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흥미돋](요약ㅇ)초기 고구려에 '여율'이란 임금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4.11.29|조회수1,568 목록 댓글 6

출처: https://blog.naver.com/hanulica32/223675207480

 

너무 길면 제일 아래 3줄 요약!

초록 글자는 우리 측 사료빨간색 글자는 외국 측 사료입니다!

 

 

1. 고구려 초기 왕계 기록의 충돌!!

 

우리는 초기 고구려의 임금이 1대 추모왕(=주몽),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의 순서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구려 왕실이 서기 414년에 세운 <광개토대왕릉비>도 동일한 내용이 존재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

옛적에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개창하였다.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난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강림하였으니, 탄생하면서부터 성스러움이 있었다. … 수레를 출발시켰다.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경유하였다. 

왕이 나룻가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입니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음성이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였다. 그러한 다음에 건널 수 있었다.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세속의 왕위를 기꺼워하지 않으니 황룡을 보내니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천상(天上)으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이 도(道)로써 치세를 진흥시켰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이 왕업(王業)을 계승하였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랐으니 왕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정작 그 이후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은 북위인들은 조금 다른 기록을 남겼습니다.

'여율'이라는 임금을 한 명 더 언급하였는데요.

 

 

<위서> 동이전

지난 날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잉태하였었는데, 

주몽이 도망한 뒤에 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처음에는 여해(閭諧)라 하였다. 

성장하여 주몽이 국왕이 되었음을 알고는 곧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고 나라 일을 그에게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되었다.

 

 

북위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초기 고구려는 1대 주몽, 2대 여달, 3대 여율, 4대 막래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2대 여달은 주몽의 아들로 성인이 되어 주몽을 찾아갔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유리왕'으로 비정됩니다.

또한 4대 막래는 부여를 정벌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대무신왕'으로 비정됩니다.

사실 과거에 막래를 5대 모본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긴 하였으나,

고구려측 기록에 5대 모본왕이 부여와 전투를 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3대 대무신왕 기에 부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후 부여가 고구려에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았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보는 견해가 훨씬 우세합니다.

참고로 대무신왕이 정말 부여를 정벌하였는지 여부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긴 할 겁니다.

 

어쨌거나 <삼국사기>나 <광개토대왕릉비>는 1대 주몽,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으로 기록한 반면,

북위인들이 남긴 <위서>는 1대 주몽, 2대 여달(=유리왕), 3대 여율, 4대 막래(=대무신왕)으로 기록하여

두 기록이 '충돌'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기록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에 대한 '통설'이랄 게 아직 안 보인다는 겁니다. 

제가 존경하는 고구려사의 거두 노태돈 교수님께서도 

'고구려 왕실이 주몽-유리-무휼로 이어지는 왕계를 공식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사회에서 또 다른 전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취지로만 말씀하실 뿐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1999), 86]. 

 

 

2. 어느 기록을 우선시 해야 하는가!

 

먼저 <위서>에 대해서는 고구려 외부의 사람들로서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가져왔겠냐면서

'여달'과 '여율'이 동일한 사람인데 마치 두 명인 것처럼 착각을 했을 것이란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위서>의 내용은 외국인이 작성한 것이므로 그다지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봅니다

[박노석, "고구려 초기 왕들의 계보 고찰", 전북사학 제44호(2014) ,10].

 

반면, <위서>의 기록이 오히려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하면서

고구려 왕실이 자신들의 역사를 정립하면서 

'주몽-여달-여율-막래'라는 왕계를 '주몽-유리-무휼'이란 왕계로 축소하는 과정에서

여달과 여율을 '유리'라는 하나의 인물로 합쳤다는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호규,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2010), 166].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쟁점에 대한 '통설'은 아직 잘 안 보입니다.

다만 저는 <위서>를 좀 더 믿는 입장입니다.

여호규 교수님의 결론에 따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여호규 교수님께서 제시한 근거 외에도 몇 가지 제가 생각한 근거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하는 저의 '사견'에 불과하므로 가볍게 읽어만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위서>의 왕계가 조금 더 실체적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보이는 사정들

 

  가. 의외로 <위서>의 기록은 신빙성이 높을 수도 있다. 

 

<위서>는 주몽의 아들 여달, 여달의 아들 여율, 여율의 아들 막래라는 계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기록들이 생각보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달이 '어머니와 함께 주몽을 찾아왔다'는 구절이 교차검증이 됩니다.

과거에 제가 쓴 글에도 소개하였지만 유리왕 설화에서는 

유리가 어머니와 함께 주몽을 찾아가지 않아서 주몽의 앞에서 자신이 주몽의 친자임을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리가 굳이 어머니를 놔두고 혼자만 주몽을 찾아간 것도 이상하거니와

유리가 어머니와 함께 찾아갔으면 굳이 친자임을 증명할 이유가 없는데

굳이 혼자 찾아간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찰나에

고구려본기의 또 다른 기록에는 유리가 어머니와 함께 주몽을 찾아갔다는 내용이 있어서

유리왕 설화보다는 고구려본기의 또 다른 기록이 더 실체적 진실에 부합할 거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위서>의 기록은 여달이 어머니와 함께 주몽을 찾아갔다고 서술하였고

이는 고구려본기의 또 다른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유리왕 설화보다 더 사실에 가까운 서술을 한 것입니다. 

 

둘째, 막래가 부여를 복속하였다는 부분이 의미심장합니다.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지만 고구려인들은 3대 대무신왕이 부여와의 전쟁에서 부여왕 대소를 사살하였고,

그 뒤 부여는 스스로 붕괴하여 고구려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던 북위인들은 고구려인들의 말을 듣고

막래가 부여를 통합, 복속시켰다는 말까지도 기록한 것이지요.

이 당시엔 부여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쇠락하여 북위인들로서는 진실을 알 길도 없었을 테구요.

 

그런데 정작 부여가 멀쩡하던 시기의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부여가 고구려에게 그렇게 깨진 것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다시 말씀드리지만 별도의 글에서 다룹니다). 

즉, 대무신왕이 부여를 정벌하여 통합, 복속하였다는 것은 고구려인들의 '과장'인데요.

이 과장조차 북위인들이 그대로 받아 적어 기록한 것을 보면

<위서>의 기록은 고구려인들로부터 전해들은 기록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몽-여달-여율-막래로 이어지는 계보를 결코 가볍게 볼 것은 아니란 겁니다.

 

셋째, 북위인이 착각을 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을지 의문입니다.

<위서>에 의하면 주몽의 아들이라는 여달의 원래 이름은 여해였는데 

아버지를 만난 다음 여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북위인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에게 전해들었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이렇게 고구려인들에게 전해듣는 과정에서 북위인이 얼마나 착각을 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착각을 해야 임금을 1명 더 추가하여 '여율'이란 가공의 인물이 생길지도 잘 모르겠구요.

그래서 저는 고구려인이 주몽-여달-여율-막래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대로 전해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위인은 이를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구요.

 

만약 <위서>의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북위인의 잘못이 착각 때문이 아니라

북위인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준 고구려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데요.

이러한 경우엔 해당 고구려인이 '착각'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요.

그런데 고구려인이 '착각'을 했을 가능성은 이 글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보도록 하구요. 

일단은 고구려 왕실의 입장이 담긴 <삼국사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나. 유독 기년에 있어 모순이 많이 발견되는 유리왕의 기록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은 '유리왕 2년 7월'에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왕비는 바로 다음해인 '유리왕 3년 10월'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리왕은 곧바로 중국인 치희와 고구려인 화희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여인의 싸움이 그치지 않아 중국인 치희가 집으로 가버렸고

그 과정에서 유리왕이 슬픔에 젖어 썼다는 시가 그 유명한 황조가입니다.

어쨌거나 유리왕은 송양의 딸과 1년 3개월의 짧은 결혼 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문제는 그 이후에서 발생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그의 이름은 무휼(無恤)이며, 유리왕(琉璃王)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장성해서는 호걸의 풍모에 큰 지략을 지녔다. 

유리왕 재위 33년 갑술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당시의 나이는 11세였는데 유리왕이 죽자,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송씨(松氏)이니, 다물국(多勿國)왕 송양(松讓)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대 대무신왕은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송양의 딸이라고 하네요. 유리왕의 첫 부인이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송양의 딸은 유리왕 3년 10월에 사망했는데요.

그 아들이라는 대무신왕은 유리왕 33년에 11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네요.

그렇다면 대무신왕은 유리왕 23년(= 33년 - 10년)에 태어났다는 건데요.

어머니인 송양의 딸이 유리왕 3년에 사망했는데 어떻게 그 아들이 20년 뒤인 유리왕 23년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게다가 3대 대무신왕이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2대 유리왕기의 기록에는 대무신왕 이전에 태자가 된 인물이 두 명이 더 보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0년 봄 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3년 봄 2월,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8년 봄 3월, 임금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위업을 다지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느냐?” 

그리고는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자 어떤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임금의 사자가 한번 와서 말한 것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답을 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태자는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두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원(東原)에 장사를 지내고 사당을 세웠다. 

이로 인해 그 땅을 창원(槍原)이라고 불렀다.

 

정황상 도절과 해명은 모두 3대 대무신왕의 '형들'이자 송양의 딸이 낳은 아들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송양의 딸은 분명 유리왕과의 결혼생활이 1년 3개월 남짓 아니었나요?

어떻게 그 사이에 아들을 셋이나 낳을 수 있었을까요.

 

게다가 '해명'은 유리왕 28년에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데요.

그렇다면 해명은 유리왕 8년(= 28년 - 20년)에 태어났다는 것인데,

그 엄마인 송양의 딸은 유리왕 3년에 이미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유리왕기의 기록들은 기년에 있어서 무언가 모순점들이 보입니다.

이는 유리왕기의 기록들이 역사 그대로를 서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물론 단순히 후대 고구려 역사가들이 기년의 착오를 일으켰을 수도 있지만,

의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유독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유리왕의 기록들

 

유리왕의 첫 업적은 유리왕 11년의 선비 정복입니다.

초기 고구려의 명장 부분노의 계략을 수용하여 이룬 성과입니다.

유리왕의 마지막 업적은 유리왕 33년의 양맥 정복과 고구려현 공격입니다.

이 또한 유리왕의 훌륭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유리왕은 명군의 자질을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유리왕 19년에 유리왕은 하늘에 제사지낼 돼지를 다치게 하였다는 이유로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라는 신하를 구덩이에 빠뜨려 죽였다가

크게 병에 걸리자 무당에게 사죄하게 시키는 모습을 보이구요.

유리왕 22년에는 5일간 사냥을 떠나 돌아오지 않자 

대보라는 최고 관직에 있던 협보가 간언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유리왕은 협보의 모든 관직을 박탈해버리는 모습도 보입니다.

협보는 추모왕과 함께 부여에서 남하한 개국공신격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앞서 보았듯이 유리왕 28년에는 자신의 태자 해명이 황룡국을 도발하였다는 이유로

스스로 자결하게 만들기까지도 합니다. 

이 기록들을 보면 유리왕은 암군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게 해명이 사망했다는 기사의 바로 다음 기사인데요.

이 기사에서는 세번째로 태자가 된 무휼(훗날의 대무신왕)이 

'누란지위' 고사를 원용하면서 적국 부여의 사신을 도발했음에도 책망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휼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죠.

물론 이 기록 자체가 무휼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한 기사일 수도 있는데요.

유리왕의 태도가 모순적이라는 걸 지적할 정도는 된다고 보입니다. 

 

이렇듯 유리왕은 유독 명군과 암군의 두 모습을 다 가진 존재로 묘사가 되는데요.

인간이란 존재가 한 면만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유리왕에게도 이중적인 면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삼국사기>의 그 어떤 임금도 유리왕만큼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는 '여달'과 '여율'을 합쳐서 '유리'라는 인물을 만들어냈을 수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 의외로 <삼국사기>에 남아있을 수도 있는 '여율(如栗)'의 흔적(?)

 

이 부분은 정말로 부실한 근거이니 말 그대로 '참고'로만 보십시오.

만일 <위서>의 기록이 사실이라서 후대 고구려인들이 '여달'과 '여율'을 합쳐서 '유리'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유리왕기의 전후로 한 <삼국사기> 기록에서 '여율'의 흔적 정도는 찾아내야 그 주장이 타당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10여년 전에 아래의 기사를 제시했었는데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7년 여름 4월,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임금은 애통해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알렸다.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임금이 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두곡의 이궁에서 돌아가셨다.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 지내고 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

 

유리왕 마지막해의 기사입니다.

왕자 '여진(如津)'이 사망하여 '왕골령(王骨嶺)'에 묻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여진이 사망한 해에 유리왕도 사망하네요.

 

저는 <위서>의 여달의 아들이라는 여율(如栗)과 <삼국사기>의 유리왕의 아들이라는 여진(如津)이 묘하게 겹쳐보였습니다.

여(如)라는 글자는 완전히 똑같구요.

그리고 여진을 '왕골령'에 장사를 지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거니와

여진이 사망한 해에 유리왕이 사망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했습니다.

<삼국사기>의 여진을 <위서>에서 등장하는 초기 고구려 임금 '여율'로 비정을 하면

여진이 '왕골령'에 묻혔다는 것은 여진이 임금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봤구요.

또한 그렇다면 여달과 여율을 합쳐 '유리'를 만들었으니

여율로 비정이 되는 '여진'이 사망하는 시점에 '유리'가 사망하는 것도 설명이 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여진'이 바로 <위서>에서 말하는 '여율'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4. 하지만 이 쟁점은 쉽게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위서>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좀 더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긴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확신'까지 하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다른 쟁점들에서 저는 비교적 '확신'하고 있는 결론을 제시했는데요.

이 쟁점은 유일하게 '확신'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제시한 근거들은 충분히 반박히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기년이 모순되는 것은 단순히 후대의 고구려 찬자들이 착각을 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송양의 딸이 죽은 시기를 조금 더 뒤로 늦추면 얼마든지 모순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유리왕의 이중적인 모습이 실제 유리왕의 성격일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삼국사기>의 임금들은 비교적 하나의 성격을 보여주는 평면적 모습을 보여주는데,

유독 유리왕만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두 인물이 합쳐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런데 이것이 두 인물이 합쳐진 결과가 아니라 

그냥 유리왕 자체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셋째로 실제 역사에서 유리왕의 왕자 여진이 유리왕과 동일한 해에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삼국사기>의 여진과 <위서>의 여율의 '여'가 같은 걸 근거로 이 둘이 같은 인물일 수 있다고 했는데요.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진이 '왕골령'에 묻힌 게 '임금'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왕골령'에 묻힌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 여진과 유리가 같은 해에 죽었을 수도 충분히 있습니다.

 

결국 제가 제시한 근거들은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합니다.

 

또한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북위인들이 착각을 하거나 잘못 기록하였을 가능성은 낮지만,

애시당초 북위인들에게 정보를 준 고구려인이 착각으로 인해 부정확한 정보를 줬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도 대한민국의 대통령 계보를 정확히 말하라고 하면 헷갈리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제한된 정보를 갖고 살아가는 고대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해당 고구려인이 잘못된 정보를 준 것이라면 <위서>의 내용 자체가 흔들려 버립니다.

 

그런데 해당 고구려인이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정확히 알고 전달한 것인지를 

현 단계에서 증명하는 게 대단히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쟁점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보입니다.

 

 

5. 나오며

 

저는 이 연재를 하면서 비교적 저의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제시한 입장에 대해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쟁점은 유일하게 '확신'까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함께 대화 나누면서 생각을 교환하면 

더 좋은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댓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울리카 올림

 

 

[3줄 요약]

1. 고구려 왕실은 주몽-유리-무휼로 이어지는 3대왕 계보를 공식화했지만, 정작 고구려인과 교류한 북위인들은 주몽-여달(=유리)-여율-막래(=무휼)로 이어지는 계보를 기록하였다. 

2. 두 기록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의외로 북위인들의 기록이 맞을 가능성이 존재는 한다.

3. 그런데 애초부터 북위인들에게 정보를 준 고구려인이 '착각'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하여 이 쟁점에 대해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는 건 어려워 보인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시계핑 | 작성시간 24.11.29 어제 삼국유사 읽었는데 거기엔 유리가 증표?같은거 들고 가서 친자확인하던데 생각해보니까 진짜 엄마랑 가면 확실한거구나
  • 작성자경감 한여진 | 작성시간 24.11.29 와 너무 신기해!!!!!!!!
  • 작성자미니멀하고 | 작성시간 24.11.29 초기 삼국엔 워낙 그런일들이 많아서... 아무래도 태조왕도 100살 넘게 살았다는데 도중에 왕의 계통이 바꼈을거라고 많이들 추정하지만 알수는 없는...그래서 동명성왕이랑 후대왕의 출신부가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거같아
  • 작성자짱밍이 | 작성시간 24.11.29 오 신기
  • 작성자watuwnt | 작성시간 24.12.01 하 흥미롭고 재밌다 고구려역사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