’ 베푼 거란 근거는 전혀 될 수 없음. 애초에 나랍씨도 영귀비보다 나을 뿐 대단한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잖음? 나랍씨한테 온갖 특혜를 베풀며 황귀비 시절부터 황후 이상의 예우를 해준 건 다름 아닌 건륭제임.
신분의 귀천에 엄격한 건륭제가 한미한 가문 출신의 나랍씨에게 말도 안 되는 특혜를 베푼 건 당시 건륭제가 얼마나 나랍씨한테 찐사랑이었는지 보여주는 요소인 동시에, 만약 건륭제가 영귀비에게도 (나랍씨한테 그랬던 것처럼) 찐사였다면 영귀비의 가문에 상관하지 않고 특혜를 베풀었으리란 반증임.
또 건륭제는 되게 뒤끝이 길고 집요한 성격이었음. 만약 나랍씨가 미쳐버릴 정도로 영귀비를 총애했고, 부부싸움을 벌이다 단발이란 모욕을 당했다면 영귀비를 황귀비로 올리는 과정에서 (나랍씨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 때문에라도) 나랍씨에게 해줬던 특혜를 영귀비에게 똑같이 베푸는 그림이 더 자연스러움.
근데 영귀비의 황귀비 책봉례는 보통의 황귀비 수준에서 끝남. 교지를 천하에 반포하거나, 태후전에 존호를 올리거나, 중궁전표를 하사받는 일은 일체 없었음. 아무리 영귀비의 가문이 미천했다지만 영귀비 때문에 나랍씨를 유폐시키고 정작 영귀비에게 아무 특혜도 안 베풀어줬단 건 이상함ㅇㅇ
나랍씨한테 온갖 특혜를 베풀고 법도까지 바꾼 이력이 있는 건륭제가 영귀비한테 푹 빠져서 나랍씨가 미쳐버릴 정도의 애정을 퍼부었는데, 정작 영귀비한텐 아무 특혜도 안 베풀어주고 +영귀비 소생 15황자가 황제가 된 후에도 철저히 선을 긋고 후궁의 예로만 대했다? 영귀비한테 푹 빠져서 물불 안 가렸다는 건륭제가 당일 아침에 나랍씨한테 귀한 음식을 챙겨주고 저녁 식사 같이하자고 약속했다? 뭔가 앞뒤가 안 맞음ㅇㅇ
(단순히 나랍씨에 대한 애정이 식어 내치려고 쇼를 벌였다고 보는 것도 무리인 게, 건륭제는 황제잖음. 나랍씨를 내치는 게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본인에게 유리한 이유를 지어내서 나랍씨를 모함할 수 있는 위치임. 실제로 중국의 많은 황제들이 저런 방식으로 아내, 형제, 자식을 정치적으로 숙청함.
근데 건륭제는 나랍씨를 유폐한 후에도 이유를 제대로 털어놓지 않음. 이에 청나라 대신들은 나랍씨 편을 들다가 처벌을 받았고, 같은 시기 조선에서도 건륭제의 처사가 너무하다고 여겼음. 건륭제가 나랍씨를 내치려고 벌인 쇼라면 너무 어리석은 짓임. 자기한테 가장 불리하고 명분 없는 길로 간 거잖음
무엇보다도...건륭제는 항주 사건 직후 두 달 동안 일관 되게 나랍씨와 화해하고 싶어했고, 나랍씨가 자기 칙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을 계속 살펴봄. 이중인격이 아닌 이상 말이 안 됨)
가설 3 : 건륭제의 여성 편력 때문에 싸웠다
남순 도중 건륭제가 해당 지역에서 만난 여인과 동침하자 이성을 잃은 나랍씨가 건륭제한테 화를 냈다는 썰임
반박
-> 건륭제의 여성 편력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썰이 너무 많음. 이 글 초반에 언급했듯 건륭제는 황제치고 딱히 여성 편력이 심한 편이 아니었고, 특정 몇 명만 깊게 총애했음. 건륭제가 총애한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황자였던 시절에 결혼한 부인들:
게다가 당일 아침에는 나랍씨와 건륭제가 화목했잖음? 건륭제가 뜬금없이 남순 도중에, 태후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태후를 모시고 나온 길에, 심지어 대낮에 아무 여자랑 동침한다? 딱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음.
그리고 만약 건륭제가 진짜 남순 도중 새로운 여인과 동침했다고 해도 그게 나랍씨의 단발과 연관이 있어 보이진 않음. 건륭제가 다른 여자와 동침했다는 이유로 단발을 해버릴 정도면 평소에 질투가 심했을 텐데, 나랍씨는 엄청 얌전하고 나긋한 성격이었고, 남순 이전에도 건륭제는 영귀비 포함 몇몇 후궁을 총애했음. 영귀비가 건륭제의 아들을 낳고 소소하게나마 특혜를 받아도 별 말 없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를 잘랐단 건 흐름이 이상함.
두 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후에도 건륭제는 ‘나랍씨가 원래 어질었는데 남순 도중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표현했고, 나랍씨의 조카인 눌소궁한테 보낸 비밀 편지에서도 ‘나랍씨가 갑자기 출가하겠다면서 머리를 잘랐는데 이게 황후가 할 행동이냐?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고 당혹감을 내비침.
만약 나랍씨가 원래 질투가 심하고 불같은 성격이었는데 기록에 없었던 거라면 건륭제는 ‘내 저것이 언젠가 저럴 줄 알았지’ 하며 화만 냈어야 함. 당황하며 충격받을 이유가 없음. 도대체 궁인이 황후를 어떻게 모셨기에 황후가 갑자기 저러냐며 궁인을 고문했단 건 결국 나랍씨가 전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단 거임.
가설 4 : 나랍씨가 진짜 미쳤다
일단 나랍씨는 남순사건 약 10년 전인 1755년부터 힘든 일을 연달아 겪음. 첫 딸이 1755년에 두 살 나이로 요절했고, 1757년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둘째 아들이 또 요절함. 연달아 어머니와 자녀들을 잃은 나랍씨가 극도로 우울해하며 불교에 심취했다는 기록이 있음.
‘이전부터 우울증을 앓은 데다 갱년기까지 겹쳐서 나랍씨가 ㄹㅇ 미쳤다’는 가설임. 기분 울적한 수준응 넘어 심각한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다는 거 ㅇㅇ. 이 경우 유폐된 다음해에 사망한 것도 나랍씨의 자살이나 뇌질환 악화로 해석함.
이건 그럴듯한 이야기인 게, 당시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음. 정신질환을 치료 가능하고 치료해줘야 할 병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저주받았다 or 악귀 들렸다 로 여김.
황실에서 정신질환자가 나오면 (동서양 안 가리고) 황가의 수치로 여겨서 외면하다가 통제가 불가능할 수준이 되면 유폐하는 게 보통이었음. 당장 옆나라 조선의 사도세자만 해도 정신질환을 겪는데도 쭉 방치당하다가 그게 극심한 수준으로 발전해서 살인까지 저지르고, 결국은 영조 손에 죽었잖음.
건륭제가 심복들에게 황후 처소를 수색하라고 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음. 앞서 언급한 가설들 속 후궁 문제나 후계자 문제가 없었다면, 2월 18일의 단발 사건은 (건륭제 입장에서) 오늘 아침에만 해도 나랑 잘 지내고 아무 문제 없던 사람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반역을 저지른 게 됨.
이러면 문자 그대로 ‘얘가 미쳤나? 귀신 들렸나? 누가 황후를 저주해서 정신을 놨나?’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고, 건륭제가 비밀 편지에서 호소한 당혹감도 납득이 됨.
다만 이쪽도 의문의 여지는 있는 게, 나랍씨가 자식들을 잃고 힘들어한 건 10년 전의 일임. 남은 기록을 봐도 어디까지나 나랍씨가 아이들을 잃고 우울해했다, 실의에 빠졌다, 불교에 의존했다, 정도지 정신질환으로 해석할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음.
우울해했다는 1755년 이후로도 꾸준히 건륭제와 사이 좋은 모습을 보였고, 행사에도 항상 참석함. 당장 단발 사건 일주일 전의 생일 때만 해도 아침식사 저녁식사 다 함께하며 행복해했음.
(같은 시대에 정신질환을 겪은 사도세자의 경우 한중록 대천록 등 여러 기록물에 정신질환으로 해석할 만한 묘사가 반복적으로 나옴. 의대증을 앓았다던가, 심화가 생겼다고 호소한다던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살인을 저지른다던가)
또 앞서 말했듯 건륭제는 나랍씨의 단발에 엄청 당황해했음. 비밀 편지에서 나랍씨가 왜 그랬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호소하고, 궁을 수색하고, 궁인을 심문한 건 결국 단발 사건 이전까지는 나랍씨가 별다른 이상 행동을 하지 않았단 뜻임.
황제와 태후의 면전에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면 충분한 전조 증상이 있었거나, 트리거가 될 만한 사건이 당일에 일어났을 텐데 양쪽 다 증거가 전혀 없음. 건륭제가 (트리거가 된 사건이 뭔지 알면서도) 황실의 수치로 여겨서 함구했을 가능성이 약간은 있지만 일단은ㅇㅇ
결론
<나랍씨가 태자밀건법을 무시하고 후계 문제에 관여하다 개가치 싸웠거나 or 꾹꾹 누르고 숨겨오던 질투심이 하필 저날 최악의 형태로 폭발했거나 or 정신질환을 앓았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21세기의 우리는 절대 알 수 없고, 어쩌면 당시의 건륭제도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을 미스테리다.
건륭제는 황후가 머리를 자른 이유를 알면서도 평생 입을 다문 ‘황제’일 수 있고, 반대로 나랍씨가 자기를 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죽을 때까지 궁금해하고 괴로워한 ‘남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영기 불쌍해ㅠㅠ
- 끗 -
나여시 나랍씨오타쿠인데 혼자 궁금해하기 지겨워져서 글 씀.
이제 여시들도 같이 괴로워하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