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9618945858
우리는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농업 하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레파토리들이 있다.
'조선 초기부터 지주전호제가 차츰 성장하게 17세기에 이르러 전주전객제를 형해화하고 자리잡았으며, 18세기 이후 서민 출신의 경영형 부농이 출현하였다'
이는 1970년대 이후 오랫동안 자본주의 맹아론의 일환으로서 주장되던 내용이었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증명한 것으로 여겨져 현재까지도 메인 패러다임을 점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부터 이미 학계에서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이영훈의 비판이었지만, 1990년대가 되면 다양한 연구자들이 고문서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에서 분석한 '경영형 부농'으로의 발전도식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자 2000년대가 되면 자본주의 맹아론은 사실상 구석으로 밀려나고, 맹아론 이후의 패러다임을 두고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주로 90년대에 제기되어 21세기를 거쳐 정립되고 있는 차세대 패러다임의 내용을 조악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다.
1. 15세기의 농업경영 - 농장제
여말선초 시기 농업의 주류였던 '농장'은 원 간섭기의 지배층이었다고 알려진 이른바 권문세족들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도 깊게 들어가면 권문이라는 단어와 세족이라는 단어는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이 권문세족들은 고위직을 독점한 지배적 귀족들로서 왕위가 교체될 때마다 왕위 후보 왕자들 중 한명에게 붙고는
만약 본인이 지지한 후보가 왕이 되는데 성공하면 이를 바탕으로 각종 불법적인 토지겸병과 집적을 행해 대농장을 형성하고 경영하게 된다.
이러한 대농장은 공민왕 시기를 지나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조선 건국의 주역들, 공신들이 농장의 주인이었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도식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신들은 건국 이후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받은 공신전(功臣田)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노동력의 원천은 노비와 몰락한 양인 농민이었다.
이들은 농장주가 감독하는 하에 직접 농지를 경작하며 부역을 수행하였고,
그래서 농장의 경영 방식을 흔히 노비에 의한 직영지 중심 경영이 특징이라고들 한다.(참고로 자본주의 맹아론에서는 지주전호제라는 관점 하에 이 농장을 병작제, 즉 소작제 중심의 경영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딱히 근거는 없었다)
물론 그 넓은 농장이 직영지로만 구성된 것은 당연히 아니고, 뒤에서 소개할 '작개' 형태나 병작 형태도 있었고, 사실 비율로만 따지면 직영지 경영이 이루어지던 곳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농장의 중심을 직영지 경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시 농장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2. 16세기 농업 경영 방식의 변화 - 작개제
두 차례의 무인정사, 계유정난 등을 거치며 꾸준히 책봉된 공신은 공신전 분급을 점점 늘림으로서 농장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이러한 추세는 연산군이 쫒겨나고 중종이 책봉된 이후 대규모로 공신이 책봉되면서 이어지게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16세기에 농장 경영이 중요한 전환점에 들어섰다고들 한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계속된 공신전 분급과 공신 수 폭증으로 인해 양인들의 토지가 침탈되면서
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소농민들 가운데 계층분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를 견디며 살아남는데 성공한 농민들을 안정적인 자영농으로서 정착하였던 반면
그렇지 못했던 이들은 토지를 타인에게 판매하고 권세가의 노비로 투탁하거나
혹은 예종 시기 합법화된 소작을 하기도 했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앞에서 15세기의 농장은 노비의 직접경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농장의 규모는 상당했다.
당연히 현실적으로 땅 주인이 일일히 감독하고 감시할 수 없었고
애초에 그 넓은 토지를 경작할 만큼 솔거노비가 많다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양인간의 계층분화가 시작되면서 주인과 함께 살지 않으면서 노비가 된 이들의 수가 늘어났다.
당신이 만약 농장을 경영하는 권세가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16세기의 권세가들이 선택한 것은 노비들에게 직영지 중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었다.
이 직영지들은 대부분 이전에는 경작되지 못하고 방치되던 땅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노비들이 생기면서, 이제 더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토지를 바로 '작개(作介)라고 하는데, 이 토지에서 난 생산물 대부분은 토지 주인이 가져갔다.
하지만 그래서는 이 토지를 경작하는 노비 일가가 살아갈 방법이 없다.
그래서 땅 주인들은 작개를 받은 노비들에게 함께 사경(私耕)이라는 토지를 준다. 이 토지에서는 지대를 수취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변화한 16세기의 농장 경영 형태를 '작개제'라고 한다.
3. 양반 지주층의 농장을 활용한 경제활동
이와 함께, 토지를 보유한 당시의 양반층의 재산 증식 방식 역시 약간의 변화를 맞이한다.
앞서 양인층 내 일부가 몰락하면서 노비로 전락하였다고 한 사실을 기억하는가?
노비의 증가는 권세가들로 하여금 더 많은 토지를 경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에 노비들로부터 수취하는 신공(身貢)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 역시 양반들에게 큰 수입원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양반들이 노비 수를 늘리려는 노력을 하는데
양인 여자나 남자를 강제로 노비로 결혼시킴으로서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드는 방식으로 재산을 증식한 것이다.
물론 노비만 늘어나서는 안된다. 노비가 늘어나는데 경작할 토지가 부족해지면 무용지물이니까.
그래서 이 시기에는 토지 개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불법적인 점탈도 일어났지만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런 식의 농장 확대는 웃긴 말이지만 상업의 발달로도 이어진다.
무슨 말이냐면, 노비 확대와 신공 수취, 작개제 실시 등의 방법을 통해 얻은 잉여생산물을 시장에서 교환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로, 퇴계 이황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경상도 예안현에 살고 있던 이황은,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의령의 농장에서 수취한 쌀을 시장에서 면포와 교환한 뒤 그 면포를 자기 집으로 운송하게 했다.
이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집 근처의 장시에서 물품을 교환하는 것보다 멀리서 교환하는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7세기의 사례긴 하지만, 경상도 영천에 살았던 황익천이라는 양반은
자기 집 근처의 장시에서 소금을 교환했을 때보다 동해 바닷가까지 가서 소금을 교환했을 때 같은 면포 양으로 더 많은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쉽게 말해 시세차익(?)을 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15세기에 태동했던 지방의 장시는
16세기를 거쳐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선조 말기에 이르면 지방 곳곳에 장시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물론 장시가 정말로 전국에 퍼진건 17세기)
4. 작개제에서 병작제로
하지만 이런 작개제도 16세기 후반 이후 서서히 변화를 맞이한다.
지주-소작관계로 이루어진 이른바 '병작제'가 탄생한 것이다.
병작제가 일반화된 시기에 대해서는 16세기 후반설(김건태), 17세기 후반설(이호철), 18세기설(이영훈) 등이 있는데, 그냥 17세기라고 치고 넘어가자.
아무튼 작개제가 병작제로 대체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로, 농지 경영에서 지주가 투입해야 할 자원 양이 비약적으로 줄어든다.
직영지 중심 경영이던 작개제이건 결국 노비라는 신분적 제약을 가진 경작자가 경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작을 위한 농기구나 종자 등은 땅 주인이 대주어야 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경작하고 지대만 일부 바치면 되는 병작제 하에서는, 지주가 이런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다.
두번째로, 노비에게도 병작제가 더 이득이었다.
앞서 작개제에서 작개에서 나온 생산물 대부분을 지주가 가져간다고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이라는 말은 곧 다르게 말하면 정확히 어느정도인지가 규정되어 있지 않단 것이고
이는 곧 수취량을 정하는 것이 지주 마음이었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노비라지만...>
그래서 16세기에는 작개에서의 수취량을 둘러싼 노비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일부 소요사태로 연결되기도 했다.
반면 병작제는 관례적으로 소작료를 50%로 고정하였다.
즉 경작자는 얼만큼을 수취하던 간에 그것의 절반만을 지주에게 내면 되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생산량의 발전으로 인해 병작제로도 안정적으로 수취가 가능했다는 등의 장점도 있었지만, 아무튼 17세기를 거쳐 병작제가 정착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농지 경영 형태가 병작제로 변하면서, 양반들의 경제활동 양상도 변화를 맞이했다.
양난 이후 황폐화된 토지가 늘어나면서 얼마 동안은 토지 개간을 통한 농지 집적을 실현할 수 있었지만
17세기 중반이 되자 대부분의 토지가 개간되면서 더이상 개간될 토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세기 후반이 되면 토지 구입이 토지 확대를 위한 보편적인 방법으로 자리잡는다.
그런데, 개간과 달리 토지를 구매하기 위해선 재원이 필요하다. 양반들은 이 재원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첫번째로, 선물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벌열가에서 자주 사용한 방법인데,
지위가 높을수록 들어오는 선물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토지 구매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평범한 양반들에게 선물이란 진짜 생필품만 간신히 충당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방법, 상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18세기의 지식인 박지원이 저술한 허생전의 영향으로
양반들은 경제활동에 나서지 않은 무능한 이들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지방 양반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건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서이건
경제활동에 나서야 했다.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시로 17세기 후반의 남인계 관료 이담명이라는 양반을 들 수 있다.
이담명의 아버지인 이원정은 이조판서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예송논쟁에 연루되어 유배지로 가던 중 병사한다.
이담명은 이후 정치 상황에 따라 환국이 일어날 때마다 관직을 얻었다가 쫒겨났다가를 반복하는 부침 많은 삶을 사는데,
이중 1683년 관직에 진출해 있을때 자기 집 노비들을 통해 낙동강 수운을 따라 염상, 즉 소금 교역에 뛰어들었다.
그는 김해와 안동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3년여간 쌀 130석을 투입해 소금 도소매에 나섰고, 매년 투자량의 5~6배라는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이후 이 수익의 대부분은 농지 구입에 투자되는데, 이는 이원정-이담명 일가의 구매한 농지 면적이 1690년대 동안 이전 시기의 4배 이상 뛰어올랐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를 통해 이원정-이담명 일가는 정치적 부침을 극복하고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18세기의 사회변화
17세기의 이러한 변화는 18세기로 이어져 매우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전까지의 농지 경영은 농지가 뭉쳐있지 않고 이곳저곳에 산개되어 있었다.
앞에서 이황의 사례로 알 수 있듯이 먼 지역에서는 지대의 수취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취하였다 한들 운송하는 것이 문제였다.
유통망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 분할균분상속 관행까지 겹쳐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앞서 살펴본 이담명 일가의 사례로 이를 알아보자
1701년 이담명이 죽었을 때, 그가 보유한 토지는 무려 1494마지기에 달했다. 평수로 전환하면 최소 30만평 이상의 엄청난 규모의 토지다.
그런데 이담명이 죽은 이후 그의 자식들에게 재산이 상속되었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담명의 장자는 토지를 322 마지기를 상속받았고, 이담명의 장녀는 367 마지기를 상속받아 장자보다도 더 많은 땅을 상속받았다. 이담명의 차자 가족들은 255 마지기를 상속받았다.
즉 1500마지기에 달했던 엄청난 토지가 상속되자 1인당 약 300마지기 정도에 불과해진 것이다.
이담명은 토지가 많은 대지주였으니 상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양반이 이렇게 토지가 많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즉 토지의 균분상속은 많은 양반가에서 실질적인 생계의 문제를 낳았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양반들은 몇가지 전략을 구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딸의 상속권을 제외하고, 장자에게 더 많은 땅을 상속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토지 규모의 영세화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종가형 지주'이다. 자신이 보유한 토지의 대부분을 종가의 땅으로 돌려놓고 이를 종가 구성원들이 공동관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략을 모든 양반들이 구사한 것은 아니어서,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담명처럼 전통적인 방식대로 상속하는 양반들이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상속받은 젊은 양반들은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선대와는 다른 농업경영을 행한다.
6. 집약적 농업의 탄생
앞서 이담명의 차자 가족들이 255 마지기를 상속받았다고 한 것을 기억하는가?
사실 이담명의 차자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실제로 상속받은 것은 그 아들인 이유중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사는 동안 필사적으로 재산을 증식하였고, 그 결과 1740년대가 되자 465 마지기로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렇게 보면 조부와 다를바 없는 인생역전 이야기로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담명이 소유했던 전답은 경상도 서부 뿐 아니라 경상도 북부는 물론이고 충청도에 심지어 경기도에도 산재해 있었다.
반면 이유중은 고향인 칠곡과 주변 지역에서만 땅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칠곡의 토지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즉 이전의 산개된 토지소유 방식을 극복하고, 자기 집을 중심으로 한 집약적 토지소유를 실천한 것이다.
18세기 이후 경향분기가 더더욱 심화되면서, 지방 사족들의 대부분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거나 나아가더라도 만족스러운 성취를 거두지는 못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지방 양반들은 아예 잔반으로 몰락하거나, 종가를 중심으로 결속해야 했다.
앞서 말한 종가형 지주에 더해, 이유중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집약적 토지소유가 바로 이 시대 양반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계속해서 말하듯 토지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운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토지를 집약시킨 것이다.
<이앙법은 집약적 농업에 친화적이다>
게다가 이앙법의 보급과 시비법의 혁신 등의 농법의 발달이 이루어진 것은 집약적 농업의 발전을 추동했다.
한군데에 집중된 토지에서 이앙법 등을 이용해 소품종 다량생산을 한 결과, 조선 농업은 어느 정도 황금기라고 불릴만한 번영기를 맞이했다.
또한 이는 상품작물의 재배와 시장의 성장으로도 연결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의 맹아를 제공했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7. 마치며
지금까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조선 농업 경영방식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원래라면 이앙법 같은 농법의 혁신도 더 자세히 다루어야 하지만, 그런것까지 다루기에는 내가 배운게 적어서 어쩔 수 없이 농업 경영방식의 변화만을 위주로 다뤄보았다.
이 글에서는 19세기를 다루지 않았는데, 19세기에 대한 해석이 연구자마다 워낙 갈리고 논란의 여지가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뺄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결국 이 글을 거칠게 요약하면 15세기 농장제 -> 16세기 작개제 -> 17세기 이후 병작제라는 도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에서는 지주전호제라는 틀에 따라 농장제에서 병작제까지 지주-소작 관계의 일관적인 발전이라고 보았지만 90년대 이후 이러한 틀이 사실상 해체되었고 새로운 틀들로 대체되는 중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자맹론보다는 이 새로운 틀이 조선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조선 후기의 문중이나 집성촌 성립, 장자 중심 상속제도(가부장제)의 성립 등을 이해하기에 자맹론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참고자료>
이호철 ( Ho Chol Lee ). "농장제에서 병작제로의 이행 - 조선시대 농업생산관계론의 재검토 -." 농업경제연구 38.2 (1997): 157-186.
김건태. "17~18世紀 兩班地主層의 土地所有樣相." 成大史林 12-13.- (1997): 233-250.
김건태. "16세기 양반가의 '작개제'." 역사와 현실 -.9 (1993): 205-241.
김건태. "16세기 양반지주층의 경제활동." 역사와 현실 -.16 (1995): 133-154.
우리역사넷
김건태(Kim Kuen Tae). "17~18세기 田畓소유규모의 영세화와 양반층의 대응." 한국사학보 -.9 (2000): 57-96.
기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