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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 역사상 최초 평화 조약 ]
국력 서열이 기록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건 문자가 국가 권력과 결합할 때. 이때부터 왕들은 이런 걸 남김.
" 내가 누구를 정복했다 "
" 누가 나에게 조공을 바쳤다 "
" 어느 왕이 내 아래에 있다 "
" 어느 도시를 파괴했다 "
" 어느 신이 내 왕권을 승인했다 "
다만 이 시기 기록은 왕의 선전문이 많아서 과장이 큼. 그래도 여러 국가의 비문, 서신, 조약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 국력서열이 드러남.
[ 아마르나 서한 ]
고대 후기부터는 권력서열이 훨씬 잘 보이는데 예를 들어 아마르나 서한, 이집트-히타이트 조약, 로마 속국 기록, 페르시아의 사트라피 행정 기록등. 이런 것들은 단순 영웅담보다 훨씬 구체적.
이때부터는 "누가 누구에게 사신을 보냈는가", "누가 조공을 냈는가", "누가 왕위를 승인했는가", "누가 병력을 제공했는가" 같은 기록으로 국력서열을 볼 수 있음.
2. 중세
중세 유럽도 국가간 권력 서열 기록은 존재. 왕실 칙령, 교황 문서, 봉신 서약, 혼인 계약, 도시 헌장, 수도원 연대기 등을 통해 엿볼수 있음.
현대 외교문서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음. 기록이 지역별로 불균등하고, 연대기도 편파적이며, 구전과 전설이 섞이기도 함.
그래도 중세초 큰 흐름은 꽤 알수 있음. 프랑크가 서유럽 최강국이 되고 동로마가 여전히 강대하다던가. 게르만 왕국들이 망하고 바이킹이 서유럽을 침투하는등.
[ 프레데가르 연대기 ]
연대기와 역사서가 첫번째로 프랑크 쪽에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프레데가르 연대기, 카롤루스 왕실 연대기 같은 기록이 존재.
동로마 쪽에는 프로코피우스, 테오파네스등이 남긴 기록들이 있음. 그 외에는 앵글로색슨 연대기, 교황 관련 기록, 이슬람 역사가들의 기록도 상당하고.
서로 다른 진영의 기록을 비교하면 큰 흐름이 보임. 예컨대, 프랑크가 강해졌다는 건 프랑크 기록만이 아니라, 교황권과의 관계, 동로마와의 접촉, 게르만 왕국들과 충돌, 후대 조약까지 맞물려 확인.
[ 피핀 기증 문서 ]
그리고 왕실 문서, 법전, 칙령. 프랑크의 경우 메로빙거와 카롤루스 왕들의 칙령, 법전, 토지 기증문서, 교회 특권문서, 수도원 문서가 남아 있음.
이런 문서는 단순 서사가 아니라 실제 권력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를 보여줌. 예를 들어 어느 왕이 어느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했다면, 그 지역에 왕권, 귀족권, 교회망이 작동했다는 뜻.
법전이 특정 민족집단에 적용된 흔적도 지배 구조를 보여줌. 교회 기록도 중요. 왜냐면 중세 초 유럽에서 교회는 최고의 기록기관중 하나.
[ 프랑크푸르트 공의회에서 카롤루스 대제를 축복하는걸 묘사한 모자이크 ]
주교 명단, 교황 서신, 선교 기록, 공의회 기록, 수도원 기록, 은 정치권력의 확산을 간접적으로 보여줌.
예를 들어 프랑크 왕권이 가톨릭 교회와 결합했다는 것은 단순 전설이 아니라, 교황 서신, 교회 회의, 수도원 후원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남.
[ 영국에 남은 바이킹 흔적 ]
그리고 고고학. 동전, 성벽, 요새, 도시 확장, 무덤 양식, 선박 유적, 무기와 장신구, 교회와 수도원 유적이 있음.
실제로 바이킹 활동은 연대기뿐 아니라 선박, 무덤, 은화, 무기, 정착지, 지명, 교역품 분포로도 확인됨. 러시아 강길의 교역 유물, 프랑크, 아일랜드, 앵글로색슨 수도원 연대기나 바이킹 선박과 무덤등.
[ 코르도바 이슬람 건축 ]
그리고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와 지중해를 재편했다는 것 또한 이슬람 역사서, 기독교 연대기, 아랍어 비문 및 화폐, 코르도바등 건축등에서 흔적이 모두 겹침.
지명, 언어, 법률등 또한 이를 나타냄. 노르만 지명, 슬라브 지명, 게르만 법명, 라틴 교회용어, 프랑크식 작위명 같은 것도 권력 이동의 흔적.
[ 바이킹식 지명들 ]
예를 들어 노르망디라는 이름 자체가 북유럽계 정착의 흔적이고, 잉글랜드의 상당 지명은 데인로의 흔적.
중세 후기부터 점점 선명해짐. 중세 후기는 문서량이 늘어 검증 가능성이 커지기에. 교황문서, 왕실문서, 도시문서, 봉건계약, 상업문서, 조약기록의 대폭 증가로 교차 검증이 더 용이.
그리고 전환점이 오는데 이때는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 의해서 벌어짐.
3. 15세기
15세기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상주대사와 대사보고 체계를 발전시킴. 이때부터 "누가 누구를 의식했고, 누가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았는가" 가 문서로 더 잘 보임.
다른 국가의 의도, 재정, 동맹, 군사력과 궁정 내부 상황을 지속적으로 관찰한 보고등이 나옴.
즉 단순히 " 무슨 일이 일어났나" 뿐 아니라, 누가 누구를 두려워했는가?, 누가 누구와 비밀협상했는가 ?, 어느 국가가 실제로 결정권을 가졌는가, 어떤 군주가 돈이 부족했는가, 누가 전쟁을 밀어붙였는가가 보이기 시작.
4. 16-17세기
[ 15-18세기 유럽 출판물 증가 속도 ]
국력 서열이 조약과 문서로 확실히 교차검증 가능한 단계는 유럽에서는 대략 15세기 이후부터 강해져 사실상 이탈리아의 방식이 보편화되는 16-17세기면 쉽게 알게 됨.
이유는 인쇄술 확산, 관료제 성장, 국제 조약 증가, 외교 문서 보관 체계화, 회의록 및 대사 보고서 축적이 이루어지기 때문. 합스부르크-프랑스 경쟁이나 종교전쟁등으로 유럽 흐름이 보이고.
특히 베스트팔렌 이후 국가 간 조약, 동맹, 영토조정이 더 체계적으로 기록.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제후국들의 이해관계가 문서로 남기 시작.
5. 18~20세기
[ 빈 회의 마지막 장 ]
사실상 현대적 검증 가능 단계로 18세기 이후부터는 국가간 국력 서열이 매우 선명해짐. 신문, 회고록, 예산 규모, 인구 조사, 무역 통계, 조약 원문, 대사 전문, 은행 및 채권 기록등이 모두 남음.
이때부터는 " 우리가 숨은 강국이였다 " 는 주장을 하려면 증거 부담이 매우 커짐. 1815년 빈 체제부터 거의 결정적.
[ 1913년 강대국들 해군 총톤수: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 순 ]
이때부터 강대국의 강약차는 그냥 느낌이 아니라 재정 규모, 조약 보증권, 회의 참석권, 군사 동원력으로 선명하게 확인됨. 이미 통계들도 쏟아져 나오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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