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흥미돋]알고보면 꽤 의미심장한 박혁거세의 죽음.txt

작성자딸기치즈케이크|작성시간26.06.16|조회수71,761 목록 댓글 54

출처: https://www.dmitory.com/issue/402803815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알에서 태어난 걸로 유명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삼국시대, 특히 삼국 초 쯤의 사료는 정말 남은 게 극악 수준이라 잘 알려진 바 없으나 남아 있는 기록들과 구전 야사로 유추해볼 수 있는데 

 

특이하게 이 박혁거세의 죽음은 설화와 사료 양측 면에서 암시 되는 바가 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고, 그 뒤 7일 만에 죽은 몸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왕의 몸을 합쳐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런데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방해하여, 다섯 몸뚱이[五體]를 그대로 나누어 장사지내 다섯 능[五陵]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 능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사료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한 구절인데 뭔가 이상하지?

이웃 나라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용 타고 하늘 올라간 승천 신화랑 얼추 비슷해보인다만, 시체가 하늘 위로 승천하여 땅 아래로 떨어지고 그걸 뱀이 묻지 못하게 하다니 

승천 신화는 흔하지만 너무 기괴한 상황.

 

게다가 

 

1. 박혁거세가 죽은 '직후' 사망한 왕비 알영. 

7일 후에 박혁거세의 시신이 회복되었고 그때 왕을 묻는다는 논의 할 때 알영이 숨져 있어 합장하려 하니, 박혁거세 죽은 혼란기에 죽은 건 확실함. 참고로 알영은 이성이라 불리며, 박혁거세가 유력한 족장이었을 때 자신을 보조할 아내 감을 모색하여 들인 세력 있는 씨족 집안에 실권도 있는 정치적 파트너, 정치 공동체에 가까웠음.

 

2. 박혁거세의 죽음 후, 그 아들인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오른 오른 후 내뱉은 발언. "이성(二星, 혁거세와 알영)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그만두시고, 내가 국인들의 추대로 이 자리에 잘못되게 앉았다. 위태롭고 두렵기가 하천을 건너는 것 같다" 

고작 몇 문장이 안 되는데 느껴지는 단서들. "잘못되게 앉았다" 는 것부터 왕위 계승이 정상적인 게 아니란 암시가 느껴지며, 기록상 유일한 독자(박씨 족보 제외)이자 장자인데도 왕위를 물려 받은 게 아닌 '국인들에게 추대' 되었다는 언급. 이성이 물론 이때가 낙랑 전쟁중이라 위태롭고 두렵다는 구절은 이해할 만 하지만 아무리 봐도 느낌이 이상하다

 

3. 남해 차차웅과 그 일가가 제사장으로서의 면목만을 거의 보인 점. 

호칭부터가 왕이라는 뜻을 지닌 거서간에서 무당이라는 뜻을 지닌 차차웅으로 격하되었고, 실제로 하는 일도 거의 종교 지도자에 가까웠음 기록을 보면 아내인 운제부인과 동생인 박아로가 모두 제사장 혹은 종교적으로 신성화 되어, 가족 전체가 거의 종교에 종사했는데 사후 신성화된 정도였고 정치적 역할이 강조되었던 박혁거세 알영과 그 비중이 차이가 있음. 남은 기록 거진 대부분이 종교에 관련된 것이고 유독 이 시기에 박씨 왕가의 종교적인 역할이 강조됨

 

4. 남해 차차웅의 권력이 도저히 왕이라 생각할 수 없도록 너무 제한된 점. 

그저 종교적인 면모만이 강조되었다기에는 바지사장인 게 너무 보이는데, 남해 차차웅이 아버지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닌 게 무려 장례 2,3년 후인 즉위 3년차가 되던 시기임. 제위 5년 차에는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고 7년 차에는 국무와 군사를 모두 석탈해에게 이관하여 종교에만 집념을 함. 심지어 죽기 직전에는 자식인 유리 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으려하고 석탈해에게 "공이 많은 공신이라, 자신의 두 아들 대신에 즉위하라"는 유언을 남김. 사실상 남해 차차웅 시기 그는 왕이 아닌 큰무당에 가까운 위치였음

 

 

 

 

 

 

 

 

 

 

 

 

그렇다면 진실은 뭘까?

 

위에서 말했지만 이시기 사료는 너무 적어서(ㅠ)... 위와 같은 단서나 상황 증거로 추측해봐야하는데 

 

일단 박혁거세 말년에 내전이든 권력 다툼이든 혹은 외침이든 간에 정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박혁거세와 알영이 시해된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라 봄

그 과정에서 박혁거세의 시신이 훼손되고, 모종의 이유(무슨 이유일지 너무 궁금함. 단순히 시신이 너무 훼손되어서 묻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알영의 일족이 변란에 무언가 일을 저질러서 같이 합장이 안 된다 다툼이 있던 걸까? 그래서 남해 차차웅의 권력이나 정통성도 줄어든 걸까? 아니면 박씨 왕가 격하나 남해 차차웅의 정통성 훼손을 이유로 변란을 일으킨 세력이 합장을 막은 걸까? 6촌 쪽일 수도 있겠고 하여간...)로 인해 알영과의 합장마저 불가능한 상황인 것도 확실해 보임.

 

이런 난장판 속에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게 아닌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올라 전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왕실의 권위가 너무 낮아져 여동생 부인을 총동원해서 왕실 일가가 종교적 권위까지 동원하여 스스로를 방어할 필요가 있었음

 

석탈해의 경우 이때 남해 차차웅의 권력을 흡수한 쪽인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석탈해는 사료상, 또 학문 연구상 신라 외부 일족으로 추측된다는 거임(선진적인 야장 기술을 보유한 일족을 지닌 채 신라로 들어왔고 스키타이 쪽과 연관이 있다는 설도 존재함)

보통 이런 외부 일족이 토착민과 경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보면 석탈해와 박씨 왕가의 관계를 둘로 생각해볼 수 있음

 

 

1. 박혁거세의 죽음에 석탈해를 비롯한 석씨 일족이 관련 있는 경우. 이러면 박혁거세 말기 이들 일족이 직접적인 정변을 일으킨거나 혹은 토착민인 육촌 세력들이 외부 세력과 규합하여 박씨 왕가를 타도하였다는 가설이 성립됨. 다만 불완전한 승리였기에 남해 차차웅을 제위와 올리고, 박씨 일가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으로 타협했고 석탈해는 왕가에게서 권력을 천천히 이어받아 순조롭게 왕이 되었다. 

 

>실제로 박혁거세가 죽기 직전 "신라에 용 두 마리가 나타났다"는 구절로 왕 말고 다른 권력자의 부상이 암시되긴 함.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말했디시피 석씨 일족이 외부 일족이라는 점에서 의문이 제시 됨. 보통 이런 이들은 토착민과 경쟁 관계를 형성하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왕의 등용으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과연 토착민들이 석씨 일족을 왕족으로 만들어 군사와 정권을 모두 다 맡길 만큼 신뢰할 관계였을까? 만약 이렇다면 석씨 일족이 생각보다 매우 강대한 일파로 육촌 세력을 동맹이 아닌, 제압하여 휘하에 두는 형태로 거느려야 했는데 그렇다기에는 석탈해 이후 석씨 일족이 김씨 일족에게 왕위를 뺏기고 딱히 힘을 못 쓰는 모습을 보임.

 

2. 박혁거세의 죽음에 석탈해가 연관이 없고 아군 관계인 경우. 박혁거세의 죽음이 육촌의 반란이었고 이렇게 왕권이 실추된 상황에서 남해 차차웅이 토착 세력을 제압하려 외부 세력인 석탈해와 연합했다는 가설.

 

>실제로 박씨 일가 또한 외부 일족이었고 석탈해와 뿌리가 같은 다른 분파라는 설 또한 있음(석박김 동성가설인데 확실한 건 X). 한가지 확실한 것은 신라 왕가가 자신을 추대한 육촌 세력과 다른 뿌리를 지녔다는 것임. 통치에서 곤란을 겪은 박혁거세가 결국 내전 끝에 사망했고, 남해 차차웅이 이때 그 후 부상했던 석씨 일족과 협업하여 공동전선을 형성, 육촌 세력을 견제하고 서서히 왕권을 회복했다는 이야기. 이러면 말이 되는 게 석박씨 끼리는 왕위 계승이 상당히 평화롭고 자유자재로 서로 넘어갔고 사실상 같은 일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음. 

겁박으로 인해서 형성된 관계가 이리 한 몸처럼 될 수 있을까? 모계계승을 부분 인정하는 신라에서 유리 이사금의 사위였던 석탈해부터 석씨가 동족으로 편입되었을 수도 있고, 석박씨가 원래 동성이었을 수도 있고 하여간 저 두 왕가 씨족 사이 반목하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는 거임 심지어 박씨가 권력을 회복했을 때에도 박씨가 석씨 일족에게 보복한 적은 없었음.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박혁거세의 죽음 당시 석탈해의 나이가 꽤나 어렸다는 것임 최근 고고학적 발견으로 석씨 일족이 남해 말~유리 이사금 시기에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게 드러났는데 그러면 박혁거세 시해 당시 석씨 일족이 개입할 여지는 없음. 즉위 7년 차에 남해 차차웅이 석탈해를 사위로 들인 것도, 그때부터 석씨일족이 부상하였다는 증거일 수 있겠음

 

>설득력이 꽤 있어보이는 가설이지만 이 또한 관련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끼어맞추기 식으로 사실 짐작하는 수밖에 없음... 애초에 사료상 신라 개국 연대랑 고고학적 발굴 연대랑 거의 2, 3세기 차이가 있다함 그래도 석박씨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했을 때 초반이 어찌되었든 두 일족이 최소 친척 급의 관계를 형성했을 건 맞아보임

 

 

 

다들 설화로만 알고 있던 박혁거세의 죽음이 알고보면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또 그 이면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다는 게 주목할점.

건국 시조가 토막날 정도로 시신이 훼손되어서 왕비와 합장도 못한(사실상 정상적인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니 그 내막이 정말 궁금한데 사료가 없는 게 한 ㅠㅠ

 

원톨이 가장 궁금하고 미스터리하게 생각하는 삼국사 이야기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지난주말 | 작성시간 26.06.16 아 밎힌 개흥미돋이다 고대에 설화로 있었던일 너무 판타지스토리같고 좋잖아 붘맠하고 시험 끝나고 봐야지
  • 작성자고슴도치의 성장 | 작성시간 26.06.16 와..무슨일이잇엇을까..
  • 작성자대강살자고 | 작성시간 26.06.16 진짜 궁금하다..
  • 작성자녹차라떼에샷추가요 | 작성시간 26.06.16 흥미돋ㅋㅋㅋㅋ
  • 작성자현무 D조 | 작성시간 26.06.22 헠헠 글 써줘서 고마와...!! 한국사 공부 중이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접하니까 너무 흥미롭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