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9860304377
* 글의 장대함 때문에 3부작이 될 예정.
0. 들어가며
[ 유럽이 한 때 식민지, 속국화, 영향권에 넣었던 모든 지역들 ]
"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재해의 최고봉이라 할만하다 "
조지 케넌이 한 유명한 말로 로마와 프랑크 왕국 기반의 서구 문명이 르네상스, 계몽주의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천년간 발전해 전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가장 부강한 문명이 되었으나 1차세계대전으로 쇠락을 시작.
과장이 아니라 군사, 경제, 정치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서구가 지배하지 않은 영역은 없었음. 그리고 20세기 초 벨 에포크로 서구는 끝없는 번영과 발전을 이룰것처럼만 보였고.
[ 유럽내 시대별 전투가 일어난 곳들: 점 하나 하나가 전부 전투 ]
그 이전에도 수많은 전쟁이 있었으나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등 강대국들의 전쟁 규모는 1차대전만큼 크지 않아 상흔을 극복하고 더 부유해지고, 더 발전했음.
그러나 그토록 혁신적이고 활기차던 세계의 중심이던 유럽은 그렇게 발전된 기술과 제도와 산업으로 유럽의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4년간의 총력전을 벌임.
표면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부부가 암살당한것이 원인이나 더 근본적 원인들은 이미 쌓여가고 있었음. 그저 촉발한 조그만 트리거가 암살 사건으로 근본 원인을 알려면 1차대전으로부터 약 50년전으로 가야됨.
1. 독일 통일
1860년대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제 개혁을 위한 예산을 집행. 비스마르크 젊을적 프로이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등과 비교해 5대 열강 최약체였고 이 군대는 그 현상을 타파하기 위함.
특히 프로이센은 하드 파워의 부족 문제로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거의 멸망 위기에 처했고 나폴레옹 전후 처리인 빈 회의에선 작센 합병이 저지되었음.
그리고 1850년 올뮈츠 협약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이 독일계 국가들의 수장이 되는걸 포기하게끔 강요했으며 1859년 2차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영향을 끼치는것은 군대 동원 역량 문제로 실패.
이런 여러 경험을 듣고 본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혁명과 1848년 혁명 이후 무르익은 민족감정을 이용한 통일 독일의 완성을 다시 한번 하드 파워 부족으로 좌절되긴 싫었음.
그래서 1862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의회 (Landtag) 에 가서 그 유명한 연설을 함. " 1848-1849년처럼 연설과 다수결이 아니라 강철과 피가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것이다 " 라고.
이것을 증명할 기회는 얼마 안가 찾아옴. 1864년 덴마크는 슐레스비히를 덴마크령에 완전 편입시키려했던것. 덴마크가 실질적 지배를 함에도 불구, 슐레스비히는 독일 연방에 속하며 독일계 공작이 여전히 클레임을 갖고 있었음.
그리고 이는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고 덴마크 군대를 철저히 격파 후 유틀란트 반도를 점령하며 군제 개혁을 통한 성과를 입증.
그 다음 총구는 오스트리아로 돌리기 시작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이래 수백년간 독일계 국가들 위에서 상전으로 군림해왔음.
그러나 1866년 프로이센 군대는 고작 7주란 짧은 시간만에 그래도 나름 강대국이자 중유럽의 패자이던 오스트리아마저 굴복시키는데 성공.
그 결과 북독일 전체를 프로이센으로 흡수. 이제 북독일을 정리한 비스마르크는 남독일도 정리하려 드는데 남독일은 작센처럼 작지도 않고 가톨릭이라 개신교 프로이센 주도 통합을 크게 반기지 않았음.
그래서 비스바르크가 이용한것은 외부의 적. 바로 수백년 유럽 최강 육군이였던 프랑스. 프랑스는 갑작스러운 프로이센의 약진에 경계했는데 특히 호엔촐레른 가문이 스페인 왕이 되는건 옛 카를 5세란 악몽의 재림.
이 과정에서 프랑스 대사와 프로이센 왕의 접견 과정에서 마치 프로이센 왕이 프랑스를 모욕한듯한 뉘앙스로 전보를 수정했고 프랑스 여론은 전쟁을 요구. 그 반응으로 프로이센도 전쟁을 요구.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그토록 원하던 프랑스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한 달 조금 지나 프로이센은 프랑스 육군을 격파.
프랑스가 가해자라고 생각했던 남독일 국가들 또한 프로이센의 승리를 베르사유 궁전에서 축복하며 독일은 통일. 추후 해묵은 앙금이 되는 알자스-로렌 또한 독일에 합병됨.
그야말로 유럽의 격변. 루이 14세 이래 프랑스는 수백년간 유럽 대륙 최강국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프랑스가 한 때 최약체인 프로이센에게 그리 허무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유럽 기존 엘리트들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옴.
이런 충격은 유럽 대륙에만 국한된게 아니었는데 당대 최강국 영국 총리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 독일 통일은 프랑스 대혁명보다 거대한 사건이다. 유럽 힘의 균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 라고 할 정도.
2. 3제동맹 파열
[ 프랑스 포위망 ]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순식간에 일약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르면 주변 강대국들이 위협으로 여기고 견제할걸 잘 알았음.
특히 최강 지위를 잃고 복수의 칼날을 가던 프랑스가 문제였는데 1:1 로야 문제없이 격파 가능하나 러시아나 여타 강대국과 동맹을 맺고 덤비면 이길지 불확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공화국이 된 프랑스와 달리 황제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뭉치는 3제동맹을 결성.
그러나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맹 구원의 의무가 없었고 그저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선에서 그쳤음.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을 포위하지 못하는 상황만 만들면 되었기에 만족.
이 3제동맹을 위해서 비스마르크는 1863년 러시아의 폴란드 독립 운동 진압을 막는걸 지지했고 크림전쟁 이후 흑해에 러시아 해군이 못나가는 조항 폐기도 지지.
오스트리아에게는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 영토를 합병하지 않고 오스트리아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지 않기 위해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행진 하는것도 금했음.
하지만 이 3제동맹은 근본적으로 서로 형편 좋을때 모이는 적당한 친우 관계로 그 결속력이 약했다는 문제가 존재.
반면 프랑스는 전쟁 배상금을 3년만에 전부 갚고 프랑스군에 대한 대대적 개혁과 함께 알자스 로렌을 되찾기 위해 급속한 재무장을 시작.
독일은 이를 두려워했고 이를 보여주듯 독일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언론사에서 "Ist Krieg in Sicht? " 즉 전쟁이 곧임박했는가 사설을 쓸 정도.
[ 프랑스-오스만 동맹 ]
유럽 각국들이 보기에 독일은 이런 프랑스의 복수를 막기 위해 선제 타격을 할 것만 같았고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에 그런 행위에 대해 미리 경고.
사실 비스마르크 그 자신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었으나 독일이 주변국은 물론 나름 동맹이라는 러시아에게조차 어떻게 비춰졌는지 잘 보여주는 사실.
더해 비스마르크 그 자신은 프랑스가 공화국이기만 하면 군주정 국가들은 다른 체제라 프랑스랑 친해질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으나 유럽 역사에서 보듯 국익에 따라 체제는 물론이고 종교마저 뛰어넘은 동맹은 존재했음.
게다가 삼제동맹을 이루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등 동맹국은 처음부터 균열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크림 전쟁때 전쟁 직전까지 갔음은 물론이고 발칸반도 영향력을 두고 다투는 사이.
이는 오스만 제국 처분에 대한 동방문제 ( la question d'Orient ) 에서 두드러짐. 러시아는 정교회의 성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진출할려했고 제 2차 동방전쟁에서 그 결실을 맺음.
산 스테파노 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 있는 불가리아등 발칸 국가들이 독립하며 사실상 콘스탄티노플 코 앞까지 닿는 상황.
[ 산 스테파노 조약 vs 베를린 회의 판도 ]
이런 러시아 세력의 증가는 마찬가지로 발칸반도를 안전한 후방으로 두고 싶어했던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 입장에서 경악할 사안.
그리고 베를린 회의에서 비스마르크는 중재자를 자처하며 러시아가 얻은 결과물을 축소해 오스만 제국의 붕괴를 막았음.
그 대가로 3제동맹의 균열은 가속화. 1879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공식 동맹을 맺어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면 구원해준다고 함.
비록 비스마르크의 속내는 오스트리아의 발칸 진출을 막고 러시아와 협상 보라며 뒷배를 서준것이었다만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에 대한 적대동맹으로 보일 가능성이 더 높았음.
이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프랑스란 대안 찾기도 막고 당장 러시아의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3제 동맹 붕괴도 하지 않는 결정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양국 모두 파멸로 이끔.
왜냐면 비스마르크가 가장 두려워했던것은 프랑스-러시아 양면 전선이었고 오스트리아는 이걸 커버해주기엔 너무나 노쇠했음.
3. 노쇠한 제국
수백년간 프랑스와 유럽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오스트리아는 19세기 들어 힘에 부치는게 눈에 띄기 시작했음.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대패해 중유럽 패권을 잃기 몇년전 1859년 아직 지역 강국에 불과했던 샤르데나 피에몬테에게 솔페리노 전투 패배.
이어 연거푸 패배하며 롬바르디아와 베니스를 내줬는데 이는 프랑스의 지원이 있었다해도 오스트리아가 이전만큼 못하다는걸 시사.
그리고 남은건 국민국가로 진화한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노쇠한 다민족 제국으로 어떤 단일 민족도 압도적 다수가 아니였고 이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던 당대 유럽에 취약점으로 작용.
특히 헝가리가 사실상 자치화 하면서 문제가 되었는데 헝가리는 오스트리아가 다시 지배권을 행사할까 두려워해 국방비 증가를 제한해 19세기 후반경 독일과 프랑스 대비 절반이나 3분의 1수준에 불과.
이는 약한 제조업과 함께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타 열강 대비 군사력 열세에 처하는 주요 원인이 됨.
그럼에도 이렇게 쇠락하는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황제 프란츠는 열심히 행정가로서 매일 새벽 4시마다 일어나 일했음.
아내가 아나키스트에 암살당하고, 아들은 30대 초에 요절했으며, 형제는 멕시코에서 처형당하고 마지막으로 귀여워하던 여조카마저 불타죽은 불운한 개인사를 겪고도.
그러나 개인의 힘 심지어 그것이 유럽에서 가장 유서깊은 가문일지라도 국력의 변화에 따른 대세를 뒤집을수 없었음. 1880년경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독일내 영향력을 상실.
[ 슬라브 계열 국가들 ]
프로이센 치하 통일된 독일이 유럽 최강국으로 등극했으며 동으로는 거대한 러시아가 있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가 확장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동남쪽 발칸반도.
서구 열강들 입장에서 오스트리아가 쇠락하는 제국이라면 오스만은 산소호흡기를 대고 있는 중환자였기에.
그래서 오스만의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오는거까진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문제는 발칸반도는 슬라브-정교회였고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밀고 있었다는 점.
그럼에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해외 식민지도 그렇다고 그 이외 유럽대륙도 선택지가 없었기에 경제 조건 개선이랑 명분하에 타 열강들의 동의아래 1878년 보스니아를 합병.
이는 안 그래도 복잡한 오스트리아의 민족 문제에 더 많은 문제를 얹는 일이 되었음. 특히 19세기 말엽 발칸 민족주의가 더 강렬해지던 시점에.
사소한 사실 같아보이나 중요했는데 세르비아 왕가는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실 친 오스트리아였음. 오스트리아에게 세르비아 합병 제안을 했을만큼.
그러나 세르비아 군부 특히 젊은 장교들은 국수주의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고 세르비아 왕실이 오스트리아에 굽신거리는 꼴을 봐줄수 없었음.
그 결과 젊은 장교들이 뭉쳐 백주 대낮 세르비아 왕궁 한 복판에서 세르비아 왕과 왕비를 그야말로 도살해버렸고 대체로 세워진 세르비아 왕실은 카라돌제빅 왕가로 강경한 반 오스트리아 외교노선.
그 와중 세르비아 군부 일부는 세르비아 확장 계획으로 세르비아인 분포 지역을 모두 정복한다는 60년전 계획인 Načertanije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 보스니아를 잠재적 흡수 목표로 거론.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벗어나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에게 자본을 융통함은 물론 불가리아와 관세 동맹을 맺기 시작.
과거 종속국이 독자 행보를 보이자 분노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인 돼지고기에 관세를 매기며 무역전쟁을 5년 이어갔으나 세르비아는 굴복을 거부.
[ 세르비아 수출 다변화 ]
오히려 독일, 프랑스, 러시아등 타 유럽 열강들에 팔아먹으며 안 그래도 없던 오스트리아의 레버리지를 무력화해버림. 이러는 과정에서 다른 발칸 국가들처럼 친러 성향은 강화.
사실 발칸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은 아니었지만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위신을 지키지 못하면 타 열강에게 무시당했음.
그렇기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둘 다 물러설수 없었고 특히 발칸은 오스트리아에게 마지막 자존심이었기에 비스마르크 같은 노련한 외교관도 해결할수 없는 문제. 그리고 비스마르크 체제가 끝나가며 일은 더 꼬이기 시작.
4. 비스마르크 사퇴
이미 균열이 나기 시작했던 삼제동맹을 땜빵하기 위해 비스마르크는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동맹을 맺고 러시아와는 1887년 재보장 조약 ( Rückversicherungsvertrag ) 을 맺음.
이 조약의 핵심은 프랑스랑 독일이 전쟁할때 러시아가 뒷치기 하지 말며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공격하면 독일은 중립을 지킬것.
문제는 이중 상당수 조항이 소수 담당자만 아는 비공개였다는것. 당연하게도 오스트리아랑 이미 정식 동맹을 맺은 상황에서 배신하는것이며 비스마르크 구상은 와해되기 때문.
즉 비스마르크는 자신조차 어려워하던 외교의 곡예를 하고 있었고 이는 후임들이 감당하기 더더욱 어려운것으로 그 때는 오고 있었음.
비스마르크가 이렇게까지 독일 외교 전권을 쥐고 흔들수 있었던건 빌헬름 1세의 절대적 신임이 있었기 때문.
비록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밀실 외교에 대해 명예롭지 못하다 생각했으나 비스마르크에 국정을 의존한만큼 어느정도 다 넘어갔음.
그러나 빌헬름 1세는 90세에 사망했는데 너무 장수. 그래서 독일을 바꿨을 가능성도 존재했던 자유주의자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시점에 50대이자 애연가였기에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사망.
그리고 그의 장남인 빌헬름 2세가 취임.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 장녀인 어머니의 자유주의적 교육에 반항 심리로 오히려 군국주의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됨.
이런 관점과 함께 빌헬름은 유럽 최강국의 황제로 등극. 비스마르크가 처음에 프로이센적인 그를 아버지 프리드리히보다 좋아했던것과 달리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독일 국정을 장악한것을 못마땅했음.
그리고 군부 또한 황제가 권력을 비스마르크에게서 가져오라고 독려. 안그래도 비스마르크식 외교에 불만이 많았던 빌헬름은 이를 시행함.
비스마르크식 외교가 독일 성장에 가장 중요한 유럽의 평온을 가져다줘도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영토 팽창이나 패권 행사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그걸 의식해 비스마르크도 체면치레용 식민지를 먹었으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대비 너무나 적었고 독일 국력이 이미 프랑스를 아득히 능가하던 시점에서 빌헬름과 상당수 독일인에겐 마땅히 가져야할 보상이 없어보였음.
[ 석탄 및 철강 생산량에서 영국을 추월한 독일과 미국 ]
비스마르크는 현재 본토를 지키기 적절한 국경과 그 본토에서 육성되고 성장하는 산업이야말로 독일의 진짜 국력이고 영토팽창은 이를 망칠거라 항변했으나 빌헬름등에게는 큰 설득력이 없었고.
그 산업력에서 프랑스는 물론, 당대 세계 최강국인 영국마저 능가한 독일이 대체 왜 다른 열강들 눈치나 보며 살아야하는지 의아했다는것.
빌헬름뿐 아니라 많은 독일인들이 독일은 유럽을 지배할 패권국이자 영국, 프랑스와 같은 거대 식민제국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
[ 1890년 망명가있던 독일 사회주의 인사들 복귀를 축하하는 포스터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때가 오는데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자법 갱신건. 특히 자국 추방 관련 조항으로 빌헬름과 충돌.
빌헬름은 자국 추방까진 너무 지나치고 내전으로 비화될수 있다며 제외하자고 했고 사회주의를 아예 혐오하다시피한 비스마르크는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한다 했음.
비스마르크는 지난 수십년간 군주의 지지 아래 마땅한 거대 지지 정당 없이 정책을 지지하는 의원들을 규합해 제국의회 (Reichstag)에서 입법하는 스타일이었던지라 이는 치명적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사퇴 선언.
사퇴후 빌헬름과 일부 군부 및 정치인 노선을 보고 '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고 20년후 예나 전투로 프로이센이 멸망할뻔 했는데 이렇게 가면 내가 죽고 20년후 독일제국도 그 꼴에 직면할거다 ' 라고 했고 비스마르크는 1898년 사망.
빌헬름은 실제 그 말대로 비스마르크의 노선과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유럽 최강 산업대국 독일 외교 노선의 변화는 서유럽 더 나아가 서유럽이 지배하던 지구란 행성을 뒤흔들기 시작.
2부로 이어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역사적 이유 (2) ...jpg
댓펌)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고 20년후 예나 전투로 프로이센이 멸망할뻔 했는데 이렇게 가면 내가 죽고 20년후 독일제국도 그 꼴에 직면할거다 ' 라고 했고 비스마르크는 1898년 사망.
>> 비스마르크가 죽고 20년 후인 1918년에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 독일 11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전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