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옴 서 감 서
노산군=단종
단종이 폐위 및 서인으로 강등 돼 사사됨 그에 시호를 받지 못 해 노산군으로 불렸었음
이 날 양녕대군 및 정의지가 역적들 처분을 요청 함
"불가하다. 옛사람의 말에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고, 또 성인(聖人)은 너무 심한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제 만약 아울러서 법대로 처치한다면 이는 너무 심하다."
하고, 명하여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다시 영(瓔) 등의 금방(禁防)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9권, 세조 3년 10월 21일 신해 2/2 기사 /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세조실록에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스스로 목을 조른게 아닌 졸려 죽었고 수습도 해주지 않고 쓰레기마냥 버려 버림..
참고로 단종은 17살에 죽었다.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引見)하고 면유(勉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이 영월(寧越)에 피하여 계실 적에 금부 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정중(庭中)에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단종 대왕께서 관복(冠服)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이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그가 봉명신(奉命臣)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하나가 차마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천도(天道)는 논해야겠으니, 그 공생의 성명이 전해와서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면 본도(本道)로 하여금 계문(啓聞)하게 하라."
숙종실록33권, 숙종 25년 1월 2일 임신 1/1 기사 / 1699년 청 강희(康熙) 38년
야사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음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귀양 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을 맡아보던 하급 관리)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 하였다.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기니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 뇌우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의 <단종조고사본말>
김일손은 공초하기를,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金宗直)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30권, 연산 4년 7월 13일 정미 3/4 기사
/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노산군이 해를 입자, 관에서 명하여 시신을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전의 이름(엄흥도를 지칭)은 생각나지 않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관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다.”
-야성잡설-
단종 시신은 산속에서 한달간 방치되어 아무도 수습하지 하지 못하고 짐승들에게 훼손되는 상태였는데, 누군가 시신을 수습해줌 그 사람이 엄흥도...
삼족을 멸한다는 명이 있었지만,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모시고 눈보라를 헤치며 산을 오르던 중 잠에서 깨 도망친 노루가 누워있던 눈이 쌓이지 않은 자리에 단종을 모셨다고 함 이후 가족들과 자취를 감췄다고..
마을 사람들도 단종의 묘는 절대 발설하지 않고 지켜주고 아이들은 놀다가도 단종 묘 쪽으로는 돌도 안 던졌대ㅠ
단종 묘는 중종 때 찾아 정리해줌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915) 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士林)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 병진 2/6 기사 / 1516년 명 정덕(正德) 11년
단종의 왕릉은 평지가 아닌 능선 즉 언덕에 위치해있음
장릉 옆에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모신 정려각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엄흥도 관련 내용
단종이 유배 당시 지었던 시가 있다.
자규루는 영월 관풍헌에서 동쪽에 있는 누각으로 단종 임금이 청령포에서 광풍헌으로 옮겨와 있으면서 자주 이곳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자규사및 자규시로 어린 자신의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고 전하는 곳이며 원래 이 자규루는 매죽루였으나 단종의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이 자규루로 바뀌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한마리 원한 맺친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가고 밤이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소리 끊어진 새벽 옛부리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꼴짝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 사람 귀만 홀로 밝은고..
유배지에서 정순왕후를 많이 그리워했다함
사이가 좋았던지라 유배 같이 보내 달라고 했는데 거절 당했대
세조는 단종실록에 야무지게 역사왜곡도 빼놓지 않고 해놓으셨다네요.
숙종이 노산군을 복위해 시호와 함께 단종이라는 모효를 올렸다. 노산군일기>단종실록으로 제목을 바꾸고 경위 적어서 부록 만듦 근데 내용이 수양대군 미화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비방해 왜곡이 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세조는 의금부에서 올린 헝률보다 심하게 처벌함
아무리 연자죄여도 15세 이하 아이들은 종으로 삼는데 세조는 다 죽이라고 했고 귀양이나 공신에게 종으로 보내질 죄인들도 지방 작은 고을에 관노비로 만들라고 명함 분이 안 풀렸는지 자결한 사람 시체를 따로 거열하고 효수함 ㅁㅊ놈
수양대군이 죽인 사람들
1.계유정난
황보인: 영의정(정1품), 1453년 10월 10일밤 입궐하다 홍윤성, 함귀에 의해 피살
김종서: 좌의정(정1품), 1453년 10월 11일 양정, 이흥상에 의해 참살
정분: 우의정(정1품), 계유정난으로 귀양을 가 1454년 사사
이양: 우찬성(종1품), 판중추원사, 1453년 10월 10일밤 입궐하다 함귀에 의해 피살
허후: 좌참찬(정2품), 수양대군이 좌찬성을 제수해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황보인, 김종서를 변호하다 거제도에서 교수형
민신: 이조판서(정2품), 문종 왕릉 공사를 감독하다 1453년 10월 10일밤 삼군진무 서조에 의해 피살
조극관: 병조판서(정2품), 1453년 10월 10일밤 입궐하다 홍윤성, 함귀에 의해 피살
안평대군 이용: 세종의 3남, 1453년 10월 18일 귀양길에 사사
의춘군 이우직: 안평대군의 장남, 1453년 10월 18일 사사
덕양정 이우량: 안평대군의 차남, 사사
김승규: 지부, 김종서의 장남, 1453년 10월 10일밤 양정이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치자 아비를 지키다 참살됨
김승벽: 직장, 김종서의 차남, 1453년 10월 11일 아비 김종서와 함께 참살
김목대: 김종서의 3남, 교수형
김석대: 김종서의 4남, 교수형
김조동: 김승규의 장남, 유배지에서 사사
김수동: 김승규의 차남, 유배지에서 사사
김말생
김산호: 김말생의 아들
김상충
김득천: 김상충의 아들
김복천: 김상충의 아들
김정
김개질동: 김정의 아들
민보석: 이조판서 민신의 아들
민석이: 이조판서 민신의 아들
박계우: 집현전 한림학사, 1454년 8월 처형
박맹우: 박계우의 형, 귀양후 사사
안완경: 대사헌, 충청도관찰사
원구: 진무, 안평대군 및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친하게 지내다 처형
윤처공: 군기시판사, 안평대군의 일파로서 1453년 10월 11일 처형
윤개동: 윤처공의 아들
윤효동: 윤처공의 아들
이승윤: 우찬성 이양의 아들
이계조: 이승윤의 아들
이소조: 이승윤의 아들
이의산
이우경: 이의산의 아들
이현로: 집현전학사, 안평대군의 대표책사, 1453년 10월 11일 처형
이건금: 이현로의 장남
이건옥: 이현로의 차남
이건철: 이현로의 3남
이경유: 경성도호부사, 구치관에 의해 살해됨
이물금: 이경유의 아들
이한산: 이경유의 서자, 교수형
이보인
이해: 이보인의 아들
이심: 이보인의 아들
이석정: 첨지중추부사, 활의 명인, 안평대군 일파로서 경상도 남해에서 처형
이징옥: 함길도절제사, 김종서의 최측근, 계유정난 이후 수양의 측근 박호문을 죽이고 거병하였다 종성판관 정종에 의해 피살
이성동: 이징옥의 아들(징옥의 형 징석은 죄를 면함)
정효전: 전 병조판서, 삼군도진무사, 계유정난 이후 피를 토하고 분사, 부관참시되고 3족이 멸족됨
정효강: 효전의 동생, 교수형
정원석: 정효전의 아들
정백지: 정효강의 아들, 교수형
조번: 군기시녹사, 안평대군의 일파로서 1453년 10월 10~11일 처형
조수량: 평안도관찰사, 조극관의 동생
조순생: 병조참의, 안평대군 일파로서 1454년 유배지 고성에서 사사
조완규: 김종서의 측근, 1454년 유배지 변군에서 처형
조완주: 조완규의 동생
조완경: 조완규의 사촌동생
황귀존
황계존: 황귀존의 동생
황양존: 황귀존의 동생
황경손: 황귀존의 아들
황양손: 황귀존의 아들
황의헌: 종부시판관, 지안악부사, 안평대군 일파로 간주되어 1454년 처형
황석동: 황의헌의 아들
한명회의 살생부에는 38명이 있었고 이후 1년간 사사,교살 등으로 처형된 사람은 107명
2.제1차 단종복위운동(사육신의 난)
사육신
성삼문: 승지(정3품), 수양대군에 의해 정난공신, 좌익공신이 됐으나 단종 복위를 기도, 1456년 6월 8일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
박팽년: 형조참판(종2품), 단종 복위 기도가 드러나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 끝에 1456년 6월 7일 옥사(자결했다는 설도 있음)
하위지: 예조참판(종2품), 수양의 소시적 친구였으나 단종복위운동 가담, 1456년 6월 8일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
이개: 집현전학사, 직제학, 1456년 6월 8일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
유성원: 집현전학사, 1456년 6월 2일 단종복위운동이 드러나고 성삼문, 박팽년이 추포되자 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유응부: 동지중추원사(종2품), 무인 출신으로 국문과정에서 성삼문의 우유부단함을 비난, 1456년 6월 8일 거열형
김문기: 공조판서(정2품), 1456년 6월 8일 거열형,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사육신에 추가됨
핵심가담자
권자신: 단종의 외삼촌, 계유정난 이후 정난공신 책록되어 동부승지, 호조참판, 예조판서, 1456년 6월 8일 거열형
박쟁: 성승, 유응부와 함께 별운검으로서 수양대군을 베려했으나 실패, 거열형
박중림: 박팽년의 부친, 대사헌, 형조판서 역임, 수양대군으로부터 이조판서 제수받았으나 거부, 1456년 6월 8일 거열형
성승: 무인 출신의 성삼문의 부친, 별운검으로서 수양대군을 베려했으나 실패, 1456년 6월 8일 거열형
송석동: 의정부사인, 첨지중추원사(종2품), 1456년 6월 8일 거열형
윤영손: 병조정랑, 단종복위운동에서 신숙주 제거임무를 맡음, 1456년 6월 8일 거열형
이휘: 참의, 수양대군의 정난공신이었으나 한직으로 내쳐진후 단종복위운동 가담, 1456년 6월 8일 거열형
허조: 거사 발각되자 집에서 자결
기타 연루자
권서: 권자신의 장남
권저: 권자신의 차남
권구지: 권자신의 3남, 교형
박기년: 박중림의 아들
박대년: 박중림의 아들
박영년: 박중림의 아들
박인년: 박중림의 아들
박헌: 박팽년의 장남
박분: 박팽년의 차남
박순: 박팽년의 3남
박녹대: 박팽년의 서자
박개동: 박팽년의 서자
박흔산: 박팽년의 서자
박숭문: 박쟁의 아들
봉여해: 사옹원별좌
봉유: 봉여해의 아들
성삼고: 성삼문의 동생, 거사 직후 집에서 교형
성삼빙: 성삼문의 동생
성삼성: 성삼문의 동생
성맹첨: 성삼문의 장남, 거사 직후 집에서 교형
성맹년: 성삼문의 차남, 집에서 교형
성맹종: 성삼문의 3남
송창: 송석동의 장남
송녕: 송석동의 차남
송안: 송석동의 3남
송태산: 송석동의 아들
심상좌
심신
유귀련: 유성원의 장남, 교형
유송련: 유성원의 차남, 교형
이공회: 이개의 아들
이유기: 이개의 조카
이은산: 이유기의 아들
이의영: 이개의 조카
이지영: 이개의 조카
이사이: 이지영의 아들
이오
이철: 이오의 아들
이호
이성손: 이호의 아들
장귀남
장충: 장귀남의 아들
정관
조청로
조영서: 조청로의 아들
최면
최득지: 전 사헌부감찰
최치지: 최득지의 동생
최사우: 최득지의 아들
하연: 하위지의 장남
하반: 하위지의 차남
허연령: 허조의 아들
황선보
대략 70명 정도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많네요
3.제2차 단종복위운동(금성대군 역모사건)
금성대군 이유: 1457년 9월 단종복위음모가 드러나 10월 하순 사사
화의군 이영: 세종과 영빈강씨의 아들, 금성대군과 친하여 1460년 사사
한남군 이어: 세종의 서자, 혜빈양씨의 장남
영풍군 이선: 혜빈양씨의 차남, 박팽년의 사위
곽조: 해미현감
손서륜: 집현전학사, 단종 양위후 낙향하였다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됨
송현수: 단종의 장인, 수양대군과 친하여 즉위 후에도 돈령부판사 역임, 사육신 거사에도 무사했으나 1457년 교수형
이보흠: 순흥부사, 금성대군과 함께 음모를 꾸미다 추포되어 교형
정종: 문종의 사위, 1461년 처형
기타 출처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35673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3747713
http://www.kfood.net/news/articleView.html?idxno=1618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5660064?sid=102
https://jikimi.cha.go.kr/jikimi/public/bbs/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101&nttId=5756&pageNo=20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