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자판을쾅쳐서나오는닉네임)
이재명을 알면, 이재명 지지자가 된다!
잼시가 변호사 된 이후 이야기는 알고 있는 여시들이 많을 것 같은데 어린시절 이야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건 처음이라 재밌어서 가져와봤어!
제일 아래에 원본 영상 붙여놓을테니까 이재명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고 싶은 여시는 꼭 들어봐!
내가 가져온 건 영상의 겨우 1/3 정도 분량이야!
이재명은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천리 지통마에서 태어났어. 이 곳은 아직도 찻길이 개발되지 않은 산꼭대기 오지야. 겨우 4가구, 주민은 8명 정도 될까?
6살의 나이에 학교에 가려면 6km를 걸어가야 했대. 그래서 징검다리가 얼거나 눈보라가 치면 학교에 갈 수 없어서 결석이 아주 많은 학생이었어.
이재명의 부모님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오셨어. 이 깊은 오지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이재명의 아버지는 해방 이후 겨우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던 작은 텃밭 하나를 마을 사람과의 화투로 날렸어. 생계의 수단이 사라진 가족은 이재명이 13살,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며칠 도 안 되어 성남으로 이사를 해.
이재명의 가족들은 6개월 짜리 월세에 살았어. 이 뒷골목에는 목걸이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어. 13살의 이재명은 여기서 납땜하는 일을 했어. 중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됐어. 7남매로 형제자매가 너무 많았어.
이 시대를 함께 살았던 다른 사람들은 그 시절이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할만큼 가난한 때는 아니었다고 기억해. 하지만 이재명이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다 이재명 또래의 어린아이였대.
어머니는 이재명의 손을 잡고 학교가 아닌 공장에 데려다 줄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자신은 화장실 입구에서 돈을 받는 일을 하러 가셨어. 작은 볼일은 10원, 큰 볼일은 20원. 화장실 청소도 하고, 휴지도 팔고. 가난한 정도가 아니었어, 빈민이었어.
그러니 이재명은 조그마한 목걸이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어. 하루 일당은 겨우 100원.
어느날, 이재명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하루에 300원을 준다는 공장을 발견해. 전단지를 쥐고 창곡동에 있는 공장에 찾아가 공장을 옮겨서 열심히 일했지. 그때는 8시간 근무도 없었어. 밤 9시에 일이 끝나면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3km 거리를 1시간 동안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어. 하지만 주인이 야반도주를 하는 바람에 3개월 치의 월급을 떼이고 말아.
그 다음은 고무 공장을 다녔어. 그 곳은 새벽 2시까지 아이들에게 철야 노동을 시켰어. 이 곳은 늦게까지 일하는 아이들에게 생라면을 하나씩 줬어. 이재명은 이 라면 하나가 너무 고마웠대. 일을 시켜주면서 라면도 하나씩 준다니. 하지만 실은 챙겨줘야 하는 저녁식사를 라면으로 떼운거였어.
그러던 어느 날 벨트에 손이 감기는 사고가 생겨. 손톱 밑에 있는 까만 줄은 이때 생긴 상처야.
공장주는 이재명에게 다쳤으니 집에 가라고 했어. 집에 가 있으니 월급을 안 주더래. 그래서 이재명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다친 왼팔을 둘러매고 한 손으로 일을 하러 다녔어.
이 고무공장도 망하고 난 뒤에는 용접공을 하고, 그 공장도 망하자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의 프레스공이 되었어.
(이 프레스 기계는 산업계의 대표적인 3D 업종이야. 신체 결손 위험이 가장 큰 직종에 속해.)
어린 이재명은 이 프레스 기계에 눌려 크게 다쳤어. 다행히 팔이 잘리지는 않았어. 하지만 제때 치료를 했어야 하는데 치료하는 동안 월급도 나오지 않고 제 돈을 내고 치료를 받아야 하니 치료를 받지 않고 아픈채로 계속 일을 했어. 이때 성장판이 다쳤는지 뼈 두 개 중 하나는 자라는데 하나는 자라지 않더래. 2-3년 동안 키가 쑥 자라면서 팔이 비틀어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장애 6등급을 받게 되었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건 사춘기가 되고서야. 그 전에는 주변이 모두 자신과 같은 환경이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평소처럼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향하는데 예쁜 여학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자신을 보면서 생각했대. ‘난 뭐지?’ 이때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대.
이재명에게는 검정고시라는 선택지 밖에 없었어. 야간 학원을 등록하고 검정고시를 쳤어. 한 번에 붙었대.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의 나이에 중졸이 되었어.
그리고 또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어. 이때는 관리직이 공장에서도 군복을 입고 다녔대. 관리자들은 그 어린 아이들을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줄을 세워놓고 때렸어. 이재명은 그 사람을 보면서 연구했대. 저 사람은 어떻게 대리라는 직함을 달았지? 그리고 왜 우리를 때리지? 그 관리자가 알고보니 고졸이더래. 그걸 보고 고졸이 되면 관리자가 될 수 있을 줄 알고 고1의 나이에 고졸이 됐어. 하지만 고졸이 된다고 세상이 바뀔리가 없지. 대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계속 일을 했어.
이재명이 전두환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갔다고 공격하는 사람이 있어. 이건 사실이 아니야. 하지만 실제로 전두환이 대학을 가는 계기가 되긴 했대.
전두환이 80년에 쿠데타를 하면서 과외를 금지시키고 오직 학력고사만으로 전수험생을 65만등부터 1등까지 줄을 세웠어. 그리고 오직 그것만으로 학생을 선발하게 했어. 그래서 3천등 안에 들면 등록금을 면제받고 학비보조금을 20만원 정도 받을 수 있었어. 바로 이거다 하고 생각했어. 그 당시 이재명은 한 달에 고작 6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거든. 등록금도 면제되고,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니 이거야 말로 인생역전이라고 생각했대.
그래서 야간으로 학력고사 학원을 등록했어. 이때는 매 달 전국에서 모의고사를 쳤는데 학원에 들어가 3월에 친 첫 모의고사에서 40만등이 나왔대. 하지만 다음달 시험에서 10만등이 올라갔어. 그렇게 7월까지 학원을 다니다 학원을 그만뒀어. 퇴근하고 버스를 타는 시간조차 아깝더래. 그렇게 본격적으로 공장까지 그만두고 독학으로 새벽까지 혼자 공부를 했어. 10월 달에 본 시험에는 천몇백등까지 등수가 올랐어. 당시에는 서울대도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 하지만 결국 등록금이 면제되고, 매 달 20만원을 주는 학교를 골라서 갔어.
그래서 이재명에게는 중고등 학창시절이 없어. 그래서 그에게는 학연도, 지연도 없어.(혈연은 짐만 됨)
그가 흙수저도 아닌 정치 무수저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그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왔음에도 증오가 없어.
그는 자기 힘으로 바닥부터 올라와 자수성가 했음에도 거만이 없어.
엘리트 정치인이 되면 ‘너희들을, 내가, 구하겠다’ 하고 노동자와 서민을 대상화시켜.
스스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재명은 달라.
이재명에게는 서민이라는 정체성이 있어.
그는 ‘우리’라고 생각해.
이재명은 서민을 위해서 시혜적인 태도로
복지를 ‘해줘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권력은 자리일 뿐이고,
여전히 그는 서민으로써 자신을 인식해.
이재명의 정책은 모두 이재명의 삶으로부터 왔어.
이재명은 자신을 주인공이 아닌 도구로 생각해.
권력을 잠시 위임받아
자신과 같은 평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게 중요해.
이 사람은 그래서 대통령의 자리가 필요한거야.
자신이 성남 시장이면 성남의 주민들에게 조건 없이 300만원을 빌려줄 수 있지만,
대통령이 되면 전국민에게 조건 없이 1000만원을 빌려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동안 언론의 악마화로 정치인 이재명에 대해서도, 인간 이재명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었을 여시들이 많았을 것 같아! 나도 그렇고.
앞으로 이재명 대통령 만들때까지 가보자고🔥
출처 : 월말 김어준 6월호
https://youtu.be/4NFmvjNtG8w?si=wc1mXxG1TXqGQ-sk
+혹시 말멀 틀렸음 알려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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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LES ETOILES 작성시간 24.12.21 이재명의 나의 소년공다이어리 읽고 줄줄 울었음..ㅜ 어려움을 뼈저리게 겪어본 대통령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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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촛불아꺼지지마 작성시간 24.12.21 아....ㅜㅜ 이런 사람이 대통령 돼야하지 않을까??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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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야구좀잘해봐라 작성시간 24.12.21 이재명 어린시절 이야기 들으면 너무 맘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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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nwoeys 작성시간 24.12.21 이렇게 힘들게 살아와서 서민들이 뭐가 필요한지 잘 알잖아 이런 사람이 큰일하면 나라가 좋은 방향으로 변할 거라고 생각해 글 넘 고마워 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