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이끌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한 문재인,
결국 서대문 구치소에 투옥되었고 대학에서 제적 당했고,
출소 후에는 바로 군에 강제징집된다.
제대 후에 다시 전두환의 군부독재에 항거하다가 청량리 구치소에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경희대학교 조영식 총장의 신원보증 아래
제2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후에 극적으로 석방.
청량리구치소에서 사법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은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박원순, 고승덕, 조영래 등의 걸출한 인재들 속에서 일등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사법연수원 수석으로 연수원 내 최고상인 법무부장관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성적이 차석으로 밀렸고,
원하던 판사는 물론 아무런 임용도 되지 않았다.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12등이었던 고승덕은 판사로,
상위권이 아니었던 박원순도 검사로 임용되었기 때문에 불합리한 처사였다.
이후 문재인은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오랜 시간을 '인권변호사'로 생활한다.
'나와 같은 과다'
문재인은 그를 처음 본 순간 느꼈다.
문재인은 권위적이고 엘리트의식이 있던 선배 법조인들과 달리
7살 많은 노무현의 소탈한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에서 잘나가던 선배 변호사 노무현이,
이제 갓 들어온 신참 변호사 문재인과
수익을 배분한 것은 노무현의 성품을 여실히 말해준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왼쪽)과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이
부산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1980년대, 직원들과 함께 야유회를 가는 모습.)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은 부산 부민동에 있었다.
수수하다 못해 조금 허름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다.
차 한잔을 앞에 놓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재인은 그렇게 노무현 곁에서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1988년, 노무현과 문재인이 이별한다.
김영삼은 당시 노무현, 김광일과 함께 문재인에게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했지만,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입문을 거절한다.
정계입문을 결심한 노무현과 김광일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한 뒤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문재인은 부산에서 홀로 남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지내면서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그리고 20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16대 대선 후보 당시, 노무현의 연설)
언론은 노무현과 문재인을 가리켜 친구라고 말하지만,
문재인은 그와 친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을 친구로 불러준 것을 감사하다고 말한다.
문재인의 동업자, 인권 변호사 출신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은 48.9%의 득표율로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누르고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
대선 당시 곁에서 노무현을 도왔던 문재인은,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후에 변호사 복귀 뜻을 여러차례 밝혔다.
그러나.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면 책임져라."
결국 대통령이 된 절친한 선배의 말에
부산 출신의 인권변호사는 생애 처음으로 청와대로 향한다.
(문재인의 청와대 경력
2003~2004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4~2005 대통령 비서실 시민사회 수석비서관
2007~2008 대통령 비서실장, 청와대 정무특보)
노무현의 참여정부에서 초대 민정수석을 지낸 문재인은
녹내장과 고혈읍 등의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난 적도 있었다.
2012년 SBS 힐링캠프에서 그가 했던 말을 인용하면,
'청와대의 직함이 별로 영광스럽지도 않아서 사표를 내고 쉬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정 수석을 그만두고 청와대의 연락을 거절한 그는,
네팔 산행 도중 노무현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노무현의 법정대리인으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린다.
그리고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의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다.
문재인은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는 노무현 인생 최악의 순간에,
그와 함께 했고, 허탈함과 안타까움을 뒤로한채 노무현과 청와대 생활을 마무리 한다.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문재인의 30년 인생의 동반자였던
노무현이 봉하마을에서 세상을 떠난다.
"새벽에 봉하산에 올라갔다가 떨어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병원으로 후송 중인데 상태가 엄중하시다고 했다."
"그 새벽에 봉하산에 올라갔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힘들어는 했지만, 굉장히 강인한 분이었다. 어렵지만 견디실거라 생각했는데.."
노무현의 사망 직후 문재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첫날에는 가슴이 찢어지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상주로서 수많은 일들을 결정해야 했다.
그의 사인을 확인하고, 국민들에게 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노무현을 향한 그의 눈물은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민장 '노제'에서 터져나왔다.
문재인은 노무현과 1982년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한 이래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구이자 동지로서 한 시대를 동행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유서를 항상 지니고 다닌다.
1988년 노무현이 국회의원 첫 출마 때
만든 선거 명함도, 문재인은 항상 지니고 다닌다.
차마 버릴 수가 없는 것이 이유이다.
노무현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치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정치에 들어선 이유는,
노무현의 뜻과 새로운 정치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 2011년 그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 中
어제 심심해서 블로그에 써본 글인데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스크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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