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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별명 ‘명필’ / 조춘호(서울 경인지부)

작성자배만식|작성시간26.06.15|조회수36 목록 댓글 0

흘러간 별명 ‘명필’ / 조춘호

 

여고 시절이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앞자리 교무주임 선생님이 큰 소리로 외치셨다.

“조춘호! 서당에 몇 년 다녔어?”

그 질문은 교육대학 국어과 교수님에게도 들었다. 교사 시절 교장 선생님들도 아버지에게 배웠냐? 서당에 다녔냐? 며 요즘 선생님들은 한자를 그리는데 나만은 한자를 쓰는 달필이라고 공공연히 칭찬했다. 교사들도 그렇게 인정했는지 교내에 경조사가 있으면 동료 교사들이 내민 흰 봉투가 내 책상 위에 쌓였다. 근조謹弔 부의賻儀 축결혼祝結婚 축화혼祝華婚 축수연祝壽宴… 쓰기에 바빴다.

그뿐 아니었다. 한글로 쓰는 학교 행사 빈 상장도 내 책상 위에 놓였다. 학년 말에는 동 학년 우등상과 개근상 2∼3백 장을 붓으로 써 댔다. 붓펜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먹물 마르라고 교실 책상 위에 쭉 널어놓으며 썼다. 그러나 어깨와 팔목이 아프지 않았던 걸 보면 젊을 때라 그랬는지 피곤도 잘 몰랐고 꽤나 즐겁게 썼던 모양이다.

학교행사의 플래카드까지도 학교 아저씨가 페인트를 준비해 놓으면 퇴근 시간 지나 교무실에 혼자 남아서 썼다. 어느 날 동네 대청소를 나가는 깃발을 써야 했다. 교사 책상 세 개 위에 기다란 천을 펼쳐놓고 큰 붓을 끈덕진 페인트 통에 담그고 있을 때였다. 늦게 퇴근하던 교장 선생님이 교무실에 들르셨다.

“왜, 글씨는 잘 써 가지고 남들처럼 퇴근도 못 해요!”

안쓰러운지 칭찬을 몇 마디 더 하고 나가셨다.

평택군 작은 J학교에 근무할 때도 교장실 환경을 붓글씨로 도맡았다. 교장 선생님은 자기의 ‘오른팔’이란 별명도 붙여주셨다. 그곳에서 6학년 동 학년 했던 남자 L교사가 몇 해 전 파주시 내 학교 교장이 되어 동료 여교장 한 사람과 함께 방문했다. 교장실에서 그는 나만큼 글씨 잘 쓰는 명필을 이제껏 본 적이 없다고 같이 간 여교장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난 고개를 저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그런 글씨가 내 손에서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주 교육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몇 달 지난 뒤 서울 신광여고에서 온 친구는 내 만년필과 자기 것을 바꾸자고 했다. 볼펜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 친구 것은 내 것보다 좋고 비싼 파이롯트 만년필이었다. 가격이 맞지 않아 선뜻 대답하기가 그랬다.

“값은 상관 마. 춘호, 너처럼 글씨를 잘 쓰고 싶어서 그래.”

만년필 길이 들어 잘 쓴다고 생각했는지 억지로 내 것을 가져갔다. 대신 예쁘고 큰 파란색 자기 만년필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아 참, 이래도 되나?’

교감이 되어 부천에 근무할 때 그 친구가 부천에 살고 있어서 32년 만에 동창 몇 명과 함께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뭔가 적은 메모지를 건네게 되었다.

“야! 춘호, 네 글씨가 왜 이래?”

그 눈에 떠 오른 실망의 빛이라니. ‘내 손아귀에 힘이 안 가는 걸 어쩌라고.’

그 후로 십수 년이 흐른 지난해에는 80년대 송탄에서 함께 근무했던 옛적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이었지만 그들은 무엇보다도 내 글씨부터 감탄 섞어 서두에 올렸다. “지금은 아녜요”라고 했지만 그래도 재차 삼차 내 글씨가 기가 막혔다고 이구동성이었다.

정년퇴직 후 법원의 조정위원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정을 마치면 판사에게 올리는 조정 기록지가 있는데 거기에 쓴 내 글씨를 보면 한심스럽다. 도대체 누가 쓴 필적일까 일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비뚤고 흔들흔들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 남의 글씨만 같다. 참 아쉽다. 아쉽기만 할 뿐 잘 쓰려 해도 별도리가 없음은 더 아쉽다.

그런데 지금의 내 글씨를 나처럼 안타까워하는 것은 남편이다.

“당신 글씨 참 잘 썼었는데….”

결혼 전 내 편지 글씨 보고 홀딱 반했었다는 얘길 또 한다.

‘명필’ 흘러간 내 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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