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cosmopolitan.co.kr/article/84567
배우 김용림
Q. 연기라는 게 정답이 있는 분야도 아니고, 끊임없이 나를 채우고 또 쏟아내야 하는 일이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꾸준히 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
일단 내가 연기를 좋아해요. 좋아하지 않는 일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배역을 맡으면 희열을 느끼거든요. 내 표현력으로 내가 아닌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얼마나 재밌어요. 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요. 잘하고 싶은 욕심도 강했어요. 내 배역을 최대한 잘 표현해서 감독님과 작가님에게 칭찬받아야 한다는 욕심. 한 작품을 할 땐 오직 거기에만 몰두했죠. 2가지를 동시에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드라마 할 땐 드라마만, 연극 할 땐 연극만! ‘이런 역할은 하기 싫고 저런 역할 하고 싶다’ 같은 생각도 안 했어요. 오로지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역할에 집중하는 것. 그게 쌓였을 뿐인데 어느덧 60년이 넘은 거예요.
Q. ‘오로지 내 앞에 주어진 것에 집중했다.’ 멋지네요.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요. 뭐든지 내 맘에 안 들면 못 견뎌서 스스로를 들볶으니 피곤하죠.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했던 거야. 무엇을 하든 1등을 해야 하는 성격을 타고났기도 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직업이었거든요. 그러니 책임지고 잘 살아야죠.
Q. 배우 김용림에게 일이란?
나의 삶. 물레방아처럼 쉬지 않았죠. 그렇다고 쉬어봤으면 좋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여자, 작품을 해야 하는 여자… 이 나이에도 일하는 게 그냥 감사하죠.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Q. 선생님의 연혁을 보다가, 결혼 후 일을 시작했다는 게 놀라웠어요. 어떻게 그 시절에 결혼을 하고도 일을 할 수 있었나요?
제가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어머니가 아주 잘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뭔가 해낼 인물을 만들어야겠단 의지가 느껴졌죠. 그런데 그 시대 여자들에게 결혼이란 사회 활동과는 담을 쌓는 거잖아요. 시집살이만 하다 보니 어느 날,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걸 느꼈어요. 저는 책과 영화를 좋아해서 현재 내가 속한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답답하고 괴로웠죠.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우리 엄마는 날 그렇게 안 키웠는데? 뭔가는 돼야 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합법적으로 결혼 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게 패션이었어요. 디자이너라는 명칭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을 때였지만 목표가 생겼죠. ‘한국 여성으로서 디자이너의 세계를 만들어보자,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으로 뛰쳐나가보리라.’
Q. 인생에서 가장 용감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결혼이지, 뭐. 그건 정말 도전이잖아요!(웃음)
Q. 한국인 최초 파리 프레타포르테 진출이라든지 일하면서 했던 도전보다 결혼이 더 큰 도전인 거예요?(웃음)
그럼요! 왜 결혼을 했을까….(웃음) 그래도 그 덕분에 오늘의 진태옥이 있는 거죠. 일하면서 생긴 사건 중엔 역시 첫 파리 컬렉션이에요. 뭘 모르면 용감하잖아요. 저랑 악수하려고 기다렸다는 수지 멘키스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도 몰랐고. 그리고 바이어가 60번까지 뽑은 디자이너 명단을 보니 겐조가 59번, 제가 54번이더라고요. 첫 성과가 그렇게 나타나니 농담으로 “에이, 파리 애들 별거 아니네!” 하기도 했어요.(웃음)
보디빌더 임종소
Q. 70대에 웨이트를 시작해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고, 영어를 못해도 자격증 공부를 하고, 혼자 댄스 학원 문을 두드리는 등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이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됐나요?
무언가 도전할 게 생기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같은 인간인데, 누구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내가 바보야?’(웃음) 여자라고 못 할 것도 없고 나이 많은 것도 상관없는 거예요, 뭐든. 근데 저도 예전엔 도전 정신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어요.
Q. 어떻게 스스로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나요?
제가 24살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아주 가부장적이고 강한 성격이었어요. 저도 대단한 성질을 가진 사람인데, 남편에게 맞서면 싸워야 하고, 싸우다 보면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이혼을 하게 될 것 같고…. 근데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 하라는 대로 할게요”하고 살면 별문제가 없었죠. 그러니 그렇게 마음먹고 45년을 살았어요. 남편하고 자식만 알고 살았지, 나는 없었어. 임종소란 사람은 없었어. 그러다 남편 떠나고 혼자 되고 보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되더라고요. 그러다 허리 협착 때문에 웨이트를 시작했고,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고, 외신이랑 방송에도 나오고…. 그러면서 깨달았죠. ‘아, 이게 나였구나. 내가 이렇게나 도전 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갇혀 살았구나.’
Q. 비록 65세까지는 갇혀 살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나’로서 살고 있잖아요. 여자 임종소의 삶을 돌아보자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인생은 살고 볼 일이다’…. 남편이 떠났을 땐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그 두 길밖에 안 보였어요. 난 전업주부였는데, IMF 때문에 갖고 있던 건물도 팔았고, 아들 사업도 무너진 상황이라 더 막막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방송에도 나가고 모델로도 활동하는 인생을 살 줄 생각이나 해봤겠어요?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러니 어디 한번 가보자!’ 하며 인생을 살게 됐죠.
시인 신달자
Q. 등단하고 60년이 흘렀어요. 24년 동안 남편을 수발하고 아이 셋과 손자들까지 키우면서도 시를 꾸준히 썼는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글을 쉬지 않고 써왔다는 게 놀랍습니다.
남편 병수발로 중환자실에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제게 전화를 했어요. 그땐 중환자실에 전화를 잘 안 바꿔줬는데 직원이 다급히 찾더군요. 제 어머니가 “딸 음성만 듣고 죽게 해달라”고 했대요. 그땐 저도 가슴이 터질 것같이 힘들어서 전화를 받자마자 “왜!” 하고 화를 냈죠. 근데 엄마는 아주 낮고 힘겨운 목소리로 “그래도… 니는 꼭 될 기다”라는 말만 하시고, 얼마 후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 한마디를 지팡이로 삼고 인생을 살았어요…. 누구나 인생에 어려움이 와요. 그런데 그걸 타개하는 데는 꼭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곳이 저기 있으니 이 어려움이라는 강을 어떻게든 건너가야 한다는, 발이 아파 걸어서 못 가면 온몸으로 굴러서라도 저 너머에 가야 한다는 야망과 인내심과 의지요.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부터 시집 잘 가야 한다는 말 같은 건 안 하셨어요. 공부 잘해야 한다, 사회에 필요한 인물이 되라고만 했죠. 제겐 늘 세상에 나가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욕망이 있었어요. 엄마의 마지막 한마디가 그 욕망에 불을 붙였고요. 이런저런 상황으로 생긴 상처를 오히려 횃불로 삼고 ‘우리 엄마가 가라고 한 곳이 저기 있다’며 기를 쓰고 어려움이란 강을 건넌 겁니다.
Q. 여성 신달자의 삶은 어땠나요?
계집애, 딸, 여학생, 엄마, 할머니 등 어떤 명칭으로 한정되지 않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내 이름으로서 살았다는 건 굉장히 많은 고충을 지고 왔다는 거죠. 여자가 한 인간으로 서는 데는 남자보다 훨씬 높고 단단한 기반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해내는 여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온 겁니다. 옛날부터 한국엔 훌륭한 여자들이 많았어요. 일례로, 미스코리아도 하고 빼어나게 예뻤던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서울의 한 은행에 취직했는데 업무가 뭐였는지 알아요? 은행 가운데 금빛으로 칠한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거예요. 걔를 구경하러 온 남자들이 은행 상품을 이용하도록. 어느 날 아줌마들이 그 앞에서 “여자는 꽃이 아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어요. 그랬더니 다음 날부터 친구가 그 의자가 아니라 창구에 앉아 여느 은행원처럼 일을 하더라고요. 이게 1965년이에요.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날의 시위처럼 여성들이 어디선가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며 사회를 변화시켰으니 오늘날만큼이라도 남녀평등이 이뤄진 거예요. 신문에 이름이 나야지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 옛날 평범한 여자들이 돌을 날랐던 덕분에 전쟁도 이기고 행주치마란 말도 생긴 거 알죠? 전 여성들에게 강의할 때 꼭 말합니다. 여성들이 세상을 바꾼다고요.
Q. 여성에게 3계명을 남긴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어머님이 선생님에게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행복한 여자가 돼라”라고 3가지 전언을 남겼던 것처럼.
첫째, 인간관계를 잘 맺어라. 산다는 건 손을 잡는 일이에요. 더 중요한 건 그 손의 온기를 잊지 않는 것이고요. 그러니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사람을 수용하는 삶을 사세요. 상황과 상대에 맞춰 빨간 사람도, 노란 사람도 될 줄 아는 것 또한 굉장한 능력이에요. 둘째, 외국어를 2개 정도는 공부해라. 우주는 하나니까요. 셋째, 세상이 달라지건 안 달라지건 확실한 자기주장이 있을 것. 옳다고 생각하는 거나 지켜야 하는 목표는 꼭 있어야 합니다.
산악등반가 송귀화
Q. 싱글인 덕분에 산은 맘껏 다녔지만 혹시 결혼을 안 한 게 아쉬울 땐 없었나요?
전 지금이 제일 편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고. 오히려 누가 옆에 있으면 진짜 귀찮을 것 같아. 누굴 끼고 살 성격은 아닌가 봐요.(웃음) 이젠 일상 루틴이 생겨서 심심할 시간도 없어요. 오전엔 등산하고, 오후엔 헬스장 가고, 헬스 끝나면 목욕하고 올라와서 TV도 보고 할 일 해야죠. 이렇게 사는 게 제 행복이에요.
Q. 멋지네요. 많은 여성이 롤모델로 삼을 법해요.
저는 젊을 때 집에서 벗어날 생각만 했어요. 막내라 오빠 밑에서 농사를 도와야 했거든요. 그땐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있으면 서독을 가던 시절이라 어렵게 자격증을 땄는데, 따고 나니 그 길이 막힌 거예요. 그래서 집에서 일만 하다가 서른 살 무렵 그 자격증 덕분에 보건소에 취직했고, 그 덕분에 이렇게 산에 다닐 돈도 모은 거죠. 그러니까 뭐든지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하는 거야.
Q. 그 시절에 자립을 고민한 게 신기해요. 태어난 환경과 처지를 당연히 받아들이던 시절이잖아요.
언제까지나 집에서 농사일만 하고 싶진 않았어요. 내 것도 아닌데! 오빠한테 돈 타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웃음)
Q. 요즘 여자들 중엔 선생님처럼 비혼으로 살면서 하고 싶은 것 하고,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지키고, 내가 즐거운 하루하루를 사는 게 꿈인 사람도 많아요.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찾고, 그걸 재밌어 하면서 열심히 하면 원하는 게 다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대신 억지로 하려고 해선 안 돼요.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걸 꾸준히 계속하면 뭐든지 못 할 게 없어요.
문제시 수정!
(인터뷰가 너무 길어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부분만 추려왔어! 여전히 자기만의 길을 걷는 할머니들이라는 것도 멋있는데 한분한분 다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너무 좋다ㅠㅠ 갑자기 삶의 의욕 생김 … 출처 링크 들어가서 다 읽어보길 추천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