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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인요한 가문 tmi (스압주의)

작성자캼자티김|작성시간24.12.10|조회수22,156 목록 댓글 116

다걸고 인요한 팬 아니고 탄핵투표할때 혼자 하얀 백남아저씨가 보이길래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이사람 가문 얘기가 생각보다 재밌어서 같이 보자고 써봄
인요한 미화 영업 올려치기 절대 아님 나 쟤 존재자체도 얼마전에 앎

‼️‼️쟤도 다른 국짐이랑 똑같이 투표 참가 안함‼️‼️
걍 나같이 쟨 뭐노 햐고 궁금했을애들을 위한 글임







때는 1895년… 유진 벨이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왓음


유진 벨은 주로 광주~목포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학교와 병원 등을 설립했다고 함

당시 갖가지 이유로 쫓겨나서 갈곳없는 여자들을 위해 야학을 열어서 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대

또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뿐만 아니라 생활촌을 만들어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봐줬다고 함




그리고 그사람에게는 샬롯 벨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당시 조선은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성인이 된 이후로 조선에 돌아옴





그리고 그때 조선에 선교목적으로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린튼을 만나서 결혼하게 됨










윌리엄 린튼은 미국 출생의 최연소 선교사였음

주로 전주~군산 일대에서 선교와 교육봉사, 의료봉사를 해왓다고 함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고…

군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끌려감

윌리엄 린튼은 일본의 부당한 압제에 분노했고

군산 3•5 만세운동 당시 교사와 학생들의 준비를 은밀히 지원함


(3•5 만세운동의 본거지였던 군산영명학교)


그리고 이 3•5 만세운동은 호남 최초 만세운동으로 당시 참여 인원만 3만 7000여명에 달함




이후 윌리엄 린튼은 안식일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애틀란타에서 열린 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해서


“한국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비폭력 시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계를 향해 자유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라며 3•1 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함


또한 애틀란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애틀랜타인의 증언’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현재 상황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함




그 후 윌리엄 린튼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함




그리고 일제는 1930년대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가 가장 먼저 강요된 곳은 교육계였음

물론 윌리엄 린튼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1937년 학교를 자진 폐쇄시켜버림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음


당시 일제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모두 추방 명령을 내렸음

결국 윌리엄 린튼은 1940년에 조선에서 가족들과 함께 강제로 출국당함…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선은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게 됨!!!




휴 린튼도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625가… 터져버림



이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다 한국을 떠났는데 이분은 떠나지 않고 부산으로 옮겨가서 피난민 구호활동을 하셨다고 함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겨우 안정을 되찾게 되자

윌리엄 린튼은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료들과 같이 대학교를 설립함




그 대학교가 지금의 한남대학교임 (前 대전대학교)




이후 2010년 3•1운동 91주년에 윌리엄 린튼은 그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음










그리고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 (인요한 아버지)


이분은 1926년에 군산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지내다가 14살에 미국으로 떠남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했다고 함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 다시 돌아가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서 결혼한 부인 로이스 린튼과 함께 순천에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음

휴 린튼은 교회 개척을 위해 섬마을 농어촌을 다니며 10년에 걸쳐서 전남 지역의 20만 평의 땅을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줌


또한 1960년에 순천 일대에 홍수가 나고 결핵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아내와 함께 순천기독치료소를 설립해서 결핵치료에 힘썼다고 함


이 진료소는 지금도 순천에 남아있음
(전남 등록문화재 제 127호로 지정되어 있음)



그러다 1984년 4월… 교회 건축 자재를 싣고 순천 요양소로 돌아오던 중 음주운전자의 버스에 치여 택시에 타고 병원으로 가던 도중에 숨을 거두심 ㅠ

그당시 순천엔 응급용 구급차가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응급처치를 할수 없었다고 함….


그리고 휴 린튼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미국 지인들이 모금해서 순천에 구급차를 기증하려고 했지만…


그 당시 구급차는 30평대 아파트 한채값이었음,,,,



이때 의대생이던 막내 아들 인요한이 휴 선교사의 지인들이 모은 돈 4만 달러와 자기 사비를 합쳐서 1억원을 만듬

그리고 목수와 철공업자를 불러 15인용 승합차를 개조해서 한국형 구급차를 만들기 시작함


그렇게 만들어진 첫 한국형 구급차

이 구급차는 1993년 3월에 순천소방서에 기증했고 여기서 개량을 거듭해서 1997년에 최초의 한국형 구급차가 탄생했다고 함



또한 아내분인 로이스 린튼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남아 1994년에 은퇴할때까지 한국의 결핵퇴치를 위하여 헌신하심 ㅜ ㅜ

은퇴 후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지내셨는데 미국에서도 순천을 그리워했다고 함..

이분은 재작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결국 생전의 소원대로 남편 휴 린튼이 있는 순천의 무덤에 안장되심







그리고 나머지는 인요한과 인요한의 형제들의 일생인데…

솔직히 여기부턴 행보가 좀 호불호 많이 갈릴거같아서ㅠ 이건 그냥 개인적으로 찾아봐서 스스로 평가햇으면 좋겠음
어찌됐던 인요한은 지금 국힘 의원이고 이번 탄핵 투표 거부한건 변함없기때문에…^^ ㅜ

내가 흥미돋았던건 이사람 조상들의 이야기엿어서 쓰고싶은건 다 씀
원래 그냥 간단하게 쓸랬는데 생각보다 너무 길어져가지고 ㅜㅜ 지루할까봐 사진도 좀 넣고 그랫는데 어땠는지 모르겠네…
이런글 처음써봐서 재미없었어도 이해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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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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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일찍좀자자고요좀 | 작성시간 24.12.16 와 글 존잼
  • 작성자톰하디 | 작성시간 24.12.16 저런 조상아래 어케 저런사람이;; 조상 노하실듯
  • 작성자가리지말어GL | 작성시간 24.12.16 인요한 형들은 북한에 가서 결핵운동하고 김일성도 만나는둥 그쪽에 가서 선교활동하고 누나1명은 전업주부로 11명의 자녀를 낳아 길렀다고함.
    되게 기독교적인 집안인거같은 보수적인 성향이라도 호남에서 나고자랐는데 어떻게 막내만 저리되냐..
  • 작성자무화과깜빠뉴 | 작성시간 24.12.16 어쩌다 저 사람만 저렇게 욕심쟁이가 된걸까
  • 작성자달리 귀여워 | 작성시간 24.12.16 어쩌다가 저렇게 된걸까... 아버지 죽음 때문에 한국을 원망해서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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