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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미돋]역대 한국대통령 경제성적 비교

작성자milkcocoa|작성시간13.12.16|조회수2,314 목록 댓글 18
[스크렘금지를 풀엇습니다. 많이 많이 퍼날라 주셔요^^]


[역대 한국대통령 경제성적 비교]


일본 속담에는 "거짓말도 100번만 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집요하게 그 속담을 현실의 역사 속에서 실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상식중에도 철저하게 거짓말이 진실이 되어있는게 있습니다.


바로 친일파들과 5.16군부쿠테타 세력들 그리고 12.12군부쿠테타 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거짓된 역사와 국민세뇌를 통해 "박정희의 경제신화"와 "그래도 전두환때는 경제는 좋았다"입니다.


여기 올린 7개의 통계치를 들여다 보면 그들의 거짓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경제발전은 자유로운 민주정부안에서만 가능하다는것도 알게될겁니다. 세계10대 경제대국에 진입한 것도 노무현 정부때라는걸 알게될 겁니다.


한국은 해방이후 2000년도까지 비슷한 독재체재의 대만경제를 단 한번도 앞서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독재자 박정희와 대만의 독재자 장개석을 비교하면 박정희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형편이 없었습니다. 


친일군부독재세력이 틈만나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향해 "나라 말아 먹었다"고 침을 튀깁니다. 진실을 드려다보면 한국은 김대중 정부시절에 대만을 따라잡고 노무현 정부시절에는 세계10대경제 대국의 반열에 진입을 합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유연한 자유민주정부체제 안에서, 미국 일본도 차마 국민들과 인터넷을 통해 정보공유를 주저하던 사이에, 세계최초로 국가초고속인터넷망을 통한 소통의 속도혁명을 대한민국이 이루어 냈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세계10대경제대국의 진입은 (1) 자유로운 인터넷 소통의 초고속 정보공유혁명, (2) 한류로 대표되는 다양한 문화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 그리고 (3) 자유 민주주의 발전이 이룩한 쾌거인 것입니다.


일본인들과 대만인들의 한국에 대한 시기와 시셈은 그냥 생긴것도 아니고 더더욱 5.16쿠테타, 유신폭압, 새마을운동, 12.12쿠테타, 삼청교육이 만든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경제성장률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은 모른척합니다.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은 박정희가 죽은 이유가 핵개발하다가 죽었다는 소설을 쓰기도 합니다. 과연 박정희가 죽은 이유는 뭘까요?


저들의 소설과는 정반대로 박정희는 죽기직전에 미군이 철수 안하는 조건으로 핵개발을 포기합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말이 많은 매국적인 미사일 사거리 제한협정을 79년 체결합니다. 덕분에 한국은 우주개발분야에서 후진국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늦게나마 김대중 정부가 고흥에 우주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능한 독재자 박정희가 죽던 79년, 한국엔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걸까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민주항쟁은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박탈이 불을 당겼지만, 진짜이유는 경제파탄이었습니다. 79년 한국경제는 살인적인 고물가와 실업에 시름했고 서민들에 대한 세금폭탄등이 결국 부마항쟁을 유발한 근본이유였습니다.


미국정부가 핵개발한다고 죽인 정치인은 이세상에 존재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핵개발을 포기하다 죽은 독재자들은 있지요. 가다피와 후세인 말입니다. 박정희는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의 소설처럼 핵개발하다 죽지 않았습니다.


무슨 연고로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경제성장률과 국민소득증가률에 집착했을까요?


인터넷상에 '키키다'라는 분이 좋은 예를 든게 있습니다. "1만원 용돈받던 백수가 취직해서 100만원 벌면 소득이 100배가 늘었다고 자랑합니다. 한국 국민들은 다들 대단하다며 박수를 칩니다. 100배 100배.. 우와.. 그런데 같은시기 백수였다가 취직한 대만인들은 똑같은 시간에 출퇴근하는데 매월 200만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국 독재자 박정희는 대만의 독재자 장개석에 비하면 그냥 무능했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면 땅값은 당연하게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요. 보편적인 범위를 벗어나 롯또 젝박수준이라면 그것은 경제성장요인이 아니라 정부의 무능함때문입니다. 이런 부동산투기풍조 속에 사는 국민들은 총칼 안든 현대판 박정희와 전두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어쩔랍니까? 계속해서 또 5년 더 살아보시겠어요?


한국은 민주화가 시작된 김영삼 정부이후, 국가부도가 난 1997년만 기억하시지요? 이곳에 올린 도표들을 잘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언론이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당하던 무능한 독재자시절인 1969년, 1974년, 1979년 이렇게 세차레에 걸쳐 외환위기와 국가부도사태가 있었습니다.


국내외의 유수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한국국민들은 알지도 기억도 못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와 국가부도사태로 비록 국민들에게 욕을 먹고 조롱거리가 되엇지만, 외환위기와 국가부도를 3번이나 낸 박정희보다는 유능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박정희처럼 독재하며 언론을 통제하고 조작했다면 그는 온국민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으로 남았겠지요.


해방이후 대만조차 따라잡지 못하던 한국은 2000년이후 대만을 멀지감치 따돌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엇을 까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병박 정권의 공통점은 일본을 모방하고 늘 북한과 대립하고 경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일본보다 먼저 움직였고 글로벌기업과 동등하게 경쟁했습니다. 


50년동안 쭉 3류기업이던 삼성과 현대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시절에 일본을 누르고 글로벌 일류기업이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꿈과 목표가 달라야 합니다.


작은 예이지만 한국인들이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했지만 해방이후 늘 "한국"이라고 불렸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르기 시작한건 2002년부터입니다.


한국의 경제교과서나 서적을 뒤저보면 박정희시절 성장률수치만 알려줍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수준에서 출발한 다른나라와의 객관적 비교수치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대통령들과의 객관적이고 다양한 비교수치조차 알려주지 않습니다.


왜그렇까요?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 경제성적을 비교하여 보면 박정희의 경제성적은 태국, 대만, 싱가포르의 지도자들보다 못합니다. 김영삼 대통령보다 못한자가 어쩌다가 신처럼 추앙을 받고, 영남대에는 박정희학과까지 생겼을까요?


나는 내가 태어나던 1961년과 괘적을 함께한 박정희는 궁정동에서 살해되던 나의 고3말까지 나라의 국부요,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철저하게 각인되도록 교육받아온 세대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서, 박정희의 적자를 자임하며 12.12군부 쿠테타로 또다시 정권을 검어쥔 전두환에 저항했고 결국 나라를 등지며 살고 있습니다.


긴이야기 한마디로 줄이겠습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가장 크게 망친 첫번째 인물일 뿐입니다.



한국은 해방이후 2000년도까지 비슷한 독재체재의 대만경제를 단 한번도 앞서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독재자 박정희와 대만의 독재자 장개석을 비교하면 박정희는 비교조차하기 힘들정도로 형편이 없었습니다. 힌일군부독재세력이 틈만나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향해 "나라 말아 먹었다"고 침을 튀깁니다. 진실을 드려다보면 한국은 김대중 정부시절에 대만을 따라잡고 노무현 정부시절에는 세계10대경제 대국의 반열에 진입을 합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유연한 자유민주정부체제 안에서 미국 일본도 국민들과 정보공유를 주저하던 사이에 세계최초로 국가초고속인터넷망을 통한 소통의 속도혁명을 대한민국을 이루어 냈습니다.노무현 정부의 세계10대경제대국의 진입은 (1) 자유로운 인터넷 소통의 속도혁명, (2) 한류로 대표되는 문화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 그리고 (3) 자유 민주주의 발전이 이룩한 쾌거인 것입니다. 일본인들과 대만인들의 한국에 대한 시기와 시셈은 그냥 생긴것도 아니고 더더욱 5.16쿠테타, 유신폭압, 새마을운동, 12.12쿠테타, 삼청교육이 만든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연고로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경제성장률과 국민소득증가률에 집착했을까요? 인터넷상에 '키키다'라는 분이 좋은 예를 든게 있습니다. "1만원 용돈받던 백수가 취직해서 100만원 벌면 소득이 100배가 늘었다고 자랑합니다. 한국 국민들은 다들 대단하다며 박수를 칩니다. 100배 100배.. 우와.. 그런데 같은시기 백수였다가 취직한 대만인들은 똑같은 시간에 출퇴근하는데 매월 200만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국 독재자 박정희는 대만의 독재자 장개석에 비하면 그냥 무능했습니다."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은 오늘도 내일도 경제성장률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살인적인 물가상승률은 모른척합니다.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은 박정희가 죽은 이유가 핵개발하다가 죽었다는 소설을 쓰기도 합니다. 과연 박정희가 죽은 이유는 뭘까요? 저들의 소설과는 정반대로 박정희는 죽기직전에 미군이 철수 안하는 조건으로 핵개발을 포기합니다. 그런이유로 지금 말이 많은 매국적인 미사일사거리 제한협정을 79년 체결합니다. 덕분에 한국은 우주개발분야레서 후진국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김대중 정부가 고흥에 우주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능한 독재자 박정희가 죽던 79년, 한국엔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걸까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민주항쟁은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박탈이 불을 당겼지만 진짜이유는 경제파탄이었습니다. 79년 한국경제는 살인적인 고물가와 실업에 시름했고 서민들에 대한 세금폭탄등이 부마항쟁의 근본이유였습니다. 미국정부가 핵개발한다고 죽인 정치인은 이세상에 존재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핵개발을 포기하다 죽은 독재자들은 있지요. 가다피와 후세인 말입니다. 박정희는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의 소설처럼 핵개발하다 죽지 않았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면 땅값은 당연하게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요. 보편적인 범위를 벗어나 롯또 젝박수준이라면 그것은 경제성장요인이 아니라 정부의 무능함때문입니다. 국민들은 총칼 안든 현대판 박정희와 전두환 아래에서 살게되는 겁니다. 어쩔랍니까? 또 살아보시겠어요?

한국은 민주화가 시작된 김영삼 정부이후, 국가부도가 난 1997년만 기억하시지요? 이곳에 올린 도표들을 잘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한번이 아니었습니다. 언론이 친일매국세력과 군부독재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당하던 무능한 독재자시절 1969년, 1974년, 1979년 세차레에 걸쳐 외환위기와 국가부도가 있었습니다. 국내외 경제학박사들이 수두룩한데도 한국국민들은 알지도 기억도 못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와 국가부도사태로 비록 국민들에게 욕을 먹고 조롱거리가 되엇지만 외환위기와 국가부도를 3번이나 낸 박정희보다는 유능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박정희처럼 독재하며 언론을 통제했다면 그는 온국민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으로 남았겠지요.

해방이후 대만조차 따라잡지 못하던 한국은 2000년이후 대만을 멀지감치 따돌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엇을 까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병박 정권의 공통점은 일본을 모방하고 늘 북한과 대립하고 경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일본보다 먼저 움직였고 글로벌기업과 동등하게 경쟁했습니다. 50년동안 쭉 3류기업이던 삼성과 현대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시절에 일본을 누르고 글로벌 일류가업이 된 이류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꿈과 목표가 달라야 합니다. 작은 예이지만 한국인들이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했지만 해방이후 늘 "한국"이라고 불렸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르기 시작한건 2002년부터입니다.

한국의 경제교과서나 서적을 뒤저보면 박정희시절 성장률수치만 알려줍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수준에서 출발한 다른나라와의 객관적 비교수치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른 대통령과의 객관적이고 다양한 비교수치조차 알려주지 않습니다. 왜그렇까요?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같은시기 경제성적을 비교하여 보면 박정희의 경제성적은 태국, 대만, 싱가포르 지도자보다 못합니다. 김영삼 대통령보다 못한자가 어쩌다가 신처럼 추앙을 받고 영남대에는 박정희학과까지 생겼을까요? 


[참고]

IMF 외환위기는 박정희가 원조다 

By John Coltrane


IMF 외환위기가 마치 1997년 김영삼 정권에서만 발생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만에 말씀이다. 외환위기는 기본적으로 달러가 부족하면 발생하는데,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고 경제수준에 비해 적자 규모가 커지면 필연적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한다. 김영삼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집권 내내 수백억 달러 규모의 무역적자에 시달렸다는 공통점이 있고, 따라서 박정희 정권에서 여러 차례 외환위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국민들이 잘 모를뿐이지 당연한 현상의 이야기이다.


다만 박정희 정권 시절에 발생한 외환위기 때는 김영삼 정권과는 달리 IMF 관리체제로 가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고 일본에 받아온 돈 겨우 3억불(타 피해국와 견주면 족히 30억불 정도는 받아야 마땅하나, 충성혈서 쓴 천황국이고 미국에서 장면정부에 약속했던 30여 억불이 날라간 판이라 국민들 원성이무서워 그 여론을 잠 재우느라고 일본군 출신 선배들을 통해 요로에 부탁해 몇천만 불 선금 당겨쓰고 황급히 1/10로 낙찰해 받음- 현 규모로 보면 수백억 불 천황국에 양보한 셈), 월남전에 대규모의 파병을 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미국에 받아온 돈 25억불(당시 총 GDP의 몇 배 규모) 중동 건설 특수 등으로 돈 잔치를 벌렸지만, 일본에 모든 것을 의존하다 보니 최대 규모의 일본외채(YS 때는 IMF사태의 최대 원인이 됨)는 차치하고서도 겨우 겨우 상황을 모면해 나갔을 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박정희 권에서 언제, 어떻게, 왜? 외환위기 상황들을 맞았었는지 자료로 살펴보자.


첫번째 외환위기는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한 투자로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서 일어났다. 1963년에는 수출이 8,600만 달러였는데 경상수지 적자는 그 배에 가까운 1억 4,300만 달러였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누적적자는 2억 2,4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적자는 미국의 후원으로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권자금 8억 달러 (무상 3억, 유상 2억, 상업차관 3억)에 의하여 넘어갔다. 이러한 자금의 규모는 우리의 수출규모가 1억 달러 전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두번째 외환위기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67~1971) 기간 중 연간 4~5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가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일어났으나 '월남전 특수'로 넘겼다. 1965년 '월남파병'으로 체결된 '브라운 각서'에 의하여 아시아 지역에서의 미국정부 조달은 한국에 우선 배정할 것을 약속했고, 이에 따라 현대건설은 태국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한진은 월남전 군수물자를 수송하게 되어 많은 외화를 벌어들여 외환수급의 어려움은 해결되었다. 1972년 '8.3 사채동결조치'에 의하여 기업의 이자부담이 대폭 줄어듦으로써 경쟁력은 급속히 회복되어 경상수지 적자는 감소추세에 돌아섰다. 그러나 '8.3 사채동결조치'에 의하여 우리기업은 부채를 겁낼 줄 모르고 몸집을 불리는 방만하기 짝이 없는 '차입경영'과 '그룹경영'으로 치달았고, 자본을 충실히 하고 자기 사업에만 집중하던 우량기업들이 오히려 시장 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경제는 구조조정에 의하여 대외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사채동결이라는 편법에 의존함으로써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번째 외환위기는 1973년 10월에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적자규모가 1974년에는 최초로 두자리 수인 20억 달러를 넘어서며 일어났다. 미국의 씨티은행과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던 2억 달러의 점보 론(jumbo loan)을 받아 가까스로 유동성위기를 넘겼다. 우리의 건설업이 동남아에 진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974년 중동에 진출하여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게 되는 '중동건설 특수'에 의하여 위기를 넘겼다.


네번째 외환위기는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무너지면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과 1970년대 중화학공업 투자에 의해 1979년부터 3년 연속 40~50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어 외환수급이 어려워졌다. 미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40억 달러의 '한일 경제협력자금'이 보증역할을 하여 대외신용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해외차입으로 외환수급의 어려움을 넘기게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이와같은 네번의 외환위기가 있었지만 자기자본을 충실히 하고 뼈를 깍은 구조조정의 노력보다 냉전체제의 산물인 한미일 특수관계, 월남전 특수, 중동건설 특수라는 외생적 변수에 의존하여 위기를 넘김으로써 위기불감증에 걸리게 되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동안 372억 달러에 가까운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는 데도 원화를 절상하는 방향 착오에 의해 위기는 가속되었다. 1997년에 와서야 금융감독 체제를 개편하고 '부실채권 정리기금'을 조성하여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떨어진 대외신인도를 높이려는 노력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동남아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를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IMF 긴급자금지원' 이라는 타력에 의하여 위기를 넘겼다. 구조조정을 위한 개혁조치들은 IMF 자금지원이 있은 후에 IMF 경제프로그램에 의하여 입법화되었다. 냉전체제도 사라지고 중국이 시장경제에 편입됨으로써 한미일 특수관계도 약화되었고, 월남전 특수나 중동건설 특수 같은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8.3 사채동결조치' 같은 특혜조치도 불가능했다. 기업 스스로의 자력에 의한 자본충실과 경쟁력 강화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고, 정부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구조조정을 꾸준히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참고자료 -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By John Coltrane)

인용자료: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 Report of the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Commit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 U.S. House of Representatives, October 31, 1978."


인용자료요약: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z-up2VNU8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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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2011.12.09 | 작성시간 13.12.17 정독해야됨!정독할거임
  • 작성자아깽이 | 작성시간 13.12.17 그럼 우리가 배운 역사는....에휴 역시 아는게 힘이다
  • 작성자동생덕후 | 작성시간 13.12.17 내일! 내일 볼래! 아니 아침에 일어나서! 자세히 볼게!
  • 작성자ㅇr........ | 작성시간 13.12.17 진짜 소름이다..... 맨날 박정희가 우리나라 경제 일으킨거라고 하는 어른들.....하..
  • 작성자일하기싫어이씨 | 작성시간 13.12.17 [역대 한국대통령 경제성적 비교] 고마워 계속 보면서 애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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