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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돋]나치 중에서도 가장 잔인했던 나치 전범

작성자세차|작성시간24.11.25|조회수4,251 목록 댓글 10

출처: https://www.fmkorea.com/7724574796

 

 

제 36무장척탄병사단장 오스카 디를레방어(oskar dirlewanger) SS 상급대령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새끼가 뭘 했길래 그 나치 독일에서도 제일 잔인하다고 평가받았는지 간단히 알아보자

 

 

1.민간인 시절에 13살 여자애 강간해서 감옥들어감

 

2.온갖 강력범, 사상범, 탈영병, 동성애자 등등 나치 기준으로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형벌부대의 수장이 됨

 

3.벨라루스에서 마을 200개를 태움, 12만킬 달성하고 히틀러한테 직접 독일 십자훈장 받음

 

4.탁아소를 점령한 디를레방어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아이들을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이도록 명령함, 850킬 추가

 

5.유대인 시체로 비누를 만듬, 이 소문이 나중에 아우슈비츠에서 시체로 비누를 만들었다고 와전됨

 

6.군견들한테 유대인 여자 수간시키고 시체 먹이기가 취미

 

7.신생아를 잡으면 항상 공중에 던져서 총검으로 찔러 죽였음

 

8.러시아 민간인들을 징집해 지뢰 제거 작업에 투입함, 물론 맨몸으로

 

9.적군이 전차를 공격할 수 없도록 어린이를 인질로 매달고 다님

 

10.바르샤바에서 이틀동안 4만명을 죽임

 

 

...그만 알아보자

 



젊은 시절

 

디를레방어는 1895년에 태어나서 1913년에 뷔르템베르크 군에 입대했고, 1년 후에 세게대전을 맞이한다.

 

청년 디를레방어는 입대 전부터 항상 알코올에 찌들어 살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전쟁에서는 수류탄으로 프랑스군 전차를 직접 격파할 만큼 매우 용감하게 싸워 

6번의 중상을 입었고 전신의 40%에 장애를 입었으며, 

결과적으로 수많은 전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두 개나 받았고 이등병에서 중대장까지 진급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억류되어 잔혹 행위에 대해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지만, 

본인 중대원들에 옆 중대원까지 포함해 600명을 이끌고 독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롱게리히 교수는 루마니아에서 무사히 탈출한 경험이 훗날 디를레방어의 법과 시민사회를 경멸하는 태도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전간기

 

디를레방어는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에 가입해 튀링겐, 루르, 작센을 돌아다니며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다.

 

1921년, 공산주의자 막스 호엘츠가 노동자 폭동을 일으키자 장갑열차를 끌고 진압 작전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머리에 총상을 또 입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물러났고 디를레방어는 애국자로 칭송받았다.

 

 

1922년에는 무려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고졸도 지식인 취급받던 시절에 박사를 딴 것

 

1923년에는 박사 학위를 발판으로 나치당에 간부로 가입한다.

나치 집권 이후에는 지역 노동국장으로 일하다 위에서 언급한 미성년자 강간 사건으로 2년 징역을 받고 파직,

제국 총리실 앞에 찾아가서 판결에 항의하며 난동을 부리다 노동수용소로 질질 끌려갔다...

 

 

하지만 1차대전 시기 전우였던 고틀로프 베르거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것을 조건으로 디를레방어를 구명해주었고

 

스페인에서 또 많은 전과를 세워 나치당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한다.

 

 



폴란드 군정청

SS의 수장 하인리히 힘러는 뛰어난 사냥 실력을 가졌르며, 추적과 탐색에 능숙하고

'법을 어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폭력성과 야성성을 가진 밀렵꾼들, 나아가 범죄자들을 모아

빨치산 소탕 부대를 꾸릴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디를레방어의 친위부대, ''36 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

 

 

디를레방어는 우생학이니, 사회진화론이니 하는 이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마음껏 강간하고 약탈하고 학살할 대상이 필요했다.

 

대대는 폴란드의 루블린으로 보내져 빨치산으로부터 게토를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디를레방어는 임무 따위는 뒷전이었고 게토를 약탈하고 인질을 잡아 몸값을 갈취하는 데 열중했다. 

 

그의 부대원들은 휘발유로 인질들의 성기를 불태우거나 마구잡이로 채찍질을 한 다음 스트리크닌을 주사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것을 즐겼다. 디를레방어는 '직접'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가리지 않고 강간했으며, 57명의 유대인을 독살하고 시체를 말고기와 함께 썰어 비누로 만들었다.

 

 

디를레방어의 부대는 유대인 여성들을 끌고 다니며 성노예로 부렸기 때문에 동료 SS 장교들에게 굉장한 불쾌감을 주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유대인을 먹으면 신체가 오염된다고 생각해서 동맹국 병사를 죽여서 잡아먹었다. 유대인과 접촉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디를레방어는 유대인 성노예 문제로 여러 번 법정에 기소당헀으나 베르거와 힘러의 빽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동부전선


범죄자들을 모아 둔 디를레방어 부대에는 어떤 규율도 없었다. 

부대 주둔지 근처는 한마디로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마굴이었다.

 

디를레방어는 항상 술과 마약에 절어 있었다.

 

그는 평소에는 상냥한 말투로 쓰며 친근한 친구처럼 부하들을 대하고 전리품을 후하게 나누어 주었지만,

사소한 실수에도 가시 몽둥이로 때리고 철제 상자에 가두거나 즉결 처분을 내리는 등 군 형법에 없는 잔혹한 형벌을 남발했다.

 

디를레방어는 채찍과 당근으로 부대원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지만 부대원들 사이에 유대감을 만들지는 못했다.

부하들이 서로 약탈품과 여자를 두고 총격전을 벌일 정도로 부대 분위기는 막장이었다.

사실상 이 부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디를레방어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점차 디를레방어의 사병(私兵)이 되어갔다.

 



그들의 행태는 절멸수용소장 오딜로 글로보츠닉조차 경악시킬 정도로 잔인했다.

 

글로보츠닉은 힘러에게 그들의 강간, 고문, 학살행위로 인해 폴란드에 두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동부전선으로 보내 좀 더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맡겨야 한다고 탄원했다.

 

1942년, 디를레방어는 후방 안정 임무를 맡고 벨라루스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200개의 마을을 태우고 12만명을 죽였다.

 

이런 방식은 단기적으로 게릴라를 억제하는 효과를 거뒀지만 장기적으로 더 많은 주민들을 게릴라로 만들게 되었다.

 



바르샤바 봉기

 

디를레방어 부대는 점점 더 커져 마침내 여단이 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잔인해졌다.

 

1944년, 디를레방어 부대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된다.

 

그들은 바르샤바 시내를 돌면서 모든 민간인들에게 거리로 나오도록 지시했고, 이틀만에 4만명을 죽였다. 

디를레방어는 병원 3곳을 불태웠으며, 간호사들을 집단 강간하고 산 채로 태웠다. 

어떤 병사는 총검으로 강간하던 여자의 블라우스를 자르고 목부터 배까지를 그대로 절개했다. 피가 쏟아져나와 굳었다.

 

여단원들은 분살을 일삼았고,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다니며 박자에 맞줘 채찍질을 했다.

한번은 디를레방어가 거리의 군중 속에 있던 한 어머니의 품에서 아이를 빼았았다. 

그리고, 아이를 높이 들어올린 다음 불 속에 집어 던졌다.

 

 

디를레방어 여단과 다른 독일군 부대의 차이점은, 

다른 부대들은 전투를 하고 남는 시간에 학살을 했지만

디를레방어 여단은 학살을 하고 남는 시간에 전투를 한다는 점이었다.

 

여단은 학살과 약탈에 열중하느라 예정된 목적지의 절반까지도 진격하지 못했다.

 

 

디를레방어 여단은 심지어 같이 학살을 하던 국방군과 SS 부대와도 이런저런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진압군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이 여단을 바르샤바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힘러는 디를레방어 여단이 돌변하여 아군을 공격할 상황에 대비해 그들의 주변에 헌병대를 배치해야만 했다.

 



패전

패전이 가까워오자 여단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탈할 무언가가 없는 상황에서 더 싸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곳곳에서 탈영과 상관 살해가 잇달았다. 

참모 율리안 쇠르너는 뒤통수에 총을 맞고 살해당했고 73연대장 에발트 엘러스는 부하들의 탈영을 막다가 나무에 목이 매달렸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가 시작된 시점에서 부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1945년 2월 14일, 디를레방어는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실려갔으며 다시는 전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악당에게 악당이 죽다

 

디를레방어는 제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인 행세를 하며 그의 오두막까지 달아났고 은신처에 재산을 숨긴 후 스위스로 달아나려고 시도했다.

 

후임 사단장 프리츠 슈메데스를 포함하여, 많은 부대원들이 서쪽으로 달아나 전범재판을 피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디를레방어는 그렇지 못했다.

 

1945년 5월 7일, 디를레방어는 알트하우젠의 자유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들이 디를레방어가 누구고 그가 저지른 전쟁 범죄를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그가 친위대 간부임은 들통나고 말았다.

 

 

자유프랑스 1군이 알트하우젠의 독일군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한 요한 프레데리크 로러(Johann Friedrich Rohrer)라는 사람은 디를레방어보다는 덜하더라도 비슷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로러는 아무런 범죄 행위가 없는 독일군 포로들에게도 매우 가혹하게 대했고, 무작위로 채찍질을 하거나 손톱을 뽑는 고문을 가했다. 전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들의 재산을 찾아내 가로채기 위해서였다.

 

디를레방어와 같이 수감되었던 한 공군 병사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함께 폴란드인 교도관에게 몽둥이로 구타당하다 머리를 맞아 기절했고, 그대로 죽었다. 사인은 심장병으로 기록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남겼다. "악한 인간이 훌륭한 군인이다."

 

그 말대로 디를레방어는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30년이나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뛰어난 전투기술을 가지고 소부대를 능숙하게 지휘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수천명의 범죄자들을 채찍과 당근으로 통솔하는 일에도 성공했다.

그는 칼에 베이고 총에 맞으며 12번이나 치명상을 입으면서도 끝모를 가학심을 연료로 삼아 끊임없이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그렇지 못했다.

 

그의 부대에는 협동과 단결이 없었으며 부대원들은 약탈과 학살에만 열중하다 전투가 벌어지면 꽁무니를 빼기 바빴다.

 

결과적으로 후방 민병대와의 교전에서도 300%가 넘는 손실률을 내는, 그야말로 SS 입장에서도 국가규모 용역깡패질 말고는 용도를 찾지 못할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군대의 전투력은 잘 조직된 병사들의 철통같은 규율에서 나오는 것이지, 

범죄자들의 잔인함과 흉포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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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OH YES | 작성시간 24.11.25 아우.. 속이 울렁거려ㅠㅠ
    저런 인간들 뇌부터 좀 해부해보면 안되나 뭐가 문제인지.. 과학 발전은 저런 인간들 제정신 만드는데부터 실험해봤으면 좋겠어 저런 인간들은 인간의 존엄성 윤리 그딴건 개나줬으면 ㅠㅠ
  • 작성자킬리호위스 | 작성시간 24.11.25 역겹다
  • 작성자하이고발목아 | 작성시간 24.11.25 그냥 범죄자잖아
  • 작성자부자되자 | 작성시간 24.11.25 악마도 울고가겠네 세상에..
  • 작성자둘기마루 | 작성시간 24.11.25 극단적으로 입술얇고 화살코에 눈 가로 긴 사람중에 싸패많이 봄 ㄹㅇ 관상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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