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10321783982
참고로 도시들의 순위
및
당시 도시들의 인구수 출처는
「1944년 5월 1일 조선총독부 인구조사 기준 한반도 주요 도시 인구 순위」
朝鮮總督府, 『昭和十九年五月一日 人口調査結果報告 其ノ一』, 1944.
각 도시의 이미지 사진들은
최대한 당시(일제강점기)의 모습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끝내 못찾은 것들은 약간 다른시대의 사진도 섞여있을 수 있음
20위 - 마산 54,454명
원래 조선시대부터 조창과 장시가 있던 마산포라는 상업기반이 이미 있었고,
1899년 개항 이후에는 일본인 거류지가 들어선 ‘신마산’이 따로 발달했음.
즉 전통 조선인 상권인 기존의 마산포와
일본인 중심의 신마산이 한 도시 안에서 병존하는 구조였음.
1930년대 후반에는 청진·흥남·성진 같은 북부 공업도시들이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면서 전국 인구순위에서는 점점 밀려나게 됨.
하지만 20위라는 순위는 마산이 쇠퇴했다기보다는, 일제 말기에 다른 신흥 공업도시들의 성장속도가 워낙 비정상적으로 빨랐던 결과에 가까움.
경남 사람에게는 여전히 부산 다음으로 익숙한 항구·상업도시 중 하나였고, 실제로 회사와 공장이 상당수 존재했음.
비록 전국구 대도시까지는 아니지만 경남권에서는 확실히 '도시다운 도시’였다고 볼 수 있을듯함.
19위 - 군산 57,589명
군산을 키운건 걍 단어 하나로 설명 가능함.
'쌀'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대표적인 수출항이 군산이었음.
일본 상인·정미업자·창고업자들이 몰려들었고, 철도와 도로가 주변 농촌의 쌀을 군산항으로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만들어졌음.
따라서 인구는 6만에 못 미쳤지만 인구수에 비해 경제적인 활력이나 존재감으로는 상당히 유명했음.
당시 ‘군산’ 하면 항구, 쌀가마니, 정미소, 쌀 창고같은 이미지로 바로 대표되었을 정도.
다만 농산물 반출구조 원툴에 크게 의존했다보니
1930년대 후반 북부 공업도시들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결국 도시의 성장세가 점차 둔화되며 침체되기 시작하는 양상을 보였음
18위 - 전주 67,095명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전라도의 전통적인 중심도시였고, 전북도청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름값으로만 보면 겨우 18위 정도의 위상이라고 느낄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임.
주변 전북 농촌에서 관청·학교·시장·병원·상업시설을 이용하려면 자연스럽게 전주로 모였음.
다만 군산처럼 대형 개항장이라거나,
대전처럼 전국 철도망의 핵심 분기점도 아니었으며,
흥남 같은 대공업단지도 없었음.
때문에 근대에 들어와서는 인구팽창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의 중심 상업·행정도시’ 역할과 위상은 전주가 계속해서 유지해나갔음.
17위 - 성진 68,045명
원래부터 유명한 전통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동해안의 개항장 + 한반도 북부 공업화의 흐름을 타고 급성장했음.
함경북도 남부의 수산물과 광산물 반출항 역할을 했고,
철도망이 연결되면서 배후지역의 물자가 더 많이 모였음.
‘함경도 동해안의 새로 뜨고있는 공업·항구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했음.
현재 북한의 김책시임.
16위 - 목포 69,269명
목포는 1897년에 개항한 이후 한반도 서남부의 수출입 창구로 급성장한 도시였음.
영산강 유역과 호남평야 남부의 쌀·면화·농수산물이 목포로 모였고, 일본으로 반출되는 상품을 취급하는 일본인 상사·창고·금융업이 성장했음.
항구 주변에는 일본인 신시가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전형적인 식민지 개항장 풍경도 나타났음.
다만 1930년대 후반부터 국가정책적 투자가 북부 중화학공업도시로 옮겨가고
내륙도시 광주가 행정·교통 중심으로 계속 성장하면서
목포는 상대적 상승세가 둔화되기 시작함.
한때 호남의 근대도시를 대표했던 큰 항구가
서서히 내륙의 광주에게 중심지 자리를 넘겨주는 단계였다고 보면 됨.
15위 - 개성 76,360명
고려의 옛 수도라는 압도적인 역사성이 있었고
‘송도’라는 별칭 자체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
조선 후기부터 송상이라 불린 개성상인이 전국에 상업망을 깔았고
인삼·금융·도소매 분야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보였음.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조선의 8대 도시 정도에 들어가는 위상이었지만,
1930년대 10위 밖으로
1940년대에는 15위 정도로 점점 인구 경쟁력이 하락함
비록 새로운 근대 산업이나 젊은 노동자들이 모여드는 신흥 산업도시들에게 많이 추월당하고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도시의 역사적 이름값이나 존재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고려의 옛 수도, 개성인삼, 개성 상인들이 있는 오래된 전통 상업도시라는 이미지가 매우 선명했음.
14위 - 대전 76,675명
‘철도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을 가장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곳임.
한적한 시골 촌락이었지만 경부선이 지나고 호남선까지 갈라지는 철도 분기점이 되면서
대전역 주변에 사람·상점·숙박업·창고·운송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함.
결정타는 1932년 충남도청이 전통적인 중심도시 공주에서
신흥도시 대전으로 이전한 것이었음.
이후 대전역과 도청 사이에 관공서·은행·회사·상점이 줄지어 생기고,
1935년에는 '부'로 승격됨.
당시에도 ‘대전’하면 기차역, 철도, 신시가지 같은 젊은 도시 이미지가 강했다고 함
13위 - 진남포 82,144명
대동강 하구 쪽에 자리잡아
평양과 서북부 지역의 물산을 배로 실어 나르던 항구도시.
1897년 개항 이후부터 황해도 재령·안악 등의 쌀을 비롯한 농산물이 이곳으로 모여 수출됐고,
인근의 거대도시 평양과는 해상 및 하천운송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었음.
사실상 평양의 외항 역할을 톡톡히 하며 급성장한 도시임.
항만 때문에 창고·정미·운송·상업·가공업이 따라붙었음.
그래서 인구는 8만 정도지만 진남포항을 통해 움직이는 물동량 때문에
경제적 존재감은 인구수 그 이상이었다고....
12위 - 해주 82,217명
조선시대부터 황해감영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도 황해도청 소재지였기 때문에
황해도 사람에게는 ‘도시로 나간다’고 할 때 대표적으로 떠올릴만한 가까운 지방도시였음.
관청·학교·병원·상업시설이 집중되고 주변 농촌의 농산물이 모이는 지역 중심지 역할을 했음.
다만 전국급 존재감으로 보면 딱히 유명한 산업이 있는 공업도시도 아니었고,
비록 해주항이라는 항구 기능도 있었지만 부산·인천·목포처럼 항만 자체가 도시의 전국적 브랜드가 된 정도는 아니었음.
1938년에야 비로소 '부'로 승격된 것도 이런 부분을 보여줌.
참고로 김구와 안중근의 고향이기도 함
11위 - 광주 82,431명
1896년에 전라남도 도청이 자리 잡은 뒤
관청·법원·우체국·학교 등이 집중되었고
철도까지 들어오면서 주변 전남 농촌 인구와 상품이 광주로 모이기 시작함
결국 1935년 부로 승격됨.
당시 광주는 ‘전남의 중심이자 한창 빠르게 커지고있는 내륙 상업도시’였음.
원래 전라남도의 대표 도시는 목포였고
1920~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광주보다 ‘도시 냄새’는 더 강하게 난다고 볼 수 있었지만
(큰 배가 드나들고 대형상점과 창고, 일본인 상권이 있는 항구였으니...)
광주가 행정·교통 중심으로 계속해서 성장을 거듭해나가자
결국 목포를 인구수로 추월해버림
~ 여기서부터는 그 당시 인구 10만 넘어가던 도시들 ~
10위 - 함흥 112,157명
바로 옆의 또다른 대도시 흥남과 거의 붙어 있지만 도시 성격은 정반대였음.
함흥은 함경도의 오래된 행정·상업·교육 중심지였음.
조선시대에도 함흥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이제 사실상 야인들의 구역으로 보고
함경도의 사족들이나 주요 유지들은 다들 함흥에 모여있던 끝자락의 대도시 느낌이었음.
옆동네인 흥남이 공장 때문에 갑자기 벼락출세한 노동자 대도시라면
함흥은 관청·학교·상점·지역 유지가 모여 있는 전통적인 근본 대도시 이미지.
철도망이 개선되면서 원산·평양·경성 및 함북 방면과 연결되고,
바로 옆 흥남공업지대가 급성장하면서 배후 상업·주거·서비스 중심지 역할도 커졌음.
하지만 공장 자체가 흥남에 집중됐기 때문에
인구는 결국 흥남에게 추월당했음.
9위 - 원산 112,901명
더 큰 항구도시인 청진이나 흥남이 확 떠버리기 훨씬 전부터 유명했던
동해안의 대표적인 도시였음.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첫 총파업인 '원산 총파업'도 여기서 일어났을만큼
이미 근대적인 젊은 노동자층이 형성되어 있던 산업도시였기도 함
부산 다음인 1880년에 개항했으니 근대 항구도시로서 역사가 상당히 길었던 셈.
함경도와 동해안의 물산을 모아 일본 등으로 내보내고 수입품을 받아들이는 상업항이었으며,
이후 철도가 연결되면서 내륙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역할도 강해졌음.
‘함경도의 바닷가 도시’ 하면 원산이 먼저 떠오를 정도였고,
동해안 휴양도시이자 피서도시로서의 명성도 이미 유명했던 곳.
1930년대부터 이미 휴양지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는
원산 송도원 해수욕장
다만 1930년대 후반 이후로는 당시 경제정책의 중심이 중화학공업 쪽으로 이동하면서
새로 등장한 청진이나 흥남의 폭발적 성장에
상대적으로 밀려난 구세대 항구도시라는 면도 있었음.
8위 - 신의주 118,398명
신의주 역시 전통적으로 컸던 도시가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야 한-중 국경과 철도가 만들어낸 신도시임.
원래 이 지역의 전통적인 중심은 의주였지만
경의선 철도와 압록강 철교가 놓이면서
사실상 중심 지역이 신의주로 옮겨가버림.
압록강 건너 중국 단둥과 바로 연결되므로
만주로 들어가거나 조선으로 내려오는 사람·화물이 쏟아지는 관문이었음.
그래서 당시 신의주는 단순 국경도시라기보다는
국제철도의 환승·무역·물류도시라는 성격이 훨씬 강했음.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압록강 수계의 풍부한 전력을 배경으로
화학·펄프·금속 등 공업도시로까지 커졌음.
일제 말기에는 신의주 주변에 ‘근대 중화학공업지대’가 조성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까지 대거 유입될 정도.
7위 - 흥남 143,604명
원래는 작은 바닷가 어촌에 가까웠는데
갑자기 들어선 초대형 공장지대 하나가
결국 거대한 신도시 하나를 만들어버린 케이스임.
1920년대 후반 조선질소비료를 중심으로 거대한 화학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부전강 등 북부 수력발전에서 값싼 대량 전력을 공급받고,
항구까지 끼고 있으니 전기화학공업을 돌리기에 매우 좋은 장소였음.
흥남 비료공장은 종업원 규모만 수만명에 달했다고 함.
공장 노동자와 가족, 하청·상업·운송 종사자가 몰리면서 도시 인구가 폭발하게 됨.
그래서 전통의 근본 도시 함흥마저 인구로 추월해버렸고,
한낱 '읍'이었던 곳이 결국 '부'로까지 승격되는 벼락출세를 함.
6.25때 흥남철수로 매우 유명한 그 도시 맞음
6위 - 청진 184,301명
이 순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시 가운데 하나임.
20세기 초만 해도 대구·평양 같은 전통 대도시와 비교할 급이 아니었는데,
일제 말기에는 인구 18만을 넘겼음.
1920년에서 1944년 사이 청진의 인구 증가폭은
당시 한반도의 주요 도시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컸던 것으로 나타남.
이유는 거의 항만+철도+중공업+대륙침략 병참기지의 조합이었음.
함경북도의 철광·석탄·수산자원이 배후에 있었고,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기 좋은 동해안 항만이라는 위치까지 가지고 있었음.
제철·금속·기계 계열 공업과 수산가공업이 성장하면서
한반도 전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몰려왔음.
당시 사람들이 청진을 떠올릴때면
북쪽에 새로 생긴 크고 거친 공업·항구도시
굴뚝과 철도·부두·공장노동자들의 젊은 도시라는 인상이 매우 강했을 것.
~ 그 당시 인구 20만 넘어가던 도시들 ~
5위 - 대구 206,638명
여긴 흥남이나 청진같은 젊은 신흥 대도시들과 달리
조선시대부터 이미 큰 지방도시였던 곳이
근대에 들어와서도 거대도시로 계속 살아남은 사례.
원래부터 대구는 경상도 감영이 있던 영남 내륙의 행정 중심지였고,
조선 후기에도 평양이나 강경과 함께 손꼽히는 상업도시였음.
특히 대구 약령시는 정말 전국구 규모의 상업교류의 장으로 유명했음
여기에 경부선 철도가 대구를 지나게 되고,
경상북도 도청까지 대구에 자리 잡으면서
시대가 현대로 바뀌어버린 이후에도
영남 내륙의 상업·행정·교육 중심지라는 지위를 잃지 않았음.
공부·취업·장사·병원·관청 업무를 보러 올라오는 사람들이
영남 내륙 전역에서 대구로 몰려들었고
시장과 금융기관, 학교 등이 대구에 집중되었음.
조선시대에는 매우 컸던 고을이나 도시들이
근대화의 새 바람을 맞고 하나둘씩 쇠퇴의 기로를 걷는 와중에도
대구는 계속해서 그 위상을 유지한 몇 안되는 케이스임.
4위 - 인천 213,833명
지금과 동일하게 서울의 바다 관문 + 경인공업지대의 항구였음.
자체적으로도 큰 도시였지만
서울과 한 세트로 움직이는 성격이 강했던것도 지금과 똑같음.
경인철도가 연결된 이후 서울로 들어가는 수입품과 서울에서 나가는 물자가
인천항을 거치는 시스템이 이미 그때부터 완성되어 있었음.
1930년대부터는 경성과 인천 사이에
각종 공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인구가 더욱 가파르게 증가했음.
방직·식품가공에서 금속·기계 계열까지
도시의 기반 산업이 한층 다양해졌고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빨아들였음.
다만 인천은 행정구역 확장 버프를 받았던 점은 있음.
그래서 인구 21만명을 그대로 ‘빽빽한 구도심 21만’으로 이해하면 곤란하지만,
항만+공장+경성 배후도시라는 요소가 결합해 전국 4위권까지 성장.
~ 이제 여기서부터는 인구 30만 넘어가던 도시들 ~
3위 - 부산 329,215명
일본이랑 가깝다는 위치적 이점을 타고
미친듯이 라이징하던 신흥 대도시.
1920년대 당시 경상남도의 오랜 중심지였던 진주에서
신흥대도시 부산으로 도청이 옮겨간 사건은
당시 경상도의 근본 대도시였던 진주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허탈함을 안겨주었다고 함
문제의 그 경상남도청 당시 모습
이제 경상남도의 새로운 중심지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진주시민들 사이에선 거의 민란에 가까운 격렬한 항의 소동이 벌어졌을 정도...
부산의 성장세는 나날이 갈수록 커져서
결국 일제 말기에는 제2의 도시 평양까지 넘보게되는 지경에 이르게 됨
이 조사가 실시된 1944년 기준으로
인구 30만이 넘던 도시는 부산, 평양, 그리고 서울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부산과 평양의 인구수 격차는
아주 근소한 차이까지 좁혀질만큼
당시 부산의 추격세는 매서웠음
일단 일본인들이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건너오면
사실상 처음 접하는 조선의 대도시가 부산이었고,
그러다보니 일본인 거주자와 일본계 기업의 비중도 매우 높았음
부산 광복로의 모습
서울도 그랬지만 당시 우리나라 도시들의 최고번화가는
당연하게도 일본인 거주구역의 일본인 거리였음
지금은 불 타서 사라진 구 부산역
항만·철도·창고·해운·수산·상업이 도시 자체의 생명줄이었으며,
조선시대부터의 전통 도시가 근대화된 평양이나 대구와 달리
구한말의 개항 이후 무역과 물류로 체급이 엄청나게 커진
현대적 거대도시의 대표 사례였음.
당시 서울이 강북만 개발되어있고 강남은 시골이었다면
평양은 대동강 서쪽이 번화가였고
강 동쪽은 시골이었던 도시구조
2위 - 평양 341,654명
당시 평양의 도시 위상은 정말 높았음.
한반도의 서북부 전체를 대표하는 대도시이자
서울과 경쟁할 만한 유일한 거대 지방도시로 여겨졌음
물론 서울(당시엔 경성)의 라이벌이라기엔
사실 인구수가 거의 3배 차이가 나긴했지만....
그래도 평양은 경주나 서울 못지않은
한반도의 근본 대도시이자 역사적 고도였고,
'평양 상인(유상)'이라는 독자적인 상인집단과 함께
실용적이고 이재에 밝은 상업도시
세련되고 풍류를 아는 문화도시 이미지가 있었으며
(서울이 높으신 정치인들의 행정도시라면
평양은 상인들의 도시, 풍류의 도시라는 프레임이
조선시대부터 계속 내려왔음)
근대에 들어와서는 또 기독교와 서양식 문화가
조선에서는 비교적 빨리 꽃 피운 개방적인 도시라는 점도
평양의 세련되고 도회적 이미지에 영향을 주었음
실제로도 서울 vs 평양은 두 도시 시민들간에
전통적인 숙적, 라이벌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두 도시간에 대항전 경기 이런것도 많이 했었고
(이른바 '경평전')
하다못해 기생들간에도 두 지역은 라이벌 관계 ㅋㅋ
구한말부터 신흥 라이징 대도시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부산이
당시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며 제2의 도시 자리를
이미 이때부터 위협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반도인들의 머릿속에 '평양 = 근본 지방대도시' 인식이 워낙 강했고
실제 인구수로도 비록 간발의 차이지만
분단때까지도 제2의 도시 자리는 평양이 계속 지켜냈음
~ 그 당시 인구 100만에 육박한 유일한 도시 ~
1위 - 경성 (지금의 서울)
988,357명
말 그대로 압도적인 제1도시였음.
주요 은행·기업 본점, 경성제국대학, 신문사, 방송국 등이 몰려 있었고
미쓰코시나 화신 같은 초거대 백화점,
자동차, 영화관, 카페, 전차, 네온사인이나 쇼윈도 등
‘제대로 된 현대생활’을 맛볼 수 있는
당시 한반도에서 사실상 유일한 장소였음
당시 서울사람들의 길거리 패션
당시 서울의 배달 라이더들
서울시민들이 주로 배달시켜먹던 주 메뉴는
설렁탕과 냉면이었다고 함
심지어 배달서비스 제공은 물론 심부름이나 러브레터/서류 전달 역할도 하는
자전거 퀵서비스 대행 업체도 저 당시 서울에서는 이미 생겨나고 있었다고 함
당시 서울의 도시문화를 선도했던 미쓰코시 백화점
(지금 현재 신세계백화점)
그리고 그 미쓰코시의 라이벌이었던 종로의 화신백화점
당시 미쓰코시백화점은 엘리베이터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옥상정원 같은 시설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였고,
서울 최고 번화가인 본정통에 조지야·히라타·미나카이 같은
일본계 백화점들이 잇달아 들어서며 경쟁하던 와중에
조선인들의 구역인 종로에는 '화신백화점'이
외벽 일루미네이션에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추며
“여기가 정말 조선인가?” 싶을만큼의 당시 기준 최첨단 초현대적인 풍경을 보여주었음
인구 100만에 육박한 데에는 실제 도시성장도 컸지만 1936년 대경성 확장의 영향도 매우 큼.
영등포·마포·용산 주변 등 교외 지역을 대거 편입하면서 행정구역 자체가 넓어졌기 때문.
그래도 그걸 빼더라도 서울로 일자리·학교·장사기회를 찾아 들어오는 지방 인구가 엄청났고,
영등포 일대에는 이미 대규모의 공단지대까지 들어서고 있었음.
당시 서울의 전차 노선도
이미 19세기부터 서울시내에 깔리기 시작한
'시민들의 발' 전차도 노선망이 계속 확대되어
황금정선·용산선·마포선·동소문선·돈암정선 등
지금으로치면 지하철과 같은 복잡한 대중교통망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이 전차 노선들은 버스와 환승도 가능했음.
택시들은 조선은행 앞 같은 번화가에 줄지어 손님을 기다렸고
심지어 서울시내 관광용 ‘경성명소 유람 버스’까지 운행되었다고 함
그래서 웬만큼 큰 도시에서 온 일본인들조차도
'그래봤자 식민지인데... 시골이겠지'하고 무시했다가
'우와... 진짜 크고 현대적인 도시네'하고 깜짝 놀랄만큼의
현대적 시가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던 도시가 서울이었음.
일본인들의 구역인 화려한 남촌 일대와 달리
조선인이 많이 살던 북촌과 주변부는
도로와 주거환경이 말도 안되게 열악했음.
당연하게도 일본인 거주구역인 남촌 위주로
도로·상하수도·상업시설·위생시설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기 때문.
딱 지금의 서울역~명동 일대에만 마치 미니도쿄같은 번화가가
약간 섬처럼 떠 있는 모양새였던
전형적인 식민지 이중구조의 도시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