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thecollector.com/modern-korean-art-colonial-period/
번역정리 https://www.fmkorea.com/8920223465
일제강점기는 현대 한국 미술을 어떻게 형성했을까?
일제강점기(1910~1945)는 한국에서 현대 미술이 서구의 기준에 따라 발전한 시기였으며, 유화와 같은 유럽의 기법과 양식에 큰 비중을 두었다. 전통을 넘어, 이 시기에 제작된 한국 미술은 한국 사회가 경험한 거대한 변화를 반영한다. 강제적인 근대화는 한국이 문화적 정체성과 씨름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탄생한 미술은 식민 지배자의 영향을 수용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했다.
역사적 맥락: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
1876년, 운요호의 병사들이 한국 섬에 있는 영종도를 공격하고 있다.
일본은 1910년에 한국을 병합하면서, 1392년부터 이어져 온 조선 왕조(1392~1910)를 종식시키고 한국인의 생활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1905년의 을사조약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주권을 박탈했다. 일본은 총독을 임명하여 황제의 권력을 대체했다.
식민 당국의 우선순위는 한국의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었으므로, 검열, 감시, 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동화(同化)가 정부의 핵심 목표였다. 예컨대 일본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한국어 사용은 억제되었다. 학교에서는 일본 역사가 가르쳐졌으며,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억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19년 3·1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평화적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며, 많은 이들을 살해하거나 체포했다.
예술 교육을 통한 동화
고희동의 《자화상》, 1915년
동화 정책으로 인해 한국 미술가들은 일본 식민 지배자와 유사한 방식으로 미술을 공부해야 했다. 일본 문화 또한 우선시되고 장려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미술 학생들은 특히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보내졌다. 1930~40년대 일본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미술은 점점 더 일본 제국을 선전하는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당시 일본의 우선순위는 정체성의 많은 측면을 서구화하는 것이었으며, 미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 미술학교에서는 서양화가 가르쳐졌고, 학생들은 서구의 양식과 기법을 습득했다. 미술은 서양화와 동양화, 유화와 수묵화로 구분되었다. 일본 학생들은 유럽에 유학을 가서 회화를 배우고 돌아와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방법을 전수했다.
서양화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이를 도전하는 형식으로 니혼가(일본화, 日本画)가 등장했다. 니혼가는 먹과 붓 등 일본 전통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단순함과 자연 세계를 강조한다. 한국 미술가들 역시 일본의 영향으로 이 기법을 사용했다.
여성 누드
김관호의 1916년작 《해질녘》
서양 미술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미술가들은 필연적으로 여성 누드를 접하고 그리게 되었는데, 이는 과거 한국 미술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던 주제였다. 예를 들어, 도쿄미술학교는 여성의 신체 연구를 포함한 프랑스 아카데미 양식을 장려했다. 일본에서는 예술적 누드와 벌거벗은 몸 사이에 구분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누드는 부도덕하고 외설적이라고 인식되었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정서가 존재했다. 이는 사회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 가치관의 지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유교 윤리는 공적인 나체의 노출을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여긴다. 사회 질서 속에서 겸손이 중시되었다. 또한 일본이 서양적 요소를 강제로 도입하여 한국 문화를 변형시키려 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이에 저항적이었다.
이러한 여성 누드에 대한 인식 때문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누드를 그린 한국 화가들은 배척을 받았다. 예컨대 고희동(1886~1965)은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서양화풍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했지만, 귀국 후 한국인들에게 거부당하여 초기에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고희동과 같은 화가들의 고난은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가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겪은 긴장을 보여준다.
미학을 통한 저항
배운성《가족도》, 1930~1935
일본의 지배와 화풍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술가들은 문화적 유산을 유지하기 위한 저항의 방식을 찾아냈다. 이는 은밀한 저항의 형태였다. 일부는 일상 장면을 묘사했고, 다른 이들은 서예와 전통 회화 기법을 활용했다. 때로는 한국적 모티프를 일본 요소와 혼합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적 표현으로 작품에 한국적 모티프를 삽입하기도 했다. 까치는 한국 민속미술에서 행운과 행복의 상징으로 자주 쓰인다. 호랑이와 함께 묘사될 경우, 조화와 권력의 균형을 상징한다. 일부 화가들은 전통적 한국 요소와 서양적 요소를 혼합하여 민족주의적 의도를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한국에는 미술학교와 전시회가 설립되어 현대 한국 미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1922년 설립된 경성미술구락부는 학생들에게 한국 전통 미술과 서양 미술을 모두 가르쳤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는 매우 영향력 있는 행사였으며, 이 정부 후원 전시는 당시 화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을 제공했다.
여성 미술가의 부상
나혜석《무희》, 1940년
일제강점기는 여성 미술가의 증가를 보인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은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적 장벽을 뚫고 예술계에서 여성의 기회를 옹호했다. 또한 후대 여성 미술가 세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했으며, 귀국 후에도 이를 이어가며,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 그녀는 자주 전시에 참가해 호평을 받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성 개인전을 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여성 화가는 박래현이다. 그녀의 작품은 전통 수묵화에서 출발하여 점차 추상적인 형태로 발전했으며, 동양화와 서양화를 융합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으며, 1943년에 데뷔했다.
결론: 일제강점기기가 한국 미술에 끼친 영향
김은호 《미인도》, 1935
무엇보다도, 검열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술가들은 이 시기 동안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일본 식민 정부는 동화 정책을 실행했지만, 많은 화가들은 민속미술, 전통적 상징, 혹은 기법을 통해 한국 미술 형식에 충실했다.
그러나, 한국적 예술 정체성이 일본의 힘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서양화 양식은 미술계에 도입되고 흡수되었다. 일본을 통한 서구 미술과의 접촉은 누드와 같은 주제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이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화가들이 전통적 양식과 융합하여 혼합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서양 미술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미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 미술은 오늘날에도 한국의 예술적 표현을 형성하는 유산을 남겼다. 그것은 과도기와 저항의 시기였으며, 현대 한국 미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당시의 문화적·역사적 투쟁을 반영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