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눈물한방울]동학농민운동의 최후를 가른 마지막 전투, "우금치 전투" (feat.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누어라)
작성자수자기부대작성시간24.12.22조회수2,134 목록 댓글 17우금치 전투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이 연합해 동학농민군의 주력과 교전, 섬멸한 전투.
우금치는 현재의 공주지역이긔.
우리가 기억하는 우금치 전투는 1차 반봉건적 성격, 2차 반외세적 성격,
밑에서부터의 개혁이라는 의의를 띠고 있는 동학농민운동 최후의 전투이긔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주도자로 꼽히고 있는 전봉준은 배반자의 밀고로 서울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긔
당시 정부군이었던 별기군과 그 교관을 담당하던 일본인, 그리고 일본군이 연합하여
민중을 섬멸,학살했던 가슴아픈 전투긔
우금치 전투 때 관군들의 복장과 유사하다.
사발통문
‘통문’이란 여럿이 모여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을 모으려고 돌리는 문서로, ‘사발통문’은 사기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둥글게 모의를 꾸민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은 통문이다. 이처럼 주모자 이름을 둥글게 쓴 이유는 참여자 모두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기 위함이다.
당시 우금치의 지도는 이러하긔
우금치 주변의 지형. 능선의 줄기를 단순화하여 그린 모습이다.
붉은 색으로 표시한 곳이 전투지역으로, 크기는 가로 800미터 세로 1200미터 정도이다.
우금치에서 중요한 전술적 요지(要地)는 네 곳이긔.
여기서 젤루 중요한 곳은 우금치 고개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일대를 다 조망할 수있는 최고 높이의 견준봉이긔.
그리고 이 견준봉에는 일본군 200명 배치되어서...... 이 위에서 기관총으로 농민들을 학살했긔.
(정부군과 합세한 일본군의 무기는 제국주의 신식의 기관총이었긔)
(요런 모양의 신식무기였긔...아 쓰면서도 개빡치는 것..)
이 우금치 고개만 넘으면 곧바로 한양으로 갈 수 있는데...
흰색 소복을 입은 농민들이 오합지졸 변변치 않은 무기로, 자신들이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힘을 모아 앞으로 나섰던 전투가 이 우금치 전투긔.
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흰색 옷에 붉은 피가 묻은 그 광경. 얼마나 잔인하고 무섭긔
1976년 12월 16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자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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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무장한 일군은 새벽부터 우금치에 매복하고 있었다.
서편을 향한 일군은 뒤쪽에서 해뜨기를 기다린다. 진격해오는 동학군쪽으로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자 일제 사격을 퍼붓는다.
동학군은 눈이 부셔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연신 언 땅위에 고꾸라진다
1대가 총격을 가하고 물러서면 2대가 나가 재차 기어오르는 동학군을 향해 퍼붓는다
시체 위에 또 시체, 이루 헤아릴 수 없어 무수히 죽어갔다
교활한 일군은 민가를 뒤져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깨에 동학깃발을 꽂은 다음
총을 숨겨 접근한다. 우군인줄 알고 반가와 다가가는 소박한 농부들에게 왜병들은 총격을 가했다.
이 나라 전사상 이곳 우금치 전투만큼 처절했던 격전도 드물었다
이고개에서 7일동안 쉬지않고 싸워 하루에도 40,50차례나 이 고개를 뺏고 빼앗겼으며
종내는 20만 동학군이 500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
우금치 계곡과 봉황산 마루는 쓰러진 동학군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산밑 '시엿골; 개천은 여러날동안 줄곧 핏물이 흘렀다
견디다 못한 전봉준은 눈물을 머금고 휴전을 제의했다.
그러나 전투의 주도권이 일군 측에 있는 이상 협상이 이루어질리가 없었다.
동학군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관군들에게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누어라. 왜 동족을 살상하느냐"고 외쳐댔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빗발치는 총성뿐이었다.
싸움, 전투, 전쟁은 항상 무섭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진짜.... 너무나도 잔인하긔.
특히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했던 그 모든 싸움들에서는 그렇게 잔인하고 역겨울 수가 없긔.
이 뒤에 일제강점기로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피를 흘렸긔?
쨌든...............
먹고 살자고 일어섰던 운동이 결국은 반외세적 성격을 띠며 외세에 저항을 하게 되고
끝끝내는 거의 모두 섬멸당하고 말았던 우금치 전투긔.
[서해성의 박학다설] '우금치 학살‘ 그 후.. 中(2017-12-09 방송분)
▷ 서해성 : 네. 그 우금치학살이 일어난 배후, 그 전후, 우금치에서만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이 방송을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단지 역사만 알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까지 하고 있는 이유가
오늘날 한반도 정세가 그때처럼 외세들의 개입이 굉장히 노골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 김종배 : 100년 전하고 비슷하다는 얘기 많이들 해요.
▷ 서해성 : 그때는 해양세력이라고 흔히 말하는 일본, 그리고 그 배후에는 영국이 있었죠.
그리고 러일전쟁 때도 영국과 미국이 뒤에 배후였거든요. 일본이 수행했던 거죠, 전쟁을요.
그리고 위에는 알다시피 청과, 중국이죠, 러시아, 기본적인 형세가 변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거든요.
그게 실제로 전면적으로 한국민이, 한민족이죠. 한민족이 그 전투에 동원되어서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전쟁인 거죠.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의 최고의 위기, 그런데 언제나 이게 한반도의 위기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위기이기 보다는 주로 외세하고 개입 속에서 이런 위기가 오고 있는데 동학농민군들이 그때 일어섰던 이유도 바로 그런 외세를 물리쳐보자라는 것이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이 방송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제가 드립니다.
▶ 김종배 : 그렇죠. 동학정신은 첫 번째로 꼽아야 되는 건 당연히 반외세였죠.
▷ 서해성 : 그렇습니다.
▶ 김종배 : 그런데 저는 궁금한 게 지난주에 만 명 중에서 9,500명이 학살당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궁금한 게 당시 동학의 농민군들, 우금치에서 그렇게 학살을 당할지 정말 몰랐을까?
어찌 보면 단순하고 어리석은 궁금증일 수도 있는데 솔직히 궁금합니다.
▷ 서해성 : 네. 그러니까 먼저 답을 드리자면 알았습니다.
▶ 김종배 : 알았어요?
▷ 서해성 : 네. 알았습니다.
▶ 김종배 : 알았는데도 그랬다고요?
▷ 서해성 : 그렇지만 싸워야 했습니다. 그게 그 당시에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 조선 백성이 짊어지고 있는 운명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역사에서 그 운명을 거역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 김종배 : 그렇긴 하죠.
▷ 서해성 : 그러니까 사실 이렇지 않습니까? 비록 패배했지만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조금 다른 말입니다.
▶ 김종배 :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에 기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서해성 : 그렇습니다. 만약 패배조차 없는 역사였다면 어떡할 뻔 했습니까?
▶ 김종배 : 잊혀졌다면 그거는,
▷ 서해성 : 패배조차 없는, 조선의 통치계급에는 패배가 없었습니다. 한 번도 외세하고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패배하지 않은 조선의 통치계급, 대한제국의 통치계급으로 이어졌고 그들이 바로 친일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패배가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그 뒤에 항일전쟁이라는 게 지속적인 전쟁이 있었던 것이죠. 독립운동이라는 게 사실 길게 잡으면 항일전쟁이지 않습니까? 우리민족으로 얘기하면요. 그 전쟁에 없었던 사람들이 바로 한국의 주류를 차지했던 거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주류를 차지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사실은 우금치의 실패 혹은 우금치에서의 좌절 같은, 실패는 아니고 우금치의 패배, 우금치의 좌절이, 사실 바로 그 좌절과 함께 조선은 망했고 친일파가 대대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바로 침략자인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어쩌면 지금까지도 역사의 어떤 중심부를 잡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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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천운이따르는자 작성시간 24.12.22 시발 역사가 반복되자나.
20만 학살이었네 그냥 -
작성자Snowman 작성시간 24.12.22 아 너무슬퍼 진짜ㅜ 좆본 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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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추루후루우 작성시간 24.12.22 강인하고, 의롭고, 질기고... 이런 국민들이 있는데 대한민국이 어떻게 망하냐 결국 다 잘되기위한 과정일 뿐이야 친일파 토착왜구 반드시 숙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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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만두만두군만두 작성시간 24.12.22 ㅈ본 망해라.... 친일 반드시 숙청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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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Midnight Dreamer 작성시간 24.12.23 제발 일본여행 좀 그만가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