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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독살설이 정설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길래 써보는 글임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현세자는 독살이 아니라 걍 본인 몸이 안 좋아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음
글이 좀 긴데 3줄요약 있음
인조가 소현세자 암살했다는 설정의 영화 <올빼미>도 있고, 인조가 소현세자의 남은 가족들을 잔혹하게 대하면서 죽인 점, 인조 이미지가 인좇 인좇 할 정도로 개 쓰레기라는 점, 언젠가부터 조선 근대화의 희망 소현세자 운운하는 이상한 이야기가 돈 점 등등 여러 가지가 겹쳐서
'아! 인조 정도면 지 아들 고까워서 당연히 죽일 법도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는 있다고 봄
근데 원래 음모론이라는 건 대개 그런 그럴듯한 정황에서 시작하는 법이고 소현세자 독살설도 그 중 하나일 뿐임
그럼 왜 소현세자 독살설이 정설마냥 떠돌았나?
1. 연려실기술, 공사견문록 등 야사집에 소현세자 독살설이 나오니까
2. 인조실록에서 '세자가 학질 걸렸다' 하고 3일 뒤 이형익이 놓은 침 맞더니 죽어버리는 식으로 적혀져 있어서
3. 세자 죽고 나서 시체를 보고 남긴 기록에 얼굴이 검네 칠공분혈을 했네 약물에 중독된 거 같네 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거 3개만 딱 놓고 보면 오히려 '엥 진짜 독살 아니냐?' 라는 생각이 더 강화될 수도 있음
그럼 하나하나 파헤쳐보자
일단 야사는 걍 그 시대 사람들이 소현세자 독살설을 믿었다더라 정도 의의는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사보다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음
야사는 다 거짓말이야! 무조건 정사를 믿어! 라고는 생각하지 않음. 실제로 기록이 부족한 시대는 정사 기록에서 알 수 없는 정황을 야사나 지역 구전설화 같은 걸로 추측을 하기도 하니까
다만 세자의 건강 문제 같은 궁궐 내부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기록은 정사가 야사보다 더 정확할 수밖에 없다는 거임. 예를 들어서 대통령의 건강 문제를 연구하려면 당연히 대통령 최측근 증언이나 청와대에서 나온 문서가 '그때 XXX 대통령이 사실은 몸이 OOO해서 안좋았다더라' 하는 썰보다 더 정확한 거랑 같은 이치임
그럼 야사집 제끼고, 실록의 두 기록이 문제가 되는데
- 세자가 학질 걸리고 3일 뒤에 침 맞더니 곧바로 죽어버리고
- 세자 시체가 시커멓고 칠공분혈을 하는 것이 꼭 약물중독 같더라
이거는 빼박 증거 아니냐? 라고 생각이 들 텐데, 여기에 맹점이 하나 있음
정사는 실록만 있는 게 아님
그리고 실록은 사관이 그날 있었던 일을 쭉 정리해서 적은 글이지 정말 임금이 한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다 써넣은 그런 기록이 아님. 그건 승정원일기 같은거
그럼 '실록 외의 정사 기록' 에 소현세자 관련 기록이 있는가? 당연히 있음 ㅇㅇ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등등 실록 외에도 소현세자에 대한 정사 기록은 꽤 있는 편이고, 그 중에서 승정원일기와 심양일기에는 소현세자 기록이 멀쩡하게, 실록보다 훨씬 자세하게 많이 나옴
그리고 이 두 기록을 살펴보면, 소현세자는 걍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임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홍타이지를 향해 삼궤구고두례를 한 뒤, 소현세자는 2월 8일 인질로서 청군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서 4월 10일 심양성 동관에 도착함
그리고 5월 7일 심양관소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 소현세자의 병증이 시작됨
1637년 심양일기에서의 소현세자 치료 기록
○ 3월 6일: <세자의 기후(氣候)가 편치 않으므로 화개산(華盖散) 1부를 올렸다.>
3월 7일: <세자의 환후(患候)가 오래도록 낫지 않으므로, 화개산에 다른 약재를 가미하여 1부를 올렸다.>
3월 8일: <세자에게 또 화개산 1부를 올렸다.>
3월 9일: <세자의 환후가 회복되었다.>
○ 윤4월 10일: <세자의 기후(氣候)가 편치 못하여 신하들이 약을 의논하기를 청하자 “이미 땀을 흘렸으니 약을 의논할 필요가 없다”라고 답하였다.>
○ 5월 15일: <세자가 곽란을 앓아 평위산(平胃散) 1부를 올렸다. 문안하니 “토사(吐瀉)한 후 차도가 있는 듯하다”라고 답하였다.>
○ 5월 21일: <세자가 안질(眼疾)로 침을 맞았다.>
○ 9월 13일: <의관 유달이 입시하여 침을 놓았다.>
1638년 심양일기에서의 소현세자 치료 기록
○ 2월 22일: <세자가 안질이 나서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2월 26일: <안질로 침을 맞았다.>
○ 3월 19일: <비로소 세자에게 감기기운이 있는 것을 알았다.>
3월 20일: <구미강활탕(九味羌活湯)을 지어 바쳤다.>
○ 4월 16일: <세자가 곽란증세를 보여 문안하였다.>
4월 18일: <세자가 산증으로 태충혈에 침을 1대 맞고 대돈혈에 뜸을 5장씩 떴다.>
4월 19일: <대돈혈에 뜸을 7장씩 떴다. 초저녁에 산증증세가 치고 올라오므로 좌측 독음혈에 뜸을 15장 떴다.>
4월 23일: <좌우측 기죽마혈에 뜸을 5장씩 떴다.>
4월 24일 <기해혈에 7장, 우측 천추혈에 5장 뜸을 뜨고, 좌측 삼음교혈에 침을 맞았다.>
4월 25일: <우측 대맥혈에 7장, 우측 천추혈에 5장, 기해혈에 3장 뜸을 뜨고, 우측 장문혈에 침을 맞았다.>
4월 26일: <우측 대맥혈에 5장, 우측 천추혈에 5장, 기해혈에 3장 뜸을 뜨고, 중완혈과 좌측 중봉혈에 침을 맞았다.>
4월 27일과 28일: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았다.>
4월 29일: <좌우측 기충혈에 5장씩, 기해혈과 우측 천추혈, 우측 대맥혈에 각각 3장씩 뜸을 떴다.>
5월 2일: <기해혈에 3장, 우측 천추혈에 3장, 우측 기충혈에 5장 뜸을 뜨고, 우측 갈비뼈 아래 아시혈(阿是穴)과 좌우측 족삼리혈에 침을 맞았다.>
5월 3일: <좌측 태충혈과 내정혈, 좌우측 내관혈, 아랫배 우측 아시혈에 침을 맞았다.>
5월 4일: <기해혈에 7장, 좌우측 기충혈에 3장씩 뜸을 뜨고, 좌우측 신문혈과 좌측 족삼리혈에 침을 맞았다.>
5월 5일: <기해혈에 7장, 좌우측 기충혈에 3장씩 뜸을 뜨고, 중완혈에 침을 맞았다.>
5월 6일: <기해혈에 7장, 기충혈에 5장씩 뜸을 떴다. 세자가 낮에 신하들을 접견하다가 책상에 기대어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니 신하들이 차마 우러러 볼 수가 없었다.>
5월 7일: <이질(痢疾) 증세가 있었다.>
5월 8일: <오후에 세자가 기의 흐름이 막혀 딸꾹질이 나타나 신하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의관을 불러들여 진찰을 받고 좌우측 열결혈에 침을 맞으니 기의 흐름이 원만해졌다.>
......
다 쓰면 한도끝도 없어서 여기서 그침
이게 1637년 1638년 두 해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걍 청나라에서 지내는 내내 아프거나, 안 아프면 낙마해서 다치거나 하는 내용이 끊임없이 나옴
이건 조선으로 귀국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1644년 말 조선으로 돌아갈 때도 가는 길에 자꾸 병증이 새로 도져서 며칠씩 늦춰지고, 이게 1645년 1월 10일 조선 측에도 알려지자 아직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던 세자 일행에게 의원과 약재, 처방전을 파견 보내기도 함
그리고 소현세자는 압록강 건너는 과정에서 또 병이 도져서 서울로 한큐에 오지도 못하고 또 평양에서 입원함
그래서 원래 1월 6일에 심양을 떠나서 조선으로 스무스하게 와야 했던 일정이 1월 말에서야 심양을 떠날 정도로 늦어졌고, 서울에 도착한 건 2월 18일이 되어서였음
그러고도 소현세자는 여전히 병세가 남아 있어서 2월 20일부터는 어의들이 달라붙어서 치료를 했는데, 학질이라고 진단이 됨
여기서 학질은 흔히 말라리아라고들 하는데, 정확히는 말라리아와 비슷한 증상이 나오는 여러 가지 병을 뭉뚱그려서 학질이라고 표현하는 거임 전근대 의학이라는게 그렇게 정확하지가 않다
그래서 어의들은 이모영수탕 소시탕 등등 탕약을 우선적으로 처방했고 실제로 차도가 있어서 3월 5일에는 증상이 매우 호전됨
그래서 어의들은 치료가 많이 진행됐다고 보고 3월 6일부터 탕약과 침을 병행할 것을 주장하고, 실제로 소현세자는 3월 14일에는 미열만 남고 모든 증상이 호전됨. 그래서 왕이나 어의들이나 소현세자가 이제 몸조리만 잘하면 되겠다고 판단, 타락죽을 하루 걸러 올리고 휴식을 취하게 했고 실제로 4월 16일에는 완치 직전이라는 처방까지 나옴
근데 얼마 안 가서 학질이 재발했고, 인조는 어의들의 의견에 따라 침의 2명 제외한 모든 어의들을 동궁에 투입하라고 지시함
그래서 왕 곁에는 침 놓는 의사 2명만 남고 어의란 어의는 모조리 동궁에 몰려갔는데, 어의들이 별의별 치료를 다 해봤지만 세자의 병세에 차도가 없어서 학질이 재발한 지 3일 만에 사망함
이 모든 과정을 보면
소현세자는 걍 청나라 끌려갈 때부터 몸이 안 좋아도 너어어어무우우 안 좋았고, 그 결과 당시 조선 정부가 할 수 있는 의술이란 의술은 다 갖다 박았는데도 죽었다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음
실제로 한의학 관련 논문에서도 소현세자의 사인은 '당시 의료 기술의 한계로 치료가 불가능했다' 혹은 '오진 가능성이 있다' 정도로 보지 독살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안함
인조실록46권, 인조 23년 6월 27일 무인 1번째기사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은 뭐냐고 할 수도 있음
실제로 이 기록은 굉장히 의문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기는 함. 근데 이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저걸 누가 이야기했느냐임
저거 이야기한 사람은 시체 염습하러 온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임...
시체 전문가나 의사가 아니라는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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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법의학자가 소현세자의 사인에 대해 밝히는 방송에서도 온 몸이 검은 빛이네, 칠공분혈을 했네 하는건 자기들이 흔히 보는 광경이라면서 '부패한 시신의 특징이다' 라고 한 적도 있음
그럼 결론은 뭐냐?
소현세자는 독살당한 게 아니라 몸이 안 좋았는데, 그 당시 의술의 한계로 살리기 어려워서 죽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거임
3줄요약
1. 소현세자 독살설은 야사뿐만 아니라 정사인 실록 기록도 근거로 쓰이곤 한다
2. 근데 실록은 원래 축약본 같은거라 모든 기록이 다 들어 있는게 아니고, 실록 외의 정사 기록들을 보면 소현세자는 청나라 끌려갈 때부터 조선에 귀국해서 죽을 때까지 안 아픈 날이 없었다
3. 시체가 검고 칠공분혈했다는 내용도 전형적인 부패한 시신의 특징이라, 소현세자 독살설의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p.s. 첨언하자면 '그럼 인조가 소현세자 마누라랑 자식들 다 죽여버린건 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전제왕권국가에서 차남이 세자로 지목된 마당에 애매하게 장남 가족들이 살아 있으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는 건 상식임
특히 유교 논리에 의거해서 가족간 위계질서 따지는 걸 대단히 중요시하던 조선으로서는 더더욱 그러함
그래서 그건 '인조가 소현세자를 너무 미워해서 남은 가족까지 씨를 말려버렸다' 라기보다는 '후계자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욕먹을거 뻔히 알면서도 칼춤췄다' 라고 보는게 좀 더 개연성이 맞음
뭐 그 과정에서 인조 개인의 감정이 들어갔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인조 일기장이라도 발굴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르는 거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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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루돌프코알라 작성시간 25.01.16 나도 그알 오리지널 보고 당뇨였겠구나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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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냥르장머리 작성시간 25.01.16 어우 진짜 병약하고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였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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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FBIOpen Up! 작성시간 25.01.16 차기 왕권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하게 죽임. 걍 귀양보내서 수도 근처에도 못오게 하고 가난하게라도 살게해줄 수 있었는데 어린 손주들까지 다 죽여버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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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베나치오 작성시간 25.06.21 근데 그럼 소현세자 아내랑 그자식들은 왜 역모로 모함해서 죽이기까지햇을까 이부분이 말이 안돼 소현세자 죽고나서 얼마지나지 않아서 며느리랑 손자들 다 죽이기까지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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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모승이._. 작성시간 25.10.07 애초에 차남을 후계자로 한거 자체가 말이 안되는거임 동궁이 소현이었으면 당시에 소현 아들이 없었던것도 아니고 소현세자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게 맞는거지;;; 꾸역꾸역 소현 와이프 집안까지 다 말살하고 자식들 다 죽이고 차남 후계로 올린게 개 무리수인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