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흥미돋]생각보다 엄청나게 고평가된 세종 아빠

작성자흥미돋는글|작성시간25.10.17|조회수11,486 목록 댓글 4

출처: https://www.fmkorea.com/8920091472

 

 


너 이 색/휘 잘걸렸다

 

감히 세종의 아버지이자

 

조선의 제 2의 건국자인 태종 이방원을 음해하는 거임?!

 

 


필자에게 쏟아질 무수한 돌덩이를 감수한다

 


최근 태종 관련 글이 계속 올라오며

 

세종 말곤 아무도 그 능력에 닿을 수 없는 초인으로 묘사되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신화성은

 

꽤 많이 걷혀지고 있는 상태이다

 

 

다만 이걸 그대로 말하면 너 잘걸렸닼ㅋㅋ

 

하며 돌 맞을 수도 있으니 자세하게 기술한다

 

 

 

 

 

 

 

 

 

1. 소수 측근 중심의 운영

 

 

 




일단 조선 건국 당시 매우 불안정하고

 

정도전 같은 재상 중심의 정치가

 

 

(태종 본인에게)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경험한 이방원은 정치적 안정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국정 운영을 자기가 신뢰하는 소수의

 

측근들에게 의존한 경향이 있다

 

 

 

 

 

 

 

 


그나마 이 양반은 엄청난 처세술로 끝까지 살아남은 케이스

 


물론 이방원의 정치적 능력은 조선 왕조 탑 수준이라

 

측근들에게 적당히 힘을 실어주고 견제하는 등

 

 

잘 이용해 먹긴 했지만, 주요 국정 현안을

 

하륜, 조영무, 이숙번 같은 측근들 하고만 논의했기에

 

 

태종 대에는 왕의 뜻과 측근의 의중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는

 

독단적인 정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또한 다들 한국사 시간에 한번쯤은 봤을

 

6조 직계제 역시 같은 맥락으로 비판할 수 있다

 

 

즉 왕이 국가의 모든 행정 업무를 직접 관장하여

 

엄청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지만

 

 

반대로 왕에게 모든 업무가 가중되어

 

국정운영의 효율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것

 

 

 

 

 

 

 

 


알면 알 수록 평행이론 수준인데 다운그레이드 버전인 세조

 


태종 대 국정 운영 방식은 왕이 매우 유능해야만

 

굴러 갈 수 있는 방식이었다

 

 

태종처럼 유능하면서 정책적 비전을 가진 인물이라면

 

자신의 비전을 잘 구현할 이 운영방식이 꽤 잘돌아가지만

 

 

세조, 중종, (정조)와 같이 비대해진 왕권만을 휘두르거나

 

측근 관리에 실패해 운영이 흔들린 케이스가 더 많았다

 

 

 

 

 

 

 

 

 

다만 이건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의 특성과

 

당시 엄청나게 혼란했던 신생 조선 정국등을 고려하긴 해야 한다

 

 

즉 당시 + 이방원의 에고와 능력을 고려한다면

 

이 선택은 그렇게까지 최악의 선택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신세종의 리부트 정상화로 6조 직계제가 폐지되고

 

조선의 기본 운영이 의정부 서사제로 돌아간 것을 보면

 

 

최소한 세종대에는

 

이러한 운영 방식이 장기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2. 법률 문제

 

 



조선 건국 당시 

 

재상 고트 논쟁에 들어갈 수준인

 

 

조준을 필두로 여러 신진 사대부들이 참여한

 

경제육전이 주 법률로 반포된다

 

 

 

 

 

 

 

 

 

 


저평가되어 오히려 고평가된 정도전

 

 

다만 경제육전은 건국 초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급하게 만들어진 감이 없지 않아서

 

 

내용이 미흡하거나 구체적인 시행 규칙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경제육전에 사전 지침서 느낌인

 

 

조선 경국전의 집필자가 "정도전"이라서

 

법전 내에는 재상 중심의 통치 체제를 규정했다

 

 

 

 

 

 

 

 

 


송송파파 돌려내라!

 

 

그리고 정도전을 담가버린 이방원 입장에선

 

경제육전 내 재상 체제에 대한 반감이 매우 심했다

 

 

근데 당시 경제육전을 대체할 법전이

 

뚝딱 나올 수가 없기에

 

 

일단 경제육전을 고칠 수 없는 원전(原典)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전임자 지우기에 들어가는데...

 

 

 

 

 

 

 



역시나 측근인 하륜이 주요 편찬자로 하여

 

만든 법전인 속육전이 바로 그것이다

 

 

주요 타이틀은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인데

 

경제육전의 여러 분야를 수정하고 추가했다

 

 

근데 내가 앞에 이 속육전과 상충되는

 

경제육전을 "고칠 수 없는 원전"으로 했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이 챕터 요약

 

 

 하나의 국가에 2개의 헌법이 존재하는

 

법의 이원화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 때문에 법령의 중복이나 모순이 발생해

 

법의 체계성과 일관성을 떨어뜨렸고

 

 

조선육전엔 없는데, 속육전엔 있는 법령 등으로

 

실제 법 적용 과정에서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다

 

 

 

 

 

 

 

 




그렇다고 속육전이 조선 전기의 끝판왕 법전도 아니어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법령들을 담지 못했고

 

 

법령 체계도 완벽히 정비되지 않아서

 

조선 전반에 걸쳐 끊임없는 보완이 필요했다

 

 

 

 

 

 

 

 


무려 현대 대한민국의 관습법으로 인용된 킹국대전



얼마나 복잡하게 얽혔는지 먼치킨 세종

 

속전이라는 dlc를 냈지만 실패에 가까웠고

 

 

세조 때까지 그냥 중세 유럽 관습법 수준으로

 

법체계가 후퇴 했을 지경

 

 

이러한 법률적 야만의 시대는 성종 시기

 

조선 법률의 마스터 피스인 경국대전이 완성되며 끝나게 된다

 

 

 

 

 

 

 

 

3. 경제 문제

 

 



위의 두 개는 어찌어찌 태종 때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결정이라고 봐줄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봐도 명백한 실패이자

 

태종 시기 가장 큰 과오는 바로 경제 정책이다

 

 

 

 

 

 

 


역사상 최초의 지폐인 원나라의 교초

 

 

우선 조선은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자생적으로 물품화폐를 사용할 수 있을 수준까지 도달하긴 했다

 

 

주로 마직물이나 면직물로 간이 화폐를 만들어

 

그것을 기반으로 교환을 했고

 

 

원 간섭기 시절 원나라 영향권에서 통용된 종이 화폐인

 

교초 때문에 지폐, 즉 저화의 인식이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무튼 이 저화의 유통 논의는 고려 말부터

태조 이성계 시기까지 논의되었다

 

 

그리고 태종 2년, 태종은 할수있다 나라면!

 

을 외치며 하륜의 건의로 저화 2천장을 발행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태종 정책 중 가장 재앙이 되어버린다

 

 

 

 

 

 

 

 


이 챕터 요약

 

 

일단 태종의 저화는 쌀을 본위로 하는 화폐였는데

 

발행 기준 1장 당 쌀 2말이었고

 

 

이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가기 위해

 

관리의 녹봉을 저화로 일부 주었으며

 

 

저화로 금, 은, 면, 포를 살 수 있게 하여

 

경상, 전라도에서 쌀 3천석으로 저화를 구매해 신뢰성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의 화폐 유통 정책은

 

후술하겠지만 지극히 신뢰하기가 어려운 구조였고

 

 

태종의 어수선한 정책 집행 결정 상황

 

그리고 피해 구제 대책이 전무

 

 

그리고 결정적으로 장기적인 화폐 경제 구축 느낌보다는

 

단기적으로 백성의 물자를 빨아먹어 재정 충당의 수단이 강했다

 

 

 

 

 

 

 

러를 쌀로 치환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우선 태종 저화는 태환, 즉 교환할 정부 보유 미곡을

 

초과하여 발행되었다

 

 

기본적으로 한양, 개성의 화매소에서 쌀을 받고

 

저화를 교환해주는 형식으로 발행하였는데

 

 

아무튼 세금이었기에 발행 첫 해에는

 

교환량이 많긴 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는데

 

 

 

 

 

 

 




첫 해에 쌀 좀 받는 데 성공했다고

 

태종은 저화로 세금을 받는 정책을 폐기해 버린다

 

 

당연히 이 지랄이 나니 저화의 신뢰성은 짐바브웨 달러 급으로 떨어져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기 시작한다

 

 

 

 

 

 

 

 


물론 저화로 세금을 걷는 걸 폐지했지

 

저화 자체는 계속 교환이 되었지만

 

 

윗윗짤에서 내세운 이유인 저화 통용과는 반대로

 

태종은 오히려 저화의 지방 교환소를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저화를 오직 중앙의 교환소에서만 구할 수 있게 해야

 

지방의 쌀을 정부로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량상 다 담지는 못했지만

 

정부의 저화 정책 기조가 계속 왔다갔다해서

 

 

저화의 신뢰성과 화폐 가치가 나락을 찍어버렸고

 

저화는 저화대로 매우나 찍어버리니

 

 

태환(교환)가능한 쌀보다 저화 유통량이 많아져

 

저화를 받을 땐 쌀을 받으면서, 저화를 받으면 쌀로 태환해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없었다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대충 이런 상황이 태종 시기 발생한 것

 


즉 태환권(저화)의 발행량이 태환 가능 양(쌀)보다 많으면

 

정부 재정이 손해를 보거나, 초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폭락하는데

 

 

태종 때는 이 조건을 완벽히 충족해서

 

정부 재정 폭망 +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

 

 

※ 재정 폭망은 후술

 

 

 

 

 

 

 

 


아메리칸 이방원ㄷㄷ

 


즉 닉슨 쇼크처럼 정부가 태환을 보증한 현물(쌀)의

 

태환을 거부 때린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당연히 내각 구성원들은 고스톱 쳐서 올라간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이거 태환 못해주면 ㄹㅇ 좆됨! 다른 물품으로 태환해주자!"



라는 논의가 있었는데, 예산 없다고 컷당해버리고

 

그 결과 처음에 저화로 받겠다고 한 세금도

 

 

나중엔 쌀로 받는 등

 

도대체 왜 했는지 이해가 안가는 행동을 보이는데

 

 

 

 

 

 

 


헥 이거 폰지 사기잖아?!

 

 

이 기묘한 정책의 의도는 후술할 이방원의

 

대 여진족 외교의 실패로 인한 군비 확충의 의도가 강했다

 

 

즉 군량미를 채우기 위해 

 

임시적인 전쟁세를 거둔거에 가까운 것

 

 

그러나 이 일로 정부 주도 화폐의 신뢰성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수많은 임금들이 어떻게든 개혁하려고 똥꼬쇼를 벌였지만

 

 

결국 숙종 때의 상평통보까지 조선은 화폐보다는

 

이승포, 오승포 같은 현물로 경제가 돌아가게 된다

 

 

 

 

 

 

 


또한 제도적으로도 과거 신성화된 이미지와 다르게

 

꽤나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새 제도를 만드는 창조적 혜안보다는

 

그냥 본인의 업무 범위를 늘리는 식으로 해결했고

 

 

의례, 기록관리 부분에서도 이전의 신성화된 이미지에 비하면

 

허점을 꽤나 많이 보여준다

 

 

 

 

 

 

 

 

4. 토지 정책

 

 




국가 세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양전도 실패한 것에 가까운데

 

태조 때 시작해서 정종 때 집계된 양전은 6도 92만결

 

 

그러나 태종 때 이뤄진 을유양전에서 집계한 결과

 

6도 96만결 수준으로 4만결 정도만 증가된 수준

 

 

 

 

 

 



이에 태종은 통계 문제가 있다!를 주장하며

 

조사 2트를 명했는데

 

 

다만 당시 문제가 많던 고려의 삼등전품제로 조사했고

 

집계 자체도 철저하지 못해 누락된 결수도 많았다

 

 

무엇보다 불확실하게 집계된 땅에만 조세가 집중되어

 

조세 형평도 좋지 않았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하륜

 

 

게다가 측근 정치한다고 밀어준 측근들의

 

토지들이 실제보다 적게 신고 + 조사에서 누락되었고

 

 

이들의 토지 겸병이 계속되며 농민의 토지가 줄어들었고

 

이는 앞서 말한 조세 형평 문제로 이어져

 

 

민생 안정의 악영향 + 국가 재정 취약성이 심해지게 된다

 

 

 

 

 

 

 

 

 

 

5. 공신전 + 공신 문제

 

 

 



일단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이기에

 

집권에 도움을 준 공신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태종 때 공신 문제는 알려진 것보다

 

폐해가 상당했는데

 

 

우선 1차,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며

 

수많은 공신이 탄생했다는 게 근원적인 문제!

 

 

 

 

 



태종 시기 공신들에게 준 토지 + 세금 수취권을 준 공신전은

 

4만 5000결 정도였는데

 

 

이는 경기도 내 전결이 14만 9천 결 정도라는 걸 감안한다면

 

무려 경기도 전결의 30%에 가까운 수치

 

 

공신 문제로 욕을 쳐먹는 세조가 10600결 수준인데

 

태종은 세조의 4배가 넘는 수준으로 공신전을 남발한다

 

 

 

 

 

 

 




그나마 직전법을 통해 공신전 세습을 막은 세조와 달리

 

태종 때 공신전은 그냥 세습 + 세금 면제 토지였다

 

 

정리하면 수도 일대의 땅 5분의 1이 공신의 세습 면제 토지로

 

이는 당장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후대로 갈 수록 수조권 문제로 재정이 씹창내는 1등 공신으로

 

사실상 미래세대의 부로 현재를 사는 방식이다

 

 

그리고 태종은 이 제도의 폐해와 부작용을 후대로 물려주고

 

혜택만 쏙 취해 신하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 애초에 세조가 직전법 시행 한 것부터

 

전대에 발행한 세습 면세 토지가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의외로 태종은 숙청을 많이 안한편에 가깝다

 


게다가 숙청의 이미지가 있는 태종은

 

자신의 왕권, 후계에 직접적은 문제가 되는 사람만 조졌고

 

 

나머지 공신들은 웬만하면 허허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강한 편이었는데

 

 

 

 

 

 



대표적으로 태종 대 공신인 장사정은

 

전 판서인 남궁서의 아내의 귀를 자르고 때려 죽였고

 

 

이웃마을 남녀들을 매질하여 임신한 여자는 죽었고

 

국법상 사형이지만 태종은 그냥 유배 잠깐 보냈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어의를 하사하는 등

 

온갖 혜택을 줬다

 

 

 

 

 

 

 



또한 공신의 아들인 박실이 

 

부사직을 맡던 윤하의 첩을 도둑질했는데

 


윤하가 박실의 집에 쳐들어가 첩을 되찾아오자

 

이에 빡친 박실은 윤하의 집으로 가 그의 정실부인을 때려죽인다

 

 

즉 남의 첩을 빼앗으려다 실패하자 그의 정실부인을 죽인 사건으로

 

국법상 사형이지만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태종은 잠깐 귀양 보냈다가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끝낸다

 

 

 

 

 

 

 

 


아무리봐도 진짜 평행이론인...

 


즉 공신 문제에 있어 태종은 숙청이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자신의 왕권에 도전만 하지 않는다면

 

 

국법상 사형에 준하는 죄도 웬만하면 봐줬고

 

오히려 공신전을 챙겨주며 그들의 충성을 얻은 것이다

 

 

그나마 정치적으로 잘 돌아가던 양반이라

 

세조 때 처럼 공신의 세력화, 비대화가 없던 건 다행...인가?

 

 

 

 

 

 

 

 

6. 재앙적인 대 여진 외교

 

 

 

 




이방원의 아버지인 이성계의 가문은

 

대대로 여진족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축헀고

 

 

많은 여진족 부족장들이 이성계를 따랐고

 

일부는 가별초(사병)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이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하고

 

이성계가 이방원에 대항하여

 

 

조사의의 난을 일으킬 때 자기 휘하의 여진족을

 

동원하려고 한 시점에서 관계가 애매해지게된다

 

 

일단 여진족은 난에 불참했지만

 

이방원과 여진족은 상당히 어색한 관계가 되는데...

 

 

 

 

 



그러던 중 명나라가 여진족에게

 

조선과의 협력관계를 끊고

 

 

명에 직접 종속되라는 의미의 입조 요구를 전달하였는데

 

당시 조선에 무역의존도가 높던 여진은 달갑지 않은 제안!

 

 

이에 여진족은 입조는 하되 조선과 관계는 유지하거나

 

조선 관직은 동생에게 승계시키는 등 어떻게든 최선을 다했으나

 

 

 

 

 



이방원은 여진족에게 절대로 명에 입조하지 말것을 강권 하고

 

이에 당연히 파워게임에서 상대가 안되기에

 

 

여진족들은 명에게 입조하게 된다

 

이에 킹받은 태종은 여진족은 대대로 조선 관할이다!

 

 

를 주장했지만, 명나라의 영락제는 뒤지기 싫으면 짜져라

 

라는 대답을 받고 입꾹닫을 시전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태종은

 

여진과의 무역을 전면 금지시켜버렸고

 

 

괜찮았던 조선 - 여진 관계는 급격히 파국으로 치닿았고

 

결국 이성계과 친분이 있던 골야키무나가 함경도를 공격한다

 

 

 

 

 

 



하륜 같은 측근들은 전쟁을 반대하며 관계회복을 주장했지만

 

태종은 강경하게 토벌을 밀어붙였고

 

 

존나 웃긴건 토벌의 대상이 약탈을 주도한

 

골야키무나의 부족이 아닌

 

 

약탈에 참여하지 않은 명에 입조한 부족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중립 여진족 부족들은

 

일제히 조선을 적대했고

 

 

억울한 동족의 복수를 한다며 수많은 부족이 연합하여

 

조선을 공격해 조선군은 연전연패하며 함경도 상실 위기까지 간다

 

 

결국 태종은 최북단 거점인 경원군을 포기하고

 

국경을 뒤로 물리면서 사건을 일단락시킨다

 

 

 

 

 참고로 태종은 전쟁 지속을 외쳤지만

 

신하들의 집단상소에 굴복

 

 

 



그러나 태종의 이 대책없는 대여진 외교는

 

병자호란 시기까지 조선 국방에 큰 후유증을 남겼고

 

 

당장 후대의 국왕인 세종도 여진 문제 때문에

 

골깨질 정도로 고생한다

 

 

참고로 이 때의 군사 위기 때문에

 

일종의 군비 확충 폰지 사기인 저화 통용까지 밀어붙여서

 

 

조선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까지 한....

 

 

 

 

 

 

 



즉 태종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신생국 특유의 혼란을 잠재우는데 전력을 다했고

 

 

정국 안정과 후세에 대한 기반을 갖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와 별개로 장기적인 비전의 부재와

 

이너서클 챙기기, 본인의 강한 에고 등등

 

 

미시적으로는 상당한 문제점이 내포된 시대였고

 

그 중 몇가지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될 정도의 병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세종으로 모든 공격이 파훼가 되는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왕권과 자기의 후대를 위한 작업만큼은 완벽히 해내었고

 

 

강력한 정치력으로 왕에게 반대되는 정치세력도

 

모두 치워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모든 과오에도 그의 최고의 업적이자

 

조선 역사상 최고의 업적인 

 

 

세종대왕의 성공적인 승계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종은 본의 아닌 스노우볼을 하나 더 굴렸는데

파토난 여진 정책으로 동족의 복수를 위해 부족들을 결집한 여진의 부족장인 동맹가첩목아는

이 사건 이후로 조선과 완벽히 손절하며 조선을 피해 더 북쪽으로 이주하는데

이 동맹가첩목아의 여진족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이 먼터무의 6대손이 후금을 건국하는 누르하치, 7대손이 조선왕이 대가리탕탕쇼하게 만든 홍타이치입니다

 

 

 

이전편들

 

한국사에서 기이함 원탑인 사람

 

진짜 미래의 악마 그자체였던 사람

 

선조는 과연 런해서 욕먹는 걸까?

 

예수 이 사람 실존인물임?에 관한 현재의 정설

 

의외로 꽤 촉법소년이었던 사람

 

-끝-

 

 

댓펌)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이후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에 본격적으로 화폐 사용이 추진되어 저화가 발행되었다. 저화 발행의 표면적 이유는 유통의 편의를 위한다는 것이지만, 실제 이유는 저화와 민간의 쌀을 바꾸어 나라의 미곡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저화는 기존 포(布)와는 달리 그 자체로는 아무런 사용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가치 보존이란 측면에서 신뢰를 받기가 어려웠다. 또한 국가의 본래 목적이던 미곡 확보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후에는 저화를 미곡으로 바꾸어 주는 것을 폐지하였기 때문에 저화에 대한 신뢰는 더욱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이리하여 상인과 백성들이 저화를 통한 상거래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 우리 역사넷 -

대충 요약하면

태종 : 이거 줄테니 준만큼 쌀 내놔라

백성 : 오 이거 관청가서 바꾸거나 세금으로 내면 되는거죠?

태종 : 이게 왜 니들 돈이야 씨x들아

 

저화 관련 되서 알아보면서, 이거 진짜 폰지 사기 아님? 이라는 생각 바로 듬ㅋㅋㅋㅋ

세종이 못 건든 문제 -> 대충 태종을 찍으면 맞다

 

그나마 저거로 "국가재정(민간의 부유함 아님)"은 채워서 나중에 국방에도 쓰고 하긴 하는데 암만 긍정적으로 봐도 민간의 부를 약탈해서 국고를 채우고 그 대가로 화폐 신뢰성을 박살낸거라 상업은 그냥..

 

얼마나 많이 축적했으면 태종 12년에만 백만석을 모았는데

이게 세종 초기 시점에서 썩어나가기 시작하니깐

구휼 명목으로 잉여곡을 마구마구 방출하기 시작함ㅋㅋㅋㅋ

즉 관청별 사업 내역, 소요예산 생각도 안하고 미친듯이 거둬들였고

적절한 세수규모 조정도 안해서, 무려 세종 말기까지 이 주먹구구식 정책이 이어짐

그나마 세종 말기에 어느 정도 정상화시키고, 성종 때 경국대전으로 완전히 정상화됨

진짜 경제 정책 부분에선 태종이 재앙 급이긴 했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올라프프 | 작성시간 25.10.17 와 흥미롭다 진짜 걍 유능하기만 한 왕인줄알았네 재밌엌ㅋㅋㅋ
  • 작성자과자의 귀족 | 작성시간 25.10.17 너무 재밌어 배운 사람은 글쓰는게 다르다
  • 작성자재내난 | 작성시간 25.10.17 오 태종 실책많았구나 재밌다
  • 작성자바운디 | 작성시간 25.10.17 오 흥미돋ㅋㅋㅋㅋ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