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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칵.cxxx]서양 性 생활사

작성자이루리이루리다|작성시간24.12.02|조회수11,108 목록 댓글 29

출처 :(원문삭제) https://m.cafe.daum.net/subdued20club/ReHf/2300628?

서양에서는 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었을까...
궁금하지 않아요?
그런데 과거에 여자를 우습게 보고 막다루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했던 듯

01. 정조대 (貞操帶)
중세시대에는 남편의 외도는 허용되었지만 아내의 외도는 법률상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치사하게...
만일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다 해도 항의조차 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금지해도 아내들의 불륜은 오히려 늘어나기만 할 뿐이어서 등장하게 된 것이 악명높은 '정조대'

중세 유럽의 귀족이 십자군 전쟁에 출정할 때, 집에 있는 아내의 외도를 막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라고도 하고 이탈리아 상인이 장기 출장 때에 아내의 바람기를 염려하여 만들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는 정조대는 이를테면 쇠로 된 들보와 비슷한 물건입니다.
국부를 지키는 판의 앞 뒤에는 생리적인 쓰임을 위한 작은 구멍이 두개 뚫려 있는데, 그 구멍의 주위는 날카로운 가시 모양으로 되어있어서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가 손가락을 넣을 수 없도록 되어있었어요.
정조대에 달린 튼튼한 자물쇠의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남편들은 안심하며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부인들은 출장이나 전쟁이니 하면서 적당히 놀다 들어오는 남편을 얌전히 기다릴 생각 따위는 애당초 없었습니다.
정조대 곁쇠를 만드는 장인이 등장한 이후, 아내들은 남편이 떠나고 나면 재빨리 곁쇠를 주문하여 띠를 풀고 맘껏 놀아났어yo.

02. 졸도술 (卒倒術)
19세기 말에는 실연한 여성의 슬픔에 젖은 모습이 매력적이라 여겨서 병자처럼 보이는 화장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일부러 수면부족이 되어 눈 주의를 검게 하거나 마약을 복용하여 눈 가장자리를 검게 만들기도 했고, 여위어 보이기 위해 레몬이나 식초를 마셔 일부러 위장을 나쁘게 해서 병색의 창백한 용모로 개조를 했습니다.

더욱이 여성이 식욕을 나타내는 것은 품위없는 짓으로, 남 앞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엄금이었다고 합니다. 헐 ㅁㅊ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여성이 뭔가를 먹는 것을 싫어하였고 런던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멋쟁이인 브럼멜은 상대 여성이 양배추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헤어지고자 결심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또,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까무러치는 것을 여자다움의 증거로 여겼기에 여자들은 아무때나 즉각 졸도할 수 있도록 연습했습니다.
그 결과 1분이든 한시간이든 자유자재로 졸도할 수 있게 되었지요.
기쁘다면서 졸도하고, 슬프다면서 졸도하고, 남편의 귀가가 늦는다고 졸도하고,,,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금방 졸도해버리는 여성들을 남성은 '가녀린 존재'라고 믿어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없는 존재로 확신했다고들 합니다 (여성들 역시 짐짓 자기가 그렇게 여겨지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듯 해요)

03. 초야권 (初夜權)
옛날 유럽에서는 '처녀'가 위험한 존재라고 믿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럼 뭘 어쩌라는 건지
그래서 처녀를 범하는, 곧 처녀막을 찢는 '파과'가 결혼의 중대한 의식이었습니다.
처녀를 범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므로 신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제나 신부의 아버지가 미리 처녀의 처녀막을 찢어둔다는 것입니다. 이 습관이 발전되어 중세 유럽 봉건 군주의 '초야권'으로 발전되어 갔던 것이예요.
이를 테면, 농부의 딸은 모두 시집가기 전에 미리 영주에게
처녀성을 빼앗기는 의식 초야권 행사를 면하고 싶으면 벌금을 물거나 정해진 것을 바쳐야했는데, 이 초야권은 19세기까지 존속해왔습니다
고대에는 죄를 저지른 처녀를 처녀인 채 처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형집행인이 여자를 범하고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결혼이 임박한 여자의 처녀성을 빼앗고 육체의 적성을 테스트하는 것도 흔한일이었다고 해요.

테스트 후, '진짜 처녀였다'고 보고하여 결혼 적격자로 추천하기도 하는 한편 반대로 육체의 결함을 보고하여 결혼을 하지말라고 충고를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04. 처녀성
절대왕정 시대에는 첫날 밤 다음 아침, 신부의 처녀의 증거로서 피묻은 시트를신랑의 친척이나 친구에게 공개하는 관습 有.
(위랑 모순이라고요? 위는 프랑스에서 16세기, 독일에서 19세기까지 였고 이거슨 절대왕정시대)
그만큼 처녀성이란 것이 신부를 맞이하는 최대의 조건이였다고 합니다.
출혈이 없는 경우, 아내는 남편에 의하여 친정에 돌려보내졌지요.
하지만 처녀성을 잃었을 경우에도 처녀처럼 보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동물의 피를 터뜨리거나, 처녀의 질에 거머리를 넣어 피를 빨게하는 야만적인 방법들이였지요.

05. 노인용 회춘 살롱
노인의 쇠약해진 정력을 회복시킬 목적으로 젊은 처녀를 곁에 자게 하는 것을 '스나미티슴'이라고 합니다.
스나미티슴이 크게 유행한 것은 아무래도 18세기 말의 파리였다고 해요
당시 파리에서는 노인의 약해진 성욕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젊은 처녀를 옆에 재워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복한 노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남자경험이 없는 처녀 40명 정도로 운영이 되었다고 하네요.
살롱으로 안내된 고객은 전신마사지를 받고 알몸으로 호화로운 침대에 눕습니다.
단, 이상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남자에게 든든한 캡을 씌우지요.
양 옆에는 두 사람의 14,15세 정도의 처녀가 알몸으로 착 달라붙어 자면서 노인의 몸을 데워줍니다.
약 1주일동안 노인은 처녀사이에 끼어 지내는데, 옆에 자는 처녀는 이틀 밤마다교대를 했다고 하네요.
노인은 몸과 마음이 활기를 띄게 되는 반면, 상대 처녀는 2~3년 동안 이 일을 하면 아주 나이가 들어보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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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남 일 ~ | 작성시간 24.12.02 옛날부터 진짜 악이다 악
  • 작성자강수혜 | 작성시간 24.12.02 🖕🖕
  • 작성자서늘한 가을 바람 | 작성시간 24.12.02 제발 니들끼리... 니들끼리 살아...
  • 작성자원영핑 | 작성시간 24.12.02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명랑걸 | 작성시간 24.12.02 아니 정조대 뭔데... 생리랑 배변은 어쩌라고.... 나머지도 진짜...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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